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거리던 지민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남. 이씨... 아, 예쁜 말. 왜 잠이 안 오지... 옆에서 자고 있는 윤기가 깰까 봐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꿍얼거리는 지민이 윤기가 일어날까 또 슬금슬금 움직여서 바닥에 발을 내림.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배 슥슥 문지르고 있는데 갑자기 수박이 너무 먹고 싶음. 그런데도 윤기를 깨울 생각은 절대 안 함.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걸 아니까 깨우기가 힘듦. 그래서 윤기 자는 거 한번 보고 고개 돌려서 한숨 한 번 푹 쉼.
왜 안 자.
아, 깜짝이야!
놀랐어? 이리 와 봐.
안 자고 있었던 건지, 아님 방금 눈을 뜬 건지는 모르겠음. 눈 비비면서 일어난 거 보면 후자가 맞는 것 같음. 지민이가 놀라서 몸 부들부들 떠니까 윤기가 걱정 됐는지 지민이 자기 자리 옆으로 끌어당겨서 배 살살 만져줌. 그러면서도 지민이한테 한 번 더 물음. 왜 안 자, 어디 아파? 하면서 머리도 짚어봄. 지민이가 아니라고 손 휙휙 저으니까 윤기가 입 꾹 다물고 머리 굴리더니 엄마가 임신하면 먹고 싶은 것도 많아진다고 한 게 생각나서 아, 하고 너 뭐 먹고 싶지. 했음. 그거 듣고 아니, 아닌데... 진짜 아닌데... 하다가 윤기가 지민이 눈 빤히 쳐다보니까 나 수박... 하고 말함. 말하고 나서 입술 꼬옥 물고 있는 거 윤기가 손으로 툭툭 건들이니까 아, 하고 입술 놨으면 좋겠다. 그거 본 윤기는 침대에서 내려오면서 붕 뜬 머리 대충 손으로 슥슥 문지르고 겉옷 하나 챙겨입음.
지민이는 그거 보고 눈 똥그랗게 뜨면서 지금 나가게? 이따 출근도 해야되잖아, 나 그냥 내일 사다주면 되는데... 하고 손만 꼬물꼬물 움직임. 그거 본 윤기는 지민이 머리 살살 쓰다듬어준 다음에 금방 다녀올게, 함. 윤기가 나가려고 몸 돌리니까 지민이가 손목 잡아서 돌려세움. 잠깐, 잠깐만. 나두 같이 가. 하고 지민이가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남. 윤기가 급하게 일어나서 비틀 거리는 지민이 안다시피 부축해서 제대로 일으켜줌. 그리고 자기 가디건 하나 꺼내와서 입혀줌. 여름이긴 해도 새벽에는 추우니까. 윤기도 몸이 큰 편은 아닌데 지민이가 워낙 작아서 소매가 좀 남음. 윤기가 보고 웃으면서 소매 끝 접어주니까 지민이는 또 설레고 부끄럽고 해서 얼굴 빨개지고.
윤기가 손 내밀면서 손, 하니까 지민이는 그거 찰떡같이 알아듣고 윤기 손 꼭 잡고 윤기 쫄래쫄래 뒤따라감. 근데 윤기가 좀 걸음이 빨라서 지민이가 따라가기 버거워함. 지민이가 힘들어서 잡은 손 좀 잡아당기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가던 윤기가 뒤 돌아보고 그제서야 걸음 좀 늦춤. 지민이도 편하게 걸을 수 있을 만큼. 한참 걷는데 저 멀리 과일 가게가 닫힌 게 보임. 윤기가 아, 이런 ㅆ... 욕 하려다 옆에 지민이 있는 게 생각나서 입 다뭄. 지민이도 문 닫힌 거 확인하고 나서 윤기랑 맞잡은 손 흔들 거리면서 우리 애기가 엄마 아빠 데이트 하라고 그랬나 보다, 그치. 하고 눈 휘어져라 웃는데 그게 그렇게 예쁨. 윤기가 수박은. 지금 안 먹어도 돼? 물으니까 지민이가 고개 끄덕이면서 나 이따가 퇴근할 때 사다 줘. 하는데도 윤기 표정이 풀리지가 않음. 지민이가 그거 보고 잡고 있던 손 깍지 끼니까 윤기가 지민이 내려다보고 픽 웃음.
