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 오세훈 06 (부제 : 너는 새로이 뜬 별일까)
w.몌별
세훈과 헤어진지 어연 일 년을 채워가고 있다. 아직도 취업을 못했냐고? 아니. 세훈과 헤어진지 5개월 되던 달, 그때 취업을 했다. 내 시간은 세훈과 헤어지기 전 후로 나뉘어지 듯 세훈은 나의 시간의 평균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세훈에게 미련이 남았나? 그건 아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생각이 나지 않나? 그것 역시 아니다. 마음 한 켠 어딘가엔 세훈만의 방이 있는 듯 문득, 아니 자주 떠오르곤 했다. 세훈의 소식을 수정의 입을 통해 간간히 전해 듣는 바로는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세훈이 밉지 않다. 오히려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 뿐이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 반짝이는 휴대전화를 보고 주위 눈치를 살피다 연락을 확인했다. 회사 끝나면 수정의 회사와 우리 회사의 중간에 위치해 있는 카페에서 잠깐 보자는 연락이다. 자주 가지 않는 카페여서 살짝 의아했지만 카톡으로는 티내지 않고 답장하였다. 긍정의 말로. 오늘은 야근도 아니겠다 그동안 쌓여왔던 말들을 신나게 풀 생각이 들어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졌다.
"ㅇ사원, 뭐해요. 얼른 일 안 하고."
상쾌해지려다 말았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얼른 휴대전화를 집어넣고는 일에 집중했다. 이 일이 얼른 끝나야 수정을 만나는 마음이 더 가뿐해질 것 같으니까.
회사 일을 모두 마치고 인사 드리고 나왔더니 하늘이 어둑어둑하다. 수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회사 끝났어."
"나도 끝나고 가는 중이야. 너 먼저 오면 나 올 때까지 기다려서 같이 들어가."
"참... 알았어."
원체부터 혼자하는 활동 자체를 싫어하는 수정이라 이런 것에는 단련되어 있다. 수정보