억울하게도 며칠 전 김준석과 김준면이 일으킨 소동의 주범이 나로 몰려 일주일 동안 주번을 맡았다. 애들은 다 집으로 돌아가고 적적한 학교에 노을진 풍경을 배경으로 한 텅빈 운동장을 잠시 서서 바라보다 교실로 몸을 돌렸다. 부피가 꽤 큰 분리수거함을 들고가느라 여간 불편해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폈다.
"도수."
부르는 목소리에 고갤 들었다. 김종인의 똘마니였다. 당사자는 분명 김종인과 친구라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김종인이 불러."
한두 번이 아닌 일이라 의연히 무시하며 계단을 올랐다. 무거워 자꾸만 바닥에 끌리는 분리수거함이 무척 불편했다.
"얼른 가자."
조금 귀찮다는 듯한 목소리로 걸음의 방향을 틀길 바라는 똘마니의 목소리는 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아.. 김종인이 아... 아 진짜... 좀 가주라. 어?"
기어코 녀석은 2층 우리 반까지 날 따라들어왔다. 분리수거함을 제자리에 놓아두고 몸을 틀어 반을 둘러봤다. 날 따라온 녀석의 자리는 가방 없이 깨끗했다. 집에 가려다 붙잡힌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녀석의 말대로 그곳에 가느라 짐을 다 챙긴 걸지도 모른다.
"아 씨발년이... 좀 가자고."
나는 몸을 홱 틀어 욕을 지껄인 녀석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녀석은 순간 바뀐 내 분위기에 조금 놀란 듯이 뒤로 한 걸음 물렀다.
"김종인이 나는 데려오되, 손 하나 대지 말고 데려오래지."
난 녀석의 오른쪽 어깨를 검지로 툭. 툭. 밀쳤다.
"그래 매사에 조용하고 김종인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마리오네트처럼 행동하는 애가 갑자기 변해서 놀랐어?"
".....야..."
"따라와."
앞머리를 위로 쓸어넘기며 다른 손으론 가방 고리에 걸린 가방을 어깨에 둘러맸다.
노을에 걸린 그림자를 흘끔 보니 녀석은 나를 종종 걸음으로 따라오는 듯했다. 자존심은 좀 상했을지언정 녀석의 말마따나 김종인에게 가는 길이니 모로가든 됐다는 생각일 것이다.
사실 도망칠 생각도 없었고 가지 않거나 이유, 핑계를 대어 걸음하지 않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난 김종인 옆에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학교에서 살아갈 수 있다. 학교 애들이 말하는대로 기생충이라 표현해도 들어맞았다.
기생충.
웃음이 굳게 닫힌 입술을 비집고 퍼져나왔다.
김종인은 내 헛웃음을 보고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끌어올렸다.
녀석이 자주 가는, 매 하교마다 또는 학교가 아니면 가는 곳. 지금은 폐쇄된 체육창고에서 김종인은 둥지를 틀었다.
초록색 매트가 산처럼 쌓인 곳에 등을 기댄 김종인은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구경이었다. 김종인은 이따금 나를 저런 눈으로 바라봤다. 녀석의 눈초리는 어쩐지.. 꽁꽁 싸매고 있어도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게 한다.
"왜 자꾸 이런 곳으로 부르는 거야.."
내 말에 김종인은 입에 물고 있던 끝이 다 탄 담배를 날 이곳으로 데리고 온 그 남자애에게 던지며 말했다.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지 않나. 음험하고 음습한. 눅눅한 공기. 딱 네가 생각나더라고. 그래서 이곳에 올 때마다 네 생각이 나. 보고 싶더라고. 나 너 좋아하잖아."
"......."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네가 저 멀리 앉아있어도, 내 가까이 있어도. 이렇게 바라봐도, 네가 다른 것이 아닌 날 바라봐도. 이렇게..."
김종인은 곧 쓰러질 기세로 비틀비틀 내게 걸었다.
"넌 방금 전 빤 양말을 신고 장맛비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야."
김종인에게선 시큼하지만 달달한 냄새가 났다.
김종인은 내 머리를 감싸더니 제 가슴팍에 묻었다.
"난 무슨 느낌이야?"
김종인은 몸을 떼더니 내 양 어깨에 두손을 모두 올렸다. 저를 응시하게 한 녀석의 눈동자는 초점없이 흐려 있었다. 난 고개를 돌렸다. 김종인이 가끔 같이 다니는 녀석들이 매트 이곳저곳에서 처음 보는 여자애들과 엉켜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주변엔 김종인이 방금까지 피우던 담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너. 약 했니?"
나는 아마 경멸한다는 눈빛으로 김종인을 쏘아봤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김종인은...
"누가 김종인 좀 말려 봐!!!!! 이 새끼들아 일어나!!!"
순식간에 미치광이로 돌변해 나를 죽일만치 패진 않을 것이다.
약에 쩔은 녀석들과 뒤엉켰던 여자 중 한 명으로 추정되는 앙칼지고 높은 고성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
"이주일 간은 가만 누워 지내야 할 거야. 퇴원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이고."
도경수는 늘 그렇듯이 딱딱하고 무신경한 얼굴로 경고를 했다. 나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도 도경수처럼 본래의 나를 숨기고 여러 자극에 무디고 여린 소녀 연기를 해본 적이 있지만, 저렇게 오랫동안 숨어 지낼 순 없었다. 그때도 그랬듯 난 결국 날 숨기지 못해 쓰러진 것이다.
그런 면에서도 도경수는 대단한 녀석이었다. 우등생으로서가 아닌 늘 가면을 쓰며 지낸다는 게.
"이번엔 정말 죽을 뻔했어."
정말로. 말릴 사람도 몇 없던터라 미쳐 돌변한 김종인을 잡은 애들도 상해를 입은 상태였다. 도경수는 이번 사고도 오롯이 내 탓이라 학교는 심의했다 전했다. 익숙했다. 이런 상황에 화를 낼 이유조차 고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말이 아니지?"
"어제 아버지께서 너 잘 때 잠깐 들려 얼굴 보고 가셨어. 당장이라도 유학 보낼 생각이시더라."
아, 진짜 많이 상했네. 이번엔 몸만이 아니라 얼굴까지 생채기가 났다. 그것도 무척 티가 나게. 멍은 가라앉는다지만 시멘트 바닥에 끌린 왼쪽 눈가와 뺨은 손바닥만하게 상처가 나 있다.
"엄만?"
거울을 돌려가며 얼굴을 확인하다 금새 지루해져 내려놓았다. 그때까지도 도경수는 침묵이었다.
"하긴. 엄마 의견이 뭐가 중요해. 그치?"
"아주머니도 많이 걱정하셨어. 아버지께 유학 얘기 꺼내신 것도 아주머니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고 귀를 잡았다.
"도경수."
도경수는 대답하라는 듯 눈을 맞췄다.
"내기하자."
"무슨."
"내가 김종인 위에 설 수 있을지, 영영 지고 살다 유학 가버리게 될지."
"선다면?"
"나랑 같이 유학 가."
"그게 아니라면."
"나만 가는 거지. 넌 대학 갈 때 뒤따라 오고."
"해 봐."
"구경할 맛 나게."
도경수는 이따금 가면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