집으로 돌아가면서 지민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함. 이따 출근해야되는데 피곤해서 어떡해요... 혼나는 거 아니야, 졸아서? 하니까 윤기가 아무렇지도 않음. 나한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 없어, 사장이면 몰라도. 능력있는 남자 민윤기가 보거 싶다. 윤기가 그렇게 말해도 지민이는 걱정스러움. 가서 조금이라도 자고 나가. 나갈 깨 나 좀 깨워주고, 왜 매일 깨우지도 않고 나가. 하면서 툴툴댐. 윤기는 꿀 떨어지는 눈으로 지민이 보면서 말함.
너 밤마다 배 아파서 앓는 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래.
... 다 알고 있었어? 나 형 깰까 봐 거실에 나가있고 그랬는데.
다 알지. 내 사람 일인데, 왜 몰라.
그 말에 지민이 얼굴이 또 빨개짐. 고개 숙이고 부끄러워하니까 윤기가 어깨 감싸고 토닥토닥 해줌. 나중에 애 낳고 나면 애기랑 같이 배웅 해줘, 그 때는 깨우지 말래도 깨울 거야. 하니까 지민이가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 끄덕임. 윤기가 다정하게 등 쓸어주니까 지민이가 좀 울컥하는 게 있나 봄. 원래 임신하면 감정 기복이 좀, 심해지는 게 있으니까. 그렇다고 울기는 싫어서 눈 비비면서 눈물을 참음. 그걸 또 어떻게 알아챘는지 몸 돌려서 지민이 안고 등 쓸어줌. 지민이 울음 터져서 끅끅 대니까 윤기가 괜찮아, 괜찮아. 힘들었지. 귓가에 속삭여줌.
내가, 흐, 아저씨 힘들게 하는, 끅,
쉿,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왜 날 힘들게 해.
그래도...
지민이가 끅끅대면서도 말 이어나가니까 윤기가 고개 숙여서 지민이 입에다 짧게 입 맞춤. 자꾸 못난 말 하지, 혼나. 하는 말은 덤으로. 계속 토닥거리니까 지민이 울음도 잦아듦. 율고 났더니 창피했는지 얼굴을 못 듬. 윤기가 눈물 다 닦아주고 다시 집으로 향함. 피곤하겠다, 가서 좀 자. 나는 괜찮은데, 출근 어떡해요... 나 회사 때려치고 너랑 있을까? 아, 무슨 소리예요! 알았어, 때리지 마 인마.
02
시간이 많이 지나서 지민이 배가 조금 볼록해짐. 움직이는 게 불편해질 정도로. 이 쯤 되니까 윤기가 안절부절 못함. 그러면서도 그걸 티내지는 않음. 그냥 옆에서 이것저것 챙겨주기만 함. 원래 야근도 자주 하고 회식에는 잘 안 빠지던 윤기가 야근은 절대 안 하고 회식도 슬금슬금 빠지면 말 다 했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지민이도 많이 힘듦. 남자 몸으로 임신을 하니까 힘든 게 당연함. 병원에서도 남자가 임신 하면 아이가 유산될 확률도 높고, 산모 몸이 많이 힘들 거라고 그랬음. 아이가 자리를 잡으면서 장기를 누르니까 먹은 것도 다 게워내게 되고. 지민이가 밥 먹다 말고 일어나서 화장실로 뛰어가니까 윤기도 놀란 가슴 달래면서 지민이 따라 화장실로 향함. 조그마한 애가 무릎 꿇고 변기 부여잡고 게워낼 것도 없는 속 게워내는데 마음이 너무 아픔. 아니, 그냥 너무 미안한 거임. 지민이가 변기 커버 닫고 후, 심호흡 한 다음에 일어나서 뒤 도는데 윤기가 있으니까 놀라서 뒷걸음질 침.
