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놔라, 야, 노라고. 어이, 즌증국."
이름은 정국, 방년 십칠세. 특기는 나를 괴롭히기로 세계선수권 급. 아, 쫌 노라고!
국민이 옆집 형동생이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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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정국은 건방지다. 정말 건방지다. 그래서 내 다리 위에 지 다리를 올려놓고 티비를 본다. 야, 야. 다리를 쳐도 미동이 없다. 전정국의 밑에 깔린 내 다리를 달달달 떨어도 반응이 없다. 다리를 치울 생각을 안 한다. 정국이 다리 꺼져. 결국 다리를 들어서 치웠다. 소파 팔걸이를 베고 티비를 처 보던 전정국이 고개를 힐끔 돌린다. 아, 왜요 형. 내 다리 왜 버려. 근데 저거 되게 웃기네. 푸헬헬. 웃음소리마저 건방진 전정국은 지 앞에 놓인 홈런볼을 세 개씩 집어먹으며 티비 볼륨을 더 키운다. 저 돼지같은 놈, 내 피같은 돈으로 산 홈런볼을 혼자 다 처먹는 욕심쟁이 스크루지 같은 놈. 개그 프로그램의 웃음소리와 전정국의 웃음소리가 함께 내 고막을 공격했다. 티비 안 봐, 안 봐! 전정국의 발을 세게 밟고 부엌으로 갔다. 전정국이 뒤에서 약을 올린다. 에에, 형. 삐졌어요~? 형아 초딩~?
2
전정국은 내 옆집에 사는 엄마 친구 아들이다.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는 엄친아가 아니라, 그냥 엄마 친구 아들이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주제에 언제나 최선을 다해 내 화를 돋우는데, 그 시작은 아마 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였을 거다.
3
"엄마! 전정구기 내 알림장 찢어써!"
"죄송해요 아줌마... 궁금해서 보려고 했는데 지민이 형아가 뺏는 바람에 찢어져써요..."
맨날 이런 식, 너는 무죄 나는 유죄 너의 공식. 전정국이 고개를 떨구고 울먹이는 연기를 하면 엄마는 홀랑 속아서 전정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정국아. 지민이 형아한테 사과하고 다음부터 조심하면 돼. 그럴 때면 엄마는 나도 몇 번 들어본 적 없는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목소리를 하고 전정국을 달래줬다. 대체 왜? 왜? 왜 저런 거짓말에 속는 건데? 내 알림장을 찢어논 건 쟨데? 심지어 엄마 아들은 난데? 어이없음과 분함에 길길이 날뛰었더니 엄마는 죄 없는 착한 아들에게 꿀밤을 먹였다. 넌 유치원 동생한테 알림장 하나 못 보여주니? 꿀밤을 맞은 이마를 문지르고 있으면 전정국은 저 멀리서 내 초코파이를 뜯으며 혀를 쏙 내밀었다. 내 초코파인데... 죄 없이 엄마에게 꾸중을 들은 억울함에 초코파이까지 뺏긴 설움이 겹치면 눈물이 먼저 나왔다. 엄마, 엄마아... 엄마의 치마에 얼굴을 묻었지만, 엄마는 시계를 보고 급히 나갈 채비를 하며 나를 떼어 놓았다. 학부모 모임인가, 뭐시깽인가. 나는 우는 아들을 떼어 놓고 집을 나가는 엄마가 정말정말 미웠다.
엄마가 나가고 집 안에 나와 전정국만 남았다. 전정국은 내 초코파이를 신나게 처먹다 나한테 메롱을 했다. 울먹, 또 울음이 나왔다. 나는 쟤한테 엄마도 뺏기고, 초코파이도 뺏기고...
"잉... 이잉..."
"울어? 형아 울어?"
"안 울어... 이씨..."
"형아, 형아... 초코파이 주까?"
