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국을 짝사랑한지 꽤 됐다. 아니, 정정하자면 짝사랑이 아니라 외사랑이다. 짝사랑과 외사랑의 차이를 쉽게 설명하자면, 둘 다 한 쪽에서만 좋아하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짝사랑은 상대방 모르게 좋아하는 것이고, 외사랑은 상대방이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의 차이다. 한마디로, 전정국은 내가 절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소리다.
전정국은 꽤나 잔인했다.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음에도 내 앞에서 새로 사귄 여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없이 꺼내놓곤 했다. 내일은 여자친구를 만나 무엇을 할 것인지, 새로 사귄 여자친구는 또 이런 점이 좋고, 스킨십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다 와 같은 내겐 별 시답잖은 이야기들뿐이었다. 절 향한 내 마음을 뻔히 알면서 잘도 그런 얘길 꺼내는 전정국을 볼 때마다 얼굴에 찬물이라도 뿌려주고 싶었지만 막상 그러지 못 했다. 왜냐하면, 나는 전정국을 좋아하니까. 분명 전정국에게 찬물을 뿌리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면, 집에 가서 또 혼자 바보같이 후회했을 거다. 조금만 더 참을걸, 이제 더 이상 전정국이랑 얼굴도 못 마주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외사랑의 기본 공식 01
(부제: 짝사랑과 외사랑은 한 끗 차이)
시작은 소꿉친구였다. 부모님들께서 친하게 지냈던 것도 있었고, 집도 가까운 터라 우리는 서로의 집에 자주 놀러 가며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그런 인연이 이어져 우리는 철없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한참 말 안 듣는 중학생 시절을 지나, 끝나지 않은 사춘기를 안은 채 어느덧 어른과 아이 사이의 미묘한 경계선까지 함께 왔다. 그 사이 전정국을 향한 나의 감정이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변해버린 것을 제외하고는 우린 달라진 게 없었다. 전정국은 여전히 인기가 많았고, 나는 여전히 전정국의 소꿉친구였다.
전정국을 좋아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기억하려고 해봐도 딱히 어느 순간이라고 정의 내리기가 힘들었다. 우리는 항상 같이 다녔고, 또 그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나 걔랑 헤어졌어."
평소와 마찬가지로 전정국과 같이 등교하는 길이었다. 더운 여름 날씨 탓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지치는 기분에 나는 아무 말 않고 걷기만 했다. 차라리 빨리 학교에 도착해 교실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라도 쐬고 싶단 생각 하나로 묵묵히 길을 걷던 중 옆에서 전정국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전정국이 칭하는 걔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새로 사귄다고 자랑했던 여자친구를 얘기하는 거다.
"왜?"
"글쎄. 뭐, 그래도 너한테는 꽤 좋은 소식 아니야?"
전정국이 능청맞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얘기했다. 젠장, 반박하고 싶었지만 전정국 말이 맞았다. 사실 전정국이 무슨 이유 때문에 헤어졌는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둘이 왜 헤어졌는지, 전정국이 찬 건지 아니면 차인 건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겐 단지 전정국이 헤어졌다. 라는 사실만이 중요했고, 그 사실은 내게 묘한 안도감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이래서 소꿉친구라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 내가 전정국에 대해 아는 만큼, 전정국도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김탄소"
"이제 나 좀 잘 꼬셔보지 그래?"
여전히 여유로운 쪽은 전정국이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얼굴을 붉히는 쪽은 나였다.
오, 세상에 어쩜 이리 얄미울 수가! 전정국 저 새끼 분명 지금 날 놀리는 거다. 내 성격으로 누군가를 꼬신다는 건 말도 안 됐고, 정녕 그 꼬임에 쉽게 넘어올 전정국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리고 전정국은 그 사실을 매우, 무척, 잘! 알고 있으면서 저렇게 태평하게 웃으면서 얘기하는 거다. 당황한 마음을 감춘 채 나는 애써 못 들은 척 전정국의 말을 무시했다. 옆에서 전정국의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그마저도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러자 전정국도 별 말 않고 묵묵히 길을 걸었다.