봐, 봤어요? 아무리 부부라도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건 당연하잖슴. 윤기랑 눈 마주친 지민이가 입술 꼭 깨물고 고개를 숙임. 그거 본 윤기가 다가가서 입술 깨문 거 하지 말라고 빼준 다음에 세면대 잡고 부들거리는 지민이 데리고 침실로 향함. 언제부터 이랬어, 하고 물으니까 지민이가 우물쭈물 말을 못함. 며칠 전부터 계속 이랬는데 윤기한테는 말을 못했음. 안 그래도 미안해하고 있는 거 다 아는데, 더 힘들게 할까 봐. 윤기는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거임, 모든 걸 다 지민이가 짊어지려고 하니까.
지민이한테 화는 못내고 한숨 푹 쉬더니 너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알지. 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지민이 옆에 누움. 지민이는 이제 몸이 무거우니까 한 쪽으로 돌아 눕지도 못함. 원래 왼쪽 보고 새우처럼 몸 말고 누워서 자는 게 버릇인데. 정면으로 천장 보고 누워서 얼굴은 윤기 쪽으로 돌리니까 윤기가 흘러내린 지민이 머리 쓸어넘겨줌. 그렇게 서로 눈만 빤히 쳐다보다가 윤기 머리 속에 뭐 하나가 생각이 남. 산부인과 같이 갔을 때 지민이 데리고 나오는 윤기 불러서 의사 선생님이 몇 개 일러줬었음. 남자 임산부라 많이 힘들 테니까, 잘 챙겨 주라고. 배 마사지도 해 줘야 한다고 했었음. 마사지 젤도 챙겨주면서.
윤기가 말도 없이 갑자기 옷을 올리니까 지민이가 놀라서 몸을 일으킴. 몸이 무거워서 다 일으킨 것도 아니고 슬쩍, 상체만 든 정도. 지민이가 놀라서 쳐다보니까 윤기가 저번에 의사 선생님이 너 배 아프면 마사지 해주라고 하셨어. 하면서 옆에 있는 서랍에서 젤을 꺼내듦. 조금 많다 싶을 정도로 쭉 짜더니 지민이 배에 훅 바름. 흐, 아, 차가워. 마사지, 뭐 이런 건 처음 해보는 윤기가 어떻게 하는지 알리가 없음. 차갑다는 말에 멈칫, 하더니 이내 슥슥 배 위에 펴바름. 지민이는 윤기가 마사지 해주려는 걸 아니까 말도 못하고 움찔움찔. 윤기가 어설픈 솜씨로 배 문질문질 해줬더니 이제 슬슬 젤도 차가움이 사라짐. 처음에는 어설프다 싶었는데 하다 보니 좀 뭉친 것도 풀리는 것 같고 아프던 배도 괜찮아지는 것 같음. 나중에 왜 그렇게 살살 했냐고 물어보니까 세게 누르면 애기가 눌릴 것 같았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03
이제 9개월이 다 되어가서 지민이 배가 많이 나옴. 그러다 보니까 몸을 잘 가누지도 못하고, 진짜 뭘 할 수가 없음. 자다가 깼는데 새벽임. 윤기는 옆에서 색색 자고 있고. 멍하니 윤기 자고 있는 거 보는데 갑자기 내가 언제 씻었더라, 하는 생각이 듦. 몸을 혼자서 가눌 수가 없으니까 윤기가 씻겨주는 거 아니면 씻을 수가 없음. 그 생각 들자마자 낑낑 거리면서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윤기가 잠든 걸 확인하고 화장실로 향함. 문 닫고 들어와서 거울로 자기 모습 확인하더니 울상이 됨. 나 아까 이러고 형이랑 뽀뽀한 거야...? 아, 어떡해. 하더니 뭐부터 해야할지 몰라서 안절부절함. 일단 세수부터... 하고 물을 틀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림. 놀라서 쳐다보니까 갑자기 불빛이 눈에 들어와서 그런지 눈 찌푸리면서 서 있는 윤기가 보임.