결국 울음이 터져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면 전정국은 그제서야 눈을 굴리며 내 옆에 왔다. 반쯤 남은 초코파이를 내 입가에 내밀며 안절부절 못하면, 나는 초코파이를 한 입 깨물다가도 서러움이 밀려와 전정국을 안고 펑펑 울었다. 정구가, 울 엄마는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나 봐. 울 엄마 아들은 사실 내가 아니라 넌가 봐. 엉엉. 울음과 섞여 꺽꺽대며 하소연을 늘어놓으면 전정국은 내 등을 토닥였다. 아냐, 형아. 울 엄마도 나보다 형아를 더 조아해. 담엔 우리 집 가자. 형아 오면 하려고 게임기 사다놨어.
4
그랬다. 어린 전정국은 내가 울 때만 잘해줬다. 딱 그때만. 100번 병을 주고, 1번 약을 주는 꼴이랄까? 저 얄미운 서울쥐같은 녀석... 전정국은 또 초코파이를 처먹고 있었다. 야, 요새 초코파이 엄청 비싸. 야, 야.
"에라이 씨벌, 한창 성장기인 동생이 이깟 빵가루 좀 먹은 게 그렇게 아까워요?"
"용돈, 용돈, 내 용돈 인마! 짜식아, 내가 다 먹으려고 산 건데!"
"아, 등! 내 소중한 등에 손자국 남으면 어떡하려고요!"
등을 문지르며 나를 째리는 전정국의 손에는 먹고 남은 초코파이 껍질만이 들려 있었다. 아이고, 원통하다. 내 소중한 초코파이를 다 뺏겼구나.
5
음, 전정국이 언제나 내 인생의 오점이었던 건 아니다. 살면서 전정국이 도움이 됐던 때가 한두 번 있긴 하다. 때는 내가 6학년, 전정국이 4학년. 내가 멍청하게 운동장 한복판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다 머리에 축구공을 맞았던 날. 가오을 잡으며 나를 맞춘 5학년에게 경고를 하려고 했으나, 최고 학년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작아 본의 아니게 있는대로 무시를 당하고 있던 참이다. 그때 운동장 한쪽 정글짐에서 놀던 전정국이 흙을 탈탈 털고 내게 다가왔다. 항상 나를 화나게 했던 그 건방진 말투로 5학년을 비꼬며 실실 웃는 전정국 때문에 5학년은 얼굴이 빨개진 채 축구나 마저 하러 돌아갔었다. 근데 이 자식이, 보답이나 할 겸 학교 앞 문방구에서 콜라 사탕을 사주니까 지는 맥주 사탕이 더 좋다며 콜라 사탕을 땅바닥에 버리는 게 아닌가.
여기까지 떠올리니 기분이 나빴다. 마침 옆에서 츄파춥스를 빨아먹던 전정국의 뒤통수에 꿀밤을 먹였다. 넌 인마, 사탕을 먹을 자격조차 없어.
6
나와 같은 중학교에 입학한 전정국은 입학 첫날부터 우리 학년 여자애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야, 1학년 중에 존나 귀여운 남자애 있잖아. 쟤들은 남친도 있는 것들이 갓 입학한 1학년을 두고 무슨 입방아를 찧는 거야. 그래, 어쩐지 처음부터 거슬렸다. 난 그 거슬림을 무시해서는 안 됐다. 왜냐하면, 며칠 뒤에 전정국에게 3학년 여친이 생겼으니까. 저건 입학하자마자 2학년도 아니고, 3학년 누나랑 사귈 생각을 해? 이름을 수소문하니 마침 내가 아는 애였다. 볼살이 많아서 자주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 여자애였다.
다행히 걔를 닦달할 만큼의 친분이 있던 나는 나는 바로 2반으로 달려갔다. 이 발랑 까진 것! 어디서 1학년을 건드려! 그 여자애의 어깨를 잡고 흔드니 여자애가 핸드폰을 보여줬다. 전정국과 찍은 셀카였다.