교실로 들어서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내 땀을 식혀주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런 게 바로 파라다이스지. 만족스러움에 절로 미소가 나오자, 전정국이 비키라며 내게 타박을 주었다. 아, 나도 모르게 교실 문 앞에서 전정국이 못 들어오게 막고 있었나 보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멋쩍게 웃으면서 내 자리로 가 앉았다. 뒤이어 전정국이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아이들은 금세 전정국의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이, 전정국은 인기가 많았다.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정국은 못하는 게 없었다. 누군가에게 말 걸어주는 붙임성도 좋았고, 사교성도 좋았고 운동신경하면 절대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전정국은 뭐든 시키면 척척해내는 녀석이었다. 아, 영어랑 수학은 제외. 나도 그닥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전정국은 나보다 훨씬 점수가 낮은 편이었다. 그럼 뭐 해, 어차피 다른 걸로 다 커버 가능하니 아무도 전정국의 영어와 수학 점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전정국을 둘러싼 남자애들은 한창 축구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체육 수업 때 자유시간을 준다는 말을 다른 반에서 듣고 온 애들이 벌써부터 전정국을 서로 자신의 팀으로 넣으려는 보였고 그에 비해 전정국은 어느 팀으로 들어가든 딱히 관심 없는 듯했다.
여자애들은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척 전정국을 힐끔 쳐다보기 바빴다. 참 신기하게도, 전정국 하나 때문에 묘하게 공기가 바뀌는 느낌이었다. 여자애들끼리의 소리 없는 신경전이랄까. 물론 나는 그 신경전에 끼지도 못했고, 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는 이미 전정국에게 내 마음을 들켜버렸고, 그런 나를 대하는 전정국의 태도는 나에게 어떠한 일망의 희망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전정국에게 부끄러운 약점이라도 잡힌 느낌이었다.
예를 들자면, 전정국은 가끔 약속 시간보다 늦거나, 말도 없이 내 물건을 빌려 쓸 때가 있었다. 그것도 내가 싫어할 걸 뻔히 알면서, 아주 뻔뻔하게도 말이다! 나는 그런 무책임한 전정국의 행동에 잔소리가 섞인 짜증을 내곤 했다. 야, 너 지금 시간이 몇 신지나 알아? 라는 말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짜증을 내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전정국이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길
"그래서 내가 싫어?"
시발! 그럼 나는 또 병신같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런 전정국이 얄미워 죽겠지만, 또 전정국이 좋아서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저 창피함에 다급히 말을 돌리곤 했다. 내가 전정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킨 순간부터, 어느샌가 우리는 수직관계에 놓인 것 같았다. 물론 전정국이 내 위에 있었다. 나와 있을 때, 전정국은 본인에게 불리한 상황이 닥치면 늘 저렇게 말하곤 했다. 그것도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억울하지만 나는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분명 전정국은 이런 상황들을 즐기고 있었다.
*
"김탄소, 점심 먹으러 가자."
4교시를 끝내는 종이 치자마자, 전정국이 내게 다가왔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내가 뭉기적 거리니 답답했는지 아예 내 손목을 붙잡고, 급식실로 향하는 전정국이었다. 아 미친 좋긴 한데, 이 손 좀 제발.. 급식실을 가는 내내 우릴 쳐다보는 주변 여자애들의 눈빛이 따가웠다.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내가 손을 빼내려고 하자, 오히려 전정국이 손목을 더 세게 잡아오길래 그냥 포기하고 순순히 따라갔다. 급식실에 줄 서자 그제야 전정국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풀었다.
"야, 이것 봐. 빨개졌어."
전정국이 손을 풀자마자, 잡혔던 내 손목이 붉어졌다. 아씨, 하여튼 전정국은 무식하게 힘만 세다니까. 얼마나 세게 잡고 있었으면,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도 생긴 건지. 괜히 투덜거리면서 전정국에게 내 손목을 들이내밀며 봐보라고 얘기했다. 전정국은 아무 말없이 내 손목을 잠시 보더니 이내 날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보기엔"
"네 얼굴이 더빨개졌는데."
무심한 듯 내뱉은 전정국의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뭐래. 아니거든? ..더워서 그런 거야. 라고 애써 변명하듯 이야기하자, 전정국은 그래? 하고는 짧게 웃었다. 아, 수치심. 왜 내 얼굴은 저절로 빨개지고 난리람? 괜히 한마디 더했다간 전정국한테 놀림당할 것 같아서 더 이상 아무 말도 안하고 급식을 받았다. 나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전정국과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오늘 반찬들이 영, 다 별로인 것 같아 대충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자 내 급식판 위로 전정국의 젓가락이 툭툭 치는 모습이 보였다.
"편식하지마."
"편식 하는 거 아니거든? 그냥 맛없어서 안먹는거야."
"그게 편식이지, 뭐."