뭐 해, 여기서.
아니... 나, 그.
거짓말 하지 말고.
지민이가 입술 잘근잘근 씹으면서 변명거리 찾는데 윤기가 거짓말 치지 말고, 하면서 그걸 막음. 결국 지민이가 씻으려고... 하면서 말 끝 흐리니까 윤기가 잠깐 있어, 라고 말하고 나서 문 연 상태로 밖으로 나가 버림. 지민이가 상황파악이 안 되니까 형, 형아...? 하고 부르다가 허리가 아픈지 욕조에 걸터 앉음. 좀 있었더니 윤기가 웬 의자를 하나 들고 옴. 형, 의자는 왜...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니까 윤기가 의자 내려놓고 지민이를 거기다 앉힘. 지민이가 등받이에다가 등 기대니까 윤기가 수건에 물 적셔서 지민이 얼굴 닦아줌. 정신 없는 와중에도, 물 온도 확인하고 따뜻한 물로.
얼굴 깨끗하게 닦아주고 나서 수건 한 쪽에 치워두더니 지민이더러 편하게 기대라 하고 윤기가 손으로 뒷목 받쳐줌. 샤워기 가져와서 지민이 머리카락에 물 묻히고 나서 샴푸질도 해 줌. 따뜻한 물로 씻어주는데 갑자기 잠이 쏟아짐. 임신하면 잠도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니까. 그렇게 지민이가 씻다가 잠들었는데도 윤기가 마지막 남은 거품까지 깨끗하게 씻어주더니 수건 하나 자기 어깨에 걸고 지민이 공주님 안기로 침대로 데려 감. 누워 있는 지민이 머리 살짝 들어서 베개에 수건 깔아주고 옆에 누워서 지민이 얼굴만 한참을 봄. 임신하면 원래 살이 찐다는데, 오히려 점점 빠지는 것 같은 지민이 보니까 눈물 나려고 함. 윤기가 후... 한숨 쉬면서 천장 올려다 보고 눈물 참는데 지민이가 깬 건지 윤기 손 슬쩍 잡아줌. 윤기가 지민이 손 꽉 잡으니까 지민이가 헤, 하면서 웃음.
좀 잘 자나 싶더니 지민이가 눈을 뜸. 배가 고픈 건지 배 슥슥 쓸고 있음. 윤기가 잠귀가 되게 밝음. 잠든지 얼마 안 되기도 해서 그런지 지민이 뒤척이는 거 듣고 윤기도 다시 기상. 윤기가 지민이한테 왜, 하니까 지민이가 아냐 그냥 잠이 안 와서. 하고 다시 재우려고 함. 아까도 자던 거 깨워서 씻겨주기까지 했는데 뭘 더 시키는 게 미안함. 눈치 빠른 윤기가 속을리가 있나. 뭐 먹고 싶은데, 하고 물으니까 지민이도 이제 순순히 얘기 함. 나 딸기... 윤기가 바로 몸 일으켜서 나가려고 하니까 지민이가 형, 아니, 지금 딸기 나올 시기 아닌데... 하니까 지민이 머리 슥슥 쓰다듬더니 누워있어, 금방 올게. 하고 나가버림.
지민이는 괜한 걸음 할까 봐 윤기 걱정에 편히 누워있지를 못함. 집 앞 과일 가게에 간 거면 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윤기는 올 기미가 안 보임. 애타서 전화 해볼까, 하고 핸드폰을 들었는데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림. 지민이가 침대 내려와서 방 밖으로 나가니까 상자 5개 정도를 품에 안고 들어오는 윤기가 보임. 이게 다 뭐야, 하면서 상자 두 개 받아드니까 윤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케이크, 라고 말함. 그니까 이걸 왜...? 하는 눈으로 쳐다보니까 말 없이 상자를 열고 케이크를 꺼냄. 꺼낸 케이크 위에 딸기 다섯 개가 올려져 있음. 그제서야 지민이가 설마 이거 사려고 주변 케잌점 다 돈 거야? 미쳤, 아니. 힘들게 왜 그랬어... 하면서 윤기 쳐다보니까 윤기 이마에 맺힌 땀이 보임. 그거 닦아주니까 윤기가 웃으면서 말함. 우리 수박이 나오면 혼나야겠네, 엄마 힘들게 먹고 싶다는 게 많아. 내가 힘든 게 아니라 형이 힘든 거지...