"존나 귀엽지? 우리 오빠 좀 닮은 거 같애, 얘 크면 존나 잘생기겠다 진짜."
"오빠? 너 외동 아니야?"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제 책상을 가리킨다. 친오빠 말고, 이 오빠들. 책상은 아이돌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음, 별로 잘생기진 않은 거 같은데? 내가 더 낫고만.
"근데 요즘 아이돌 왤케 못생겼냐? 내가 얘네보다 더 잘생겼다. 특히 ㅇ"
"박지민 죽을래????????????????"
나는 그날, 여자애들의 손톱은 날카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7
우리 학교는 왜 입학식에 고삼을 데려가는지 모르겠다. 2학년도 아니고, 3학년이라니. 무려 고삼이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교장의 싸이코적인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강당으로 갔다. 1학년 1반부터 12반과 3학년 1반. 앉지도 못하고 좀비마냥 서서 교장의 연설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옆에서 누가 옆구리를 찌른다. 내 왼쪽은 1학년인데, 어떤 미친 1학년이 입학하자마자 고삼의 옆구리를 찌르는 거지? 건방진 성격이 딱 전정국을 닮았군. 고개를 저으며 건방진 1학년을 노려봤다. 그런데 이게 뭔가. 12년간 전정국에게 시달린 탓일까, 그 1학년의 얼굴이 전정국으로 보였다. 이른 나이에 벌써 환각이 왔나. 아니면... 아, 진짜 전정국이다.
"지민이 안녕."
지긋지긋하게도.
8
전정국은 매일 우리 반 앞에서 얼쩡거렸다.
"중학교 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3학년 누나랑 사귀냐?"
낄낄대며 놀리면 전정국은 그저 씩 웃으며 1학년 층으로 올라갔다. 하여튼 저거, 누나들이 좋으면 좋다고 말을 하지. 내가 다리 놔줄 수도 있는데. 인맥왕 박지민, 캬.
9
모의고사가 끝난 날은 독서실에 가지 않는다. 집에서 문제 분석을 하고, 그러다 티비도 좀 보고, 치킨도 좀 먹으면서. 한 달의 피로를 씻어내리는 황금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황금같은 시간이 약 세 달간 지속된 후, 전정국은 어쩐지 모의고사가 끝난 날이면 우리 집에 먼저 와 있었다. 바깥 공기로 더러워진 교복을 입고 청결한 내 침대에 누워 느긋하게 인사를 하는 전정국을 딱 죽이고 싶었다.
"형, 라면 끓여줘요."
"왼쪽에서 세 번째 위 서랍에 너구리."
"너구리 노맛. 가서 신라면 사 와요."
"꺼져라."
거실에 상을 펴고 시험지를 뒤적거리면 어느새 옆에 붙어 앉아 치근덕대는 전정국을 발로 까고 문제에 집중했다. 뭘 잘못해서 틀렸지?
"뭘 잘못해서 틀려요, 그냥 바보인 거지."
"꺼져!"
전정국은 꼭 한 대 맞아야 조용해졌다.
ㄱ
박지민 보고 싶다. 박지민은 그 흔한 자기 사진 하나 프로필 사진으로 해놓지 않는다. 매번 답 없는 나무 사진, 숲 사진. 지가 무슨 숲의 요정이야? 몇 달째 바뀌지 않는 프로필에 혀를 차고 폰을 내려놨다. 아, 박지민 보고 싶다. 고삼이 된 박지민은 매일 독서실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그 얼굴 한번 보려고 일부러 박지민의 독서실 근처로 산책을 가고, 독서실이 있는 층까지 괜히 올라갔다 내려온 적도 많았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박지민 진짜 보고 싶다. 콕 찌르면 터질 거 같은 찐빵같은 볼을 상상하며 허공을 조물거렸다. 박지민 볼을 이렇게, 이렇게. 양 손에 잡혀 찌부가 될 박지민의 얼굴을 상상하니 귀여워 미칠 거 같았다. 손끝부터 올라오는 짜릿함에 상상 속 박지민을 괴롭히는 대신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를 마구 뒹굴거렸다. 으, 귀여워. 존나 귀여워. 박지민 존나 보고 싶다, 얼굴 조물거리고 싶다, 못살게 굴고 싶다.
