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도 사랑, 시들어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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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방학이 끝이 났다.
학교에서 네 얼굴을 다시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앞섰다. 나는 아직 마음 정리가 안 됐는데. 한 달 동안 너를 보는 날이 없으면 내 마음도 자연스레 사그라 들겠거니, 했던 내가 부끄럽다. 나는 아직 한참이다.
너를 완전히 지우기엔, 나는 아직 한참이다.
여주야 어... 저기
내가 이런적이 처음이라 좀 부담스럽고,
그러니까... 당분간만 예전처럼 그렇게 지냈으면 좋겠다.
미안해.
까였다. 고백을 해 본 것도 아니고 박찬열에게 '나는 너 별로야' 라는 말을 들은 것도 아니지만 나는 까였다. 꼭 차인 기분이었다. 박찬열의 당분간만 예전처럼 지내자는 얘기는 예전과 같이 얼굴도 모르고 눈이 마주쳐도 인사같은 건 하지 않는 사이로 돌아가자는 뜻이었다. 나는 그런 박찬열에게
'그래'
라는 멍청한 답 밖에 내뱉을 수 없었다.
박찬열과 나의 그런 상태는 4달 째 지속되고 있었다. 우리 사이의 그 당분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구질구질해 보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박찬열은 신경도 안 쓸 텐데. 분명 자기는 나와의 그런 일들은 단순한 헤프닝으로 마무리 짓고 나를 확실히 쳐냈다며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닐지도 모른다.
제일 짜증나는 건 박찬열네 친구들이었다. 특히 그 중에 변백현이라는 애는 내가 찬열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온 동네방네 다 떠벌리고 다니는 바람에, 전교에 소문이 났다. 하필 박찬열은 전교회장 동생+축구라는 어마어마한 버프를 받아 소문이 3학년까지 뻗치는 데 한 몫을 했다. 덕분에 나는 아직까지도 모든 학생들로부터 쟤가 걔야? 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내가 어쩌다 박찬열을 몰래 쳐다볼 때면 이상하리만큼 변백현과 눈이 많이 마주친다. 그러고선 또 자기들끼리 수군수군. 아아, 변백현이 싫다. 하지만 더 싫은 건 까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박찬열이다.
박찬열과 나는 꽤 마주칠 일이 많다. 나도 반장, 박찬열도 반장이기 때문에 회의를 같이 하게 된다거나, 매 쉬는 시간마다 매점에 들락날락 거리는 내 노력 덕이라거나. 사실 마주친다기 보다는 나만 훔쳐보는 쪽에 가깝다. 특히 점심시간에 박찬열은 항상 농구를 하는데, 나는 농구 하는 박찬열을 가장 좋아한다. 박찬열과 그 외 남자애들도 몽땅 농구에 집중하기 때문에 박찬열만 뚫어져라 보고 있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다.
나는 아직 박찬열을 좋아한다.
'아직'
나름대로 마음정리도 많이 했다. 4달이라는 시간은 꽤 긴 시간이다. 완전히 정리하진 못했지만 내 생각엔 반 정도...는 정리 했다고 본다. 일상생활이 불가능 할 정도로 자꾸 생각나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반 이상을 정리했을 지도 모른다.
더이상 박찬열에게 내 감정과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사치다. 2학기가 시작 되었으니, 나 또한 시작하기로 한다.
자연의 섭리란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 배웠다. 봄이 가면 꽃이 시들어 말라 비틀어지듯이, 너도 곧 시들어 버리겠지. 나는 말라 비틀어 지겠지만, 너를 보내고 다음의 차례를 기다리는 일을 할거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나의 다짐은 생각보다 견고했다.
우리 사이의 그 당분간의 시간들을 끊어낼 만큼.
해가 쨍한 8월, 나는 이제서야 봄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