뭐가 힘들어, 내가.
아 몰라. 어, 형. 나 방금, 그, 수박이가 나 찼어. 나 이거 처음 느껴 봐... 아빠한테 고맙다고 하는 건가 봐.
엄마한테 고마워하라고 해.
아, 내가 뭘 했다고.
이렇게 예쁜 애 뱃 속에 있지, 너도 예쁘지. 내가 제일 행복할걸 지금은.
그렇게 또 해피엔딩인 슙민.
04
형아, 우리 수박이는 밤에 울지도 않고 진짜 예쁜 것 같아. 그치. 엄마 아빠 힘들게도 안 하고.
어... 맞아, 내새끼라 그렇지 뭐.
그렇게 말하는 윤기 눈이 퀭함. 그러면서도 애기 안아들고 우르르르 까꿍 하고 있는 지민이 보는 눈은 꿀이 떨어지고.
옆에서 뒤척거리는 소리에 지민이가 잠에서 깸. 깨긴 했는데 아직 잠에 취해서 눈을 뜨지는 못함. 눈은 여전히 감은 상태로 가만히 누워있는데 옆에 있는 애기 침대에서 애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림. 평소에 잘 울지도 않고 잘 자던 수박이라서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눈 떴는데 지민이보다 빠르게 일어나서 애기 침대에 다가서는 윤기가 보임. 야근까지 하고 와서 피곤할 텐데도 재빨리 수박이를 안아드는 모습이 능숙함.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애기 안을 때 완전 굳어서는 잘 만지지도 못하던 윤기가 저렇게 안아드는 거 보니까 기분이 묘함. 그러다가도 지민이는 잠이 쏟아져서 그대로 잠에 듦.
실은 수박이가 밤마다 안 칭얼거리고 잠을 잘 자는 건 아님. 지민이가 애 우는 소리 듣고 깨기 전에 윤기가 안아들고 다른 방에 가서 재워서 그렇지. 그래서 날이 갈수록 피곤이 쌓이는 건 윤기임. 임신 하고나서 살이 빠졌던 지민이는 다시 살이 올라서 포동포동 해짐. 막 똥똥해진 건 아니고 귀엽게 포동포동. 그리고 살이 점점 빠지는 윤기를 걱정함, 빠질 살도 없는 사람이 점점 말라가니까. 형 어디 아파? 걱정스럽게 물어도 윤기는 고개 저으면서 아니야, 됐어. 하면서 말을 안 하고.
그러다 또 낮잠을 많이 잔 지민이는 밤에 살짝 깸. 잠이 안 와서 이불 꼭 잡고 눈만 감고 있는데 그 때 수박이가 깬 건지 칭얼거리기 시작함. 지민이가 놀라서 입 꼭 깨물어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는데 윤기가 눈 반쯤 감고 일어나서 수박이 안아들고 거실로 나감. 오늘따라 수박이가 잠에 잘 안 듦. 안아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계속 칭얼거림. 윤기가 수박이 등 토닥이면서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한마디 함. 인마, 너 엄마 깨면 어쩌려고 이래. 하니까 알아들은 건지, 뭔지 울음소리가 뚝 그침. 그제서야 윤기가 한숨 내쉬고 방 안으로 들어와서 애기 침대에 눕힘. 수박이 눈 감고 잠든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 다시 침대에 누움.
