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Leon) 2015 : The Professional
“남은 평생 편안히 잠들 수 없을 지도 몰라.”
“그런 건 두렵지 않아요.”
“사랑 아니면
죽음이에요.
그게 전부에요.”
Intro: 내가 보는 세상
3월, 곧 찾아올 봄을 시기하는 꽃샘추위가 이곳저곳 기승을 부리고 사람들의 옷깃을 세우게 만드는 추운 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여느 날처럼 거실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손끝을 아리게 만들었지만 그 이상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전 7시를 가리키는 시곗바늘처럼 나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창문 앞에 서서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춥다며 문 닫으라 말할 사람도 없는 조용하고 쓸쓸한 이곳에 정착한지도 벌써 5개월이 넘어간다. 다행히 그 동안 일을 처리하면서 점점 늘어가는 실력 덕분에 일거리가 많아지는 대신 실수는 줄어들었다. 물론 이런 걸 나보다 더 좋아할 놈은 따로 있지만. 곧 그를 찾아갈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가 문을 닫았다. 7시 25분.
그를 만나기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거리로 나왔다. 주기적으로 그를 찾아가 일거리를 받고 그걸 수행하면 내 일은 끝이다. 대가는 피 묻은 돈이지만 이젠 익숙해져서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그의 가게로 가는 길엔 항상 많은 사람들과 마주친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상관없이. 웃는 얼굴, 찡그린 얼굴, 무표정한 얼굴들 사이로 지나치며 늘 생각한다. 저렇게 웃고 있어도 언젠간 날 찾아오겠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를 느낄 때 그를 찾아가 죽여 달라 애원하겠지. 가증스럽게도. 물론 그 일을 처리하고 대가를 받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다만.
평범해 보이는 맥주집. 술집이지만 낮에도 장사를 한다. 이곳에서 복수가 현실이 되고 어떤 사람의 삶의 끝이 정해진다는 걸 길거리의 저들은 알기나 할까. 성실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지만. 그의 가게 문을 여니 언제 바꾼 건지 인테리어가 조금씩 바뀌어 있었고 장사 준비를 하는 부엌에서 달그락 소리가 들렸다. 이런 걸 일일이 기억할 만큼 다정한 성격은 아니다만 늘 오던 가게라 그런지 확확 눈에 들어왔다. 의자를 꺼내는 소리에 그가 나에게 다가왔다.
“왔어? 일찍 왔네”
“미안”
“아냐. 차라리 잘 됬어. 이번 건수는 좀 크거든”
“......”
“뭐 좀 마실래?”
“본론만”
“알았어. 아침부터 그렇게 인상 쓰니까 보기 안 좋은데”
“빨리 말해”
그런 나의 단답에 익숙하지만 졌다는 듯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나에게 권유했다. 담배 끊었다고 말한지 벌써 3번은 말한 거 같은데. 그가 머쓱한 듯 담배를 다시 넣으며 내게 말했다. 늘 저런 표정으로. 기분 나쁜 웃음. 비열하고 우위감에 가득 찬 얼굴로 내게 말할 때 나도 모르게 눈을 피하게 된다. 김남준 기억해 그들을 죽이는 건 나야.
“5억”
“몇 명”
“한 명이고 기업 스파이야. 꽤 큰 프로젝트를 타회사에 넘겼다는군. 간도 크지. 제일 큰 기업의 기밀을 빼돌리다니.”
“그런 놈 없으면 세상 재미가 없잖아”
“돈 벌 일도 없고”
김남준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내게 서류 3장과 사진 몇 장을 내밀었다. 나이도 젊고 인상은 괜찮네. 딱 대기업 다니는 젊은 과장같구만. 어쩌다가 신세를 그렇게 스스로 망쳤대.
“하.. 암튼 이번 주 토요일까지야. 잘 부탁해”
“저번 의뢰비 입금 안했더라”
“아, 그거 지금 주려고”
기다렸다는 듯 돈가방을 탁자위로 탁 소리나게 올려놓은 김남준의 반응에 그가 약간은 기분이 안 좋아졌다는 걸 알아챘다. 기분이 안 좋은 김남준은 피곤한 법. 서둘러 돈가방과 서류를 챙기고 가게 문 앞에 다가갔을 때 김남준이 나만 들릴 정도로 말을 걸어왔다.
“조심해. 요즘 너무 잘 나가니까 불안하다”
“가만히 앉아서 의뢰만 받는 대리인이 할 소린 아닌 거 같은데”
돈가방과 서류를 챙겨 가게 밖으로 나오니 아까 전 가게의 훈기와 다른 매서운 칼바람이 코 끝을 스쳤고 서둘러 집으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빌라에 도착하고 제일 높은 층인 3층에 올라가 복도 끝 방으로 가는데 오늘도 여전히 그림처럼 그 여자가 문 밖에 서있었다. 이젠 길거리에 나뒹구는 쓰레기처럼 익숙한 모습이다. 낡은 교복차림에 긴 생머리, 하얀 피부에 얼룩져있는 푸른 멍자국. 아무리 나 아닌 세상에 관심이 없는 나지만 눈이 달려있는데 이렇게 매일같이 보는 저 여자를 기억 못할 수는 없었다. 오늘도 그저 생각없이 지나치는데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그 여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어 닥쳤고 결국 문 앞까지 다다랐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갤 돌렸다.
처음으로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고 얼굴을 대면했다. 감히 손대지 못할 아픔이 그녀의 검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카락이에 젖어 들어 슬프게 빛나고 있었다.
31년 살면서 처음으로 조심하라는 김남준의 말이 진실로 느껴진 날이기도 하다.
반응 괜찮으면 내일부터 연재 들어갑니다. 읽어줘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