ㄴ
박지민을 처음 본 건, 유치원생 때였나. 박지민은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려고 하는 옆집 형이었다. 볼살이 왕만해서는. 엄마 몰래 박지민의 볼을 쥐어 봤다. 말랑말랑했다, 찰떡처럼. 그때부터 습관처럼 박지민의 볼을 조물거리곤 했다. 유치원 가는 길에, 놀이터에서, 엘리베이터에서, 태권도 학원에서. 처음엔 의아해하던 박지민도 곧 적응이 되었는지 만나면 볼을 내밀곤 했다. 어, 우리 엄마는 뽀뽀를 할 때 볼을 내미는데. 박지민의 볼에 뽀뽀를 했다. 그랬더니 박지민도 내 볼에 뽀뽀를 했다.
ㄷ
박지민은 나를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박지민의 집에 놀러가는 것도 좋아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박지민의 가방을 구경했다. 책이 있고, 공책도 있었다. 그림을 그린 공책을 구경하다 알림장을 발견했다. 미니빗자루 가져오기, 화분 가져오기, 설거지 돕고 엄마 확인 받아오기 같은 게 적혀 있었다. 초등학교를 가면 설거지도 해야 되는구나, 초등학교 가기 싫다. 알림장을 계속 넘겨보니 웬 이상한 게 적혀 있었다. 친구에게 뽀뽀하기? 말도 안 돼, 박지민은 나한테밖에 뽀뽀할 수 없다. 기분이 나빠서 알림장을 찢었다. 이건 없는 알림장이야.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온 박지민이 찢어진 알림장을 보고 아줌마한테 달려갔다. 그러게 누가 친구랑 뽀뽀하기 같은 걸 적어오래? 아줌마에게 선수를 쳤더니, 생각대로 아줌마는 박지민이 찢었다는 내 말을 믿어줬다. 그런데 박지민이 울먹일 줄은 몰랐다. 미안해서 초코파이를 한 입 줬더니 우리 엄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 같다고 엉엉 울었다. 그래서 달래줬다. 우리 집에 데려가서 새 만화책도 보여주고, 게임기도 같이 하고, 귤도 줬다. 박지민은 귤을 못 까서 내가 다 까 줬다.
ㄹ
아, 박지민 초딩 땐 세상에서 제일 귀여웠는데. 지금은 왜 이러냐? 홈런볼을 먹여줘서 금세 통통해진 볼을 찔렀더니 사납게 나를 째려본다. 지가 고양이야, 뭐야. 아, 건들지 말라 이건가? 그럼 더 건드려야지.
"아, 야아. 하지 마, 하학."
"와, 형. 간지럼 졸라 잘 타네요? 옆구리도 간지럼 타요?"
"으하항, 하지 말라니까. 으응, 읏!"
어, 방금. 박지민 입에서 신음 비스무리한 게 나왔는데. 음, 씨발. 아무렇지 않은 척 박지민을 놔주고 화장실로 향했다. 제발 박지민이 눈치가 좆도 없어서 눈치채지 못하게 해주세요. 저 새끼가 설마 간지럼 태우다 꼴려서 화장실을 가는 건가, 이딴 생각을 절대 하지 않게 해주세요. 박지민은 모르겠지, 모를 거야. 박지민은 멍청하니까.
눈치를 살살 보며 화장실에서 나오니, 박지민은 생각 없이 티비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건 모르는 건가, 모르는 척인가. 둔한 박지민의 성격을 봐서는 진짜 모르는 게 확실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웃는 박지민이 웃겨서 꽉 끌어 안았다.