지민이는 그제서야 윤기가 밤마다 이렇게 애기 재우고, 달래고 한 걸 알아차림. 그게 너무 미안한 거임. 자기는 하루 종일 집에서 쉬는데,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다 온 윤기가 이렇게 배려해준 걸 알고 나니까. 겨우 잠든 윤기 깰까 봐 입 틀어막고 눈물만 흘리는데 윤기가 지민이를 안아줌. 지민이는 윤기 반대 쪽 보고 누워있어서 윤기 얼굴은 안 보여서 표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잔뜩 일그러져 있을 게 분명함. 연애할 때부터 지민이가 우는 건 미치도록 싫어한 윤기니까. 그걸 아는 지민이는 울음 그치려고 끅끅 대는데 마음대로 안 됨. 한 번 눈물 터지니까 멈출 수가 없음. 그런 지민이 계속 토닥거리면서 귓가에 속삭여줌. 고마워, 미안해, 수고했어. 하면서.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샘, 그 둘은. 사이에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둘 다 서로 마음은 다 알 거임.
05
수박이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고 한 예정일이 점점 가까워질 수록 마음이 심란한 윤기임. 주변에 있는 형들이나 사람들한테 많이 물어봤었음. 아내랑 같이 들어갔었냐고, 수술실을. 아이를 낳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 몇 시간을 고통 속에서 버텨야하는데 그 모습이 마냥 예쁠리가 없음. 아이가 나오는 그 과정도 생각보다 많이... 그렇다고 했음. 그래서 산모랑 같이 수술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빠들도 꽤 있음. 의사 선생님도 비위가 약하면 같이 들어가는 건 하지 않는 게 좋다고 그랬고. 그걸 들은 지민이도 윤기가 비위 약한 걸 아니까 나 혼자 들어가도 돼, 말하긴 했지만 아쉬워하는 표정을 감출 수는 없었음.
게다가 지민이가 자연분만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움. 남자 산모인지라 자연분만은 위험성이 더 높아짐. 윤기가 어느 정도 타이르면 알겠다고 뜻을 굽히던 지민이도 이 부분에서는 뜻을 굽히지 않음. 작고 여리던 아이가 의사 선생님 앞에서 저는 자연분만 꼭 할 거예요 하면서 강하게 주장하는데 얘가 이렇게 강한 아이였나 싶음. 자연분만은 더 힘들고 아프다는데 그 장소에 같이 못 있어준다는 생각 하니까 미칠 지경임. 그렇게 날은 지나고 지나서 예정일 일주일 전이 됨.
진짜 일주일밖에 안 남았어... 나 잘할 수 있겠지?
응, 잘할 수 있어.
어, 수박이가 발 굴렀어 또. 나 힘내라고 지금 그런 거지, 수박아?
지민이가 저렇게 물으니까 그렇다고 대답이나 하듯이 태동이 한 번 더 느껴짐. 윤기가 지민이 배 살살 쓸어주면서 지민이랑 눈 마주치고 웃으니까 지민이도 배시시 웃으면서 이불을 끌여당겨 덮음. 그리고 둘 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함.
자다가 지민이가 새벽 쯤에 이상한 기분에 깼음. 가만히 앉아있다가 배가 점점 더 아파오니까 당황해서 일단 이불을 들춤. 근데 아래 이불이 다 젖어있는 거임. 예정일은 일주일이나 더 남았는데 양수가 터져버린 거. 지민이 머리가 새하얘짐. 애가 잘못된 건가, 내가 잘못한 건가 하면서 이런 저럼 생각을 다 하는데 윤기가 지민이가 울먹거리니까 그제서야 깸. 일어나서 눈 비비다가 왜 안 자, 하는데 지민이가 부들부들 떠는 거 보고 놀라서 잠이 훅 깸. 이불 젖은 거 확인하자마자 차키 들고 지민이 안아듦. 옷 갈아입고 그럴 시간이 어디 있음. 집 문 열고 나왔는데 엘레베이터가 말썽임. 집은 3층인데 엘레베이터는 15층에 가있음.
