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미운 부승관이 하루에 몇 번씩이나 내게 살인충동을 느끼게 해도 나는 눈을 꼭 감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인내하리.' 라는 일관적인 태도로 21세기 부처가 된 마냥 살아왔다. 애초에 벌 받을 짓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아무리 내가 흔히 말하는 닭대가리, 새대가리 등 조류계의 선두주자라지만 학교를 때려치고 검정고시를 보는 게 내 신상과 정신건강에 이로울 듯 했다.
"어, 너봉아. 빨리 오빠 옆에 앉아,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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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예쁜 부너봉 공주님. 석민 왕자랑 손 잡고 급식 먹으러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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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봉아, 나 햄버거 세트 쿠폰 생겼는데 보충 끝나고 데이트 어때."
등등 씨발. 부승관한테도 잘 하지 않았던 욕이 얘만 보면 술술 나오는 걸 보면, 필시 부승관보다 더 한 새끼가 분명하다. 더 가관인 게 뭐냐면 내가 욕을 할 때마다.
"부너봉. 그런 나쁜 말은 어디서 배웠어, 씁-."
부승관한테 배운 거냐며 이 새끼를 죽이겠다는 둥 온갖 생난리를 치는 이석민의 발을 힘껏 밟으면 그제서야 얌전하게 앉아 어쭙짢은 윙크나 하면서 검지를 들어 내 입술을 훑는데 이제는 뭐라 대꾸하기도 지친다. 그래서 요즘엔 자기 전에 매일 창문 열고 달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잔다. 짧은 시간동안 미운 정이라도 든 건지 차마 사람한테 죽으라고 저주를 퍼부을 순 없어서 가볍게 '내일은 제발 이석민이 결석하게 해주세요!' 라고만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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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이석민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나를 절대 이해 못한다. 아니 이해 안 해준다는 말이 맞겠지. 나름 우리 학교 정보통인 내 친구 말에 의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이석민은 우리 학년 뿐만 아니라 전교에서도 알아주는 훈남이라고 한다. 아니, 훈남은 다 빙하기에 태어나셨나. 얼어 죽을 무슨 훈남. 차라리 부승관한테 여자가 줄을 섰다는 말이 더 믿기 쉽겠다, 야. 한숨 쉬듯 뱉은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친구를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니, '아, 내 말 맞다니까! 존나 안 믿어, 부승관 같은 새끼.' 라며 등짝 스파이크를 날리는 꼴이 분명 우리 엄마의 숨겨둔 수제자가 분명하다. 맞은 것보다도 더 억울한 건 부승관 같다는 말이었다. 윽-, 내 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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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종이 치기 무섭게 이석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손목을 단단히 잡더니 우리를 부르는 아이들은 뒤로 하곤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빠르다고 천천히 좀 가라는 내 말은 들은 척, 만 척 하더니 급식실이 아닌 정문에 다다르자 그제서야 숨을 고르며 나를 보며 씩- 웃는다. '어디 한 번 변명이라도 해봐라, 들어주긴 할 테니.' 라는 생각으로 나 혼자 팔짱을 낀 채 이석민을 올려다 보고 고개를 까딱거리니, 내 앞엔 '그렇게 쳐다보면 오빠 부끄럽잖아.' 라며 능글능글 공격을 시전하는 만렙보스가 서있었다.
"오늘 점심 메뉴 보니까 맛이 없어요. 우리 외식하러 가자."
"나 지갑 안 들고 나왔어. 지금 돈 없는데."
걱정 마, 가자. 오빠가 쏜다! 저 놈의 오빠병만 안 걸렸으면 오늘은 조용히 따라가주려고 했는데, 꼭 매를 벌어요. 맞은 뒤통수가 아픈 건지 손으로 연신 슥슥- 쓸어대면서 울상 짓는 이석민이 오늘따라 조금, 아주 조금 귀엽게 보이긴 했다. 자기가 잘 아는 파스타집이 있다며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는데, 쟤 혹시 바본가. 왼팔 휘두르면서 왼발 내밀고, 오른팔 휘두르면서 오른발 내민다. 웃음이 빵 터진 나머지 배를 잡고 끅끅거리는데 내가 왜 웃는 지 모르는 이석민은 눈썹만 씰룩거리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삿대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어어-, 저기 인형뽑기 기계. 우리 너봉 공주 인형 갖고 싶지 않아? 오빠가 뽑아줄게. 이 새끼 이거 또 시작이네. 서서히 굳어가는 내 안면근육을 애써 부여잡으며 점심시간 별로 길지도 않으니 나온 김에 밥부터 먹고 인형은 다음에 뽑아달라는 내 말에 감동이라도 한 듯 내 두 손을 잡아 깍지를 낀 이석민이 한 번도 본 적 없던 수줍은 표정으로 얼굴을 코 앞으로 들이대며 '다음에도 나랑 나와줄 거야?' 라고 묻는데, 순간 머리가 띵 했다.
"왜 대답이 없어. 나랑 나와줄 거냐니까."
어깨동무를 한 채 내 머리에 자기 고개를 댄 이석민이 계속 징징거리던 말던 나는 계속 멍할 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쭉 내민 이석민이 포크에 면을 돌돌 말아 내 입가에 대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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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똥분량 ! 히히...★
소소하게 끄적인 글에 댓글 달아주셔서 너무 감사해요;ㅅ;
답댓 하나하나 달아드리고 싶었는데 제가 댓글을 오늘에서야 봐서ㅠㅡㅠ 답댓 알림 늦게 뜨면 짜증나실까 봐 힝
암호닉 신청해주신 리마 님! 감사드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