"이거 놔! 노라고! 답답해!"
"어이구, 답답해쪄 우리 지민이?"
결국 버둥거리며 나를 자꾸 발로 차려고 하길래 박지민을 놓았다. 박지민은 고딩이 되어도 초딩 같다. 아, 존나 귀여워.
ㅁ
박지민이 다니는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였다. 박지민을 찾으려고 3학년 1반부터 12반을 쭉 돌았다. 뭐, 결국 찾긴 했는데. 지 친구랑 놀고 있길래 아는 척 안 하고 그냥 내려왔다. 그런데 웬, 다음 쉬는 시간에 어떤 3학년 누나가 나를 찾아왔다. 애교를 살랑살랑 부리는데 박지민이랑 좀 닮았다. 볼도 만두같은 게, 약간 여자 박지민 같다.
며칠 뒤 그 누나가 나한테 사귀자고 했다. 그럴까? 그래야지, 이 누나도 박지민만큼 귀여울까? 뽀뽀를 해달라고 볼을 내밀어 줄까?
ㅂ
고삼이 된 박지민은 독서실을 등록했다. 학교가 끝나면 아무도 없는 박지민의 집에 가서 박지민을 기다렸지만. 음, 결국 저녁 시간이 되어 우리 집에 갈 때까지 박지민의 집에는 나밖에 없었다. 독서실을 가지 말고 나랑 있자 조르고 싶었지만, 학교에서 가끔 마주치는 박지민의 피곤한 얼굴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박지민은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얼굴을 하고 영어 단어를 외우며 걸어다니고 있었다.
박지민이 그나마 일찍 집에 들어가는 날은 모의고사 날밖에 없었다. 그 날은 어째선지 독서실도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를 하는 듯했다. 그래서 나도 따라갔다. 절대 공부를 방해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얼굴 좀 보려고. 뭐, 막상 보면 박지민을 놀리기 바빠 그런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리지만.
ㅅ
가만히 생각해봤다. 그동안 박지민을 놀리기 좋은 형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런 단순한 대상은 아닌 거 같다. 안 봐도 보고 싶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다른 사람이랑은 눈도 못 마주치게 하고 싶고, 내가 평생 데리고 있고 싶고. 이게 뭔 감정이냐, 하고 친구한테 물어봤다. 당연히 박지민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라도 생겼냐며 킬킬대는 걸 무시하고 빨리 대답이나 해보라고 했다. 잠시 머쓱하게 웃던 친구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거 아니냐는 대답을 한다.
좋아해? 박지민을? 남자를? 내가? 박지민을? 머리를 싸매는 동안 갖가지 박지민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흘러 지나갔다. 넘어져서 무릎에 피가 나던 초딩 박지민, 무서운 영화를 보고 내 뒤에 숨던 박지민, 습관처럼 뽀뽀를 하고 수줍어하던 박지민, 새로 산 물고기를 자랑하던 박지민, 떡볶이를 먹던 박지민, 공부하던 박지민, 시험을 망쳐서 우울한 박지민, 내 만화책을 찢어놓고 신나게 처웃던 박지민, 귀여운 박지민, 사랑스러운 박지민. 어후 씨발.
아, 족히 한 달은 고민한 거 같다. 매일 밤 잠을 못 자서 다크써클이 발목까지 내려와 있었다. 다행히도 고민한 보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일단 결론을 냈으니까. 내가 한 달동안 한 고민의 결론은, 나는 박지민을 좋아한다, 는 거다. 누가 채갈까 냅다 고백부터 하려 했지만, 가뜩이나 피곤한 고삼에게 친한 동생의 뜬금없는 사랑 고백은 더 복잡한 문제로 머릿속에 얹힐 거 같았다. 안 되겠다, 수능 끝날 때까지만 기다리자. 나는 하루하루 달력에 표시를 해가며 공부 폐인 박지민의 수능이 끝날 날을 기다렸다.