지민이 때문에 욕도 못 내뱉는 윤기가 입술만 깨물고 계단으로 뛰어내려감. 지민이가 무거울 텐데도 아무 말 없이 지민이 상태만 확인을 함. 애가 숨 헐떡거리니까 숨 쉬어, 박지민. 하면서 끊임없이 얘기함. 불안하니까, 잠깐이라도 얘기를 안 하면 애 숨이 넘어갈 것 같아서. 둘 다 이런 경험이 없으니까 불안해할 수밖에 없음. 지민이 조수석에 조심스레 태우고 차에 타서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한 건지 기억이 안 남. 새벽이라 도로에 차도 별로 없어서 되는 대로 밟은 것 같음. 운전하다가 만약 양수가 예정일보다 일찍 터지면 병원에 연락을 하고 오라는 말이 생각이 남.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 있는 폰 꺼내서 병원에 전화를 함. 네, ㅇㅇ 산부인과입니다. 라는 말이 들리는데 윤기가 무슨 말을 해야될지 몰라서 어... 그, 산모가... 하고 있으니까 지민이가 고통과 싸우는 와중에도 윤기 손을 잡아줌. 그제서야 아, 하고 산모가 양수가 터져서요. 네, 박지민이요. 하고 통화를 잘 끝냄. 과속 방지턱 있는 부분에서는 지민이 팔로 받치고 속도도 어느 정도 줄임. 그렇게 20분 거리에 있는 병원을 10분만에 도착을 함.
도착 하니까 익숙한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들이 하얀 침대랑 같이 대기를 하고 있음. 일단 대충 차 앞에 세눠놓고 지민이 안아서 그 쪽으로 향함. 지민이는 바로 병실로 옮겨지고 윤기는 일단 보호자 서명을 위해 간호사 따라 다른 곳으로 감. 근데 산모인과에 가면 아이가 세상에 나올 때까지 혼자 있는 게 아님. 같은 병실에 6명 정도의 산모가 같이 진통을 겪음. 근데 지민이는 남자라, 여자들이 있는 곳에 갈 수가 없음. 딴 병실을 잡았는데 남자 산모가 별로 없어서 큰 병실에 지민이 혼자 덩그라니 있음. 진짜 처음 겪어보는 것 같은 아픔에 끙끙대다가도 주변을 보는데 아무도 없으니까 더 불안함. 이렇게 아기가 빨리 나오게 된 것도 다 남자인 자기 탓인 것 같아서.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으니까 팔을 들어서 눈을 가림.
그리고 윤기가 보호자가 해야될 거 끝내고 지민이 부모님한테 연락을 한 뒤에 병실에 들어옴. 근데 아파하는 지민이 보면서 해줄 수 있는 게 손 잡아주고 그런 것들밖에 없는 게 너무 답답함. 지민이가 욕이라도 하면서 아프다고,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윤기한테 아무 말 없이 끙끙대기만 함. 여자 산모실 지나올 때는 비명 소리까지 들렸돈 것 같은데. 안쓰러워서 흘러내린 머리도 쓸어넘겨주고 있는데 부모님이 오심. 아가, 아가. 하면서 침대 쪽으로 달려오시는 부모님 위해서 윤기가 옆으로 비키려고 손을 놨는데 지민이가 허공에 손을 휘저음. 잡아달라고, 가지 말라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많이 불안한가 봄. 윤기가 재빨리 손 다시 잡으니까 그 손 꽉 잡으면서 절대 안 놔줌. 그 고통을 아는 지민이 어머니는 눈물 흘리면서 아버님한테 기대고. 두 시간 정도 지나니까 간호사가 들어옴. 무통 주사 맞겠냐고 하는데 지민이가 고개를 저음. 무통 주사가 뭐냐면 고통을 못 느끼게 해주는 거임. 진통제 같은 거. 근데 그게 아이한테 안 좋음 영향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음. 남자 산모한테는 더더욱. 그걸 들은 지민이는 안 맞겠다고 한 거임. 걱정 되는 부모님과 윤기 속은 타들어감.
고통 속에서 몇 시간이 더 지나고 간호사가 이 쯤이면 됐다고, 침대 밀고 수술실로 향함. 수술실 들어가기 전까지 지민이 손 잡고 있던 윤기한테 의사가 물음. 같이 들어가겠냐고. 윤기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