전정국의 말에 오기가 생겨 한 번도 손 대지 않던 가지나물을 집어 입안으로 넣고, 보란 듯이 전정국을 바라봤다. 우물우물, 가지의 물컹한 느낌이 입안에서 감돌았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던 전정국이 잘 먹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내가 가지나물을 집어먹을 때마다 전정국은 잘 먹는다, 우리 탄소, 편식 안 하니까 보기 좋네. 따위의 소리를 내뱉었다. 짜증 나게도 나는 그렇게 싫어했던 가지나물을 다 먹었고, 그에 전정국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급식실에서 나오자, 아직도 입안에서 가지나물의 텁텁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저 빨리 양치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을 때 쯤,
"정국아."
전정국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여자아이였지만, 반면에 전정국은 잘 아는 것 같았다. 둘은 어색한 분위기 없이 이야기를 잘 주고받았다. 뭐지, 작년에 둘이 같은 반이었었나? 괜히 신경 쓰여 여자애를 빤히 쳐다보았다.
"잠깐 시간 돼?"
내 시선이 느껴질 법도 할 텐데, 이미 나는 둘에게서 철저하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다. 시간 되냐고 묻는 여자의 말에, 전정국은 고개를 끄덕였고 여자애는 환히 웃어 보였다. 그에 괜히 빈정 상해 야, 전정국. 나 먼저 간다? 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니, 전정국은 나를 바라보며 긍정의 의미로 다시 또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쓰지 않을래야,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건만 아직까지도 전정국은 교실로 올라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둘이 마주 보며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 분명 양치를 했음에도 오히려 더 텁텁한 기분이 들었다. 양치나 한번 더 하고 올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전정국이 없는 점심시간은 무료했다. 차라리, 수업시간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했다. 그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둘의 모습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수업 종이 치고 나서야 전정국이 들어왔다. 다행히 아직 과목 선생님이 들어오시지 않아 전정국은 혼나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뒷문을 열고 들어오는 전정국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 했길래 이제 오냐는 야속한 눈길이었지만 전정국에게도 통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 나와 눈이 마주쳤건만, 전정국은 어떠한 해명도 없이 제 자리로 가 앉았다. 나는 전정국의 뒤통수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전정국은 내 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이내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5교시는 지루한 문학 수업이었다.
일 순간 전정국에게 서운함을 느낀 건 왜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전정국은 나에게 해명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야, 나는 전정국에겐 소꿉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뿐이고, 오로지 나 혼자 좋아하는 일방통행인 관계였다. 내가 전정국의 여자친구도 아닌데, 둘이 뭐하다 왔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왜일까.
점심시간 뒤로 내게 말을 걸지 않는 전정국 때문일까
오늘 배우는 시가 김춘수의 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혼자 꽁해져있는 나 때문일까
괜히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오후 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다. 눈 깜짝한 사이에 어느새 수업이 모두 끝나있었고, 청소하는 아이들만 몇몇 남아 있었다. 나와 전정국은 쉬는 시간에도 서로 아무 말하지 않았고 답답한 마음은 여전했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자, 전정국이 교실 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메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전정국에게 다가갔다. 어색한 분위기에 휩싸인 채 우리는 같이 하굣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실 전정국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오늘 점심 때무슨 얘기를 했는지, 걔는 누구인지.
지우려 해봐도 자꾸 떠다니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쩐 일인지 전정국도 말 한마디 안 하고 있는 게 분명 점심시간 때 뭔 일이 있었겠거니 싶었다. 그래서 소꿉친구로서 아까 무슨 일 있었냐고 걱정하는 듯한 말을 머릿속으로 황급히 떠올렸다. 절대, 널 좋아해서 오늘 점심때 있던 일이 신경 쓰여 물어보는 건 아니고! 친구로서 갑자기 말이 없어진 전정국이 궁금하니까 물어보는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고, 용기 내 입을 뗀 순간.
"전정..."
"나"
"고백 받았어."
나와 동시에 이야기를 꺼낸 전정국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전정국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아, 뭐 전정국이 고백받은 적은 한두번이 아니지만... 나에게 이렇게 얘기한 적은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얘는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고백을 받은 거지. 새삼 전정국의 인기를 실감했고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고백받았다는 게 기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어떻게 할까?"
"그걸 왜 나한테..."
"넌 나 좋아하잖아."
아니야?
전정국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못 했다. 그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전정국을 올려다 보기만 했다. 전정국도 아무런 표정 없이 날 바라봤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본 채 서있었다.
"걔랑"
"내가 사귀었으면 좋겠어 탄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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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는 글이네요 ^^(눈물을 흘린다)
자기 좋아하는 걸 뻔히 알면서 괴롭히는 정국이와 그걸 알면서 다 당하는 바보(?) 같은 여주로 글 써보고 싶어서
결국 저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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