ㅇ
독한 박지민은 여름방학에도 독서실에 박혀 있었다. 나는 어김없이 독서실 주위로 산책을 갔고, 밥 때가 됐는데 독서실 밖으로는 박지민의 코빼기도 안 비쳐서 결국 문자를 보냈다.
「우리 집에 갈비 있음」
어지간히 배가 고팠는지, 문자를 보낸지 1분도 되지 않아 박지민은 독서실을 뛰쳐 내려왔다. 갈비에 사족을 못 쓰는 돼지라고 비웃으면 화내겠지? 편의점을 가다 우연히 만난 척하며 집에 같이 들어갔다. 아, 전정국 존나 배려가 넘치는 남자.
얘네 부모님도 맞벌이, 우리 부모님도 맞벌이. 우리 집에는 박지민과 나밖에 없다. 내가 속으로 어떤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박지민은 내가 식탁에 차려놓은 갈비찜을 보고 좋아 죽으려고 했다. 하여튼 드럽게 단순하다, 낯선 사람이 사탕이라도 주면 냉큼 따라가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돼지."
"대지 아이야."
"다 먹고 말해요, 밥풀 튀어나오겠네."
"알써."
며칠 굶은 사람처럼 갈비와 밥을 퍼먹던 박지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정구가, 난 니가 이써서 정말 행보캐."
나도, 지민아.
ㅈ
박지민은 밥을 다 먹자마자 그대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평소에 얼마나 잠을 못 자면 식탁 의자에서 조는 거야. 그 모습이 안쓰러워 침대에서 좀 자겠냐고 물어보니 하품이 섞인 목소리로 아니라고, 독서실에 다시 가야 한단다. 그러나 말과 다르게, 박지민의 몸은 당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박지민의 의자를 식탁에서 약간 빼주고 옆에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독서실까지 업어 줄까? 박지민은 뭐라고 웅얼거리며 내 목에 양팔을 감는다. 독서실까지 데려다 달라는 거 같기도 하고. 잠에 취한 박지민을 의자에서 빼내 안았다. 아무리 봐도 지금은 공부보다 잠이 더 필요한 거 같은데. 재우면 이따가 깨서 화를 내려나? 잠투정을 하는지 내 어깨에 얼굴을 부비는 박지민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결국 박지민을 독서실에 데려다 주는 대신, 내 침대에 눕혔다. 눕히기만 하고 일어나려 했는데, 내 목에서 안 떨어지려고 자꾸 낑낑대길래 그냥 옆에 같이 누웠다. 공부가 많이 힘든지, 까칠해진 박지민의 볼을 검지로 건드려 보다가 가벼운 이불을 덮어 줬다. 물끄러미 박지민의 눈 감은 얼굴을 보고 있으니 예전 생각이 자꾸 났다. 마주치기만 하면 볼에 입을 맞추던 때. 올해 들어서 이렇게 길게 얼굴을 보는 것도 처음일 거 같은데... 자꾸만 박지민의 통통한 입술에 눈이 갔다. 아, 안 돼. 안 돼... 돼... 되겠지? 설마 뽀뽀하는 순간 잠을 깨고 하는 그런 유치한 일은 안 일어나겠지. 잠든 박지민의 눈 앞에 몇 번이나 손을 흔들고, 눈을 감고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진짜,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냐.
쪽.
다행히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박지민이 다시 웅얼거리며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뭐라고 중얼대며 누운 채로 기지개를 켜더니, 바로 앞에 있던 날 꼭 끌어안는다. 안아조, 잠꼬대 같은 말이었지만 못 들은 척하기 싫었다. 박지민의 등 밑에 팔을 넣고 꽉 안았다. 아, 수능 언제 끝나지. 빨리 고백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섹스도 하고 싶다. 뭐, 다 박지민이 나를 받아줘야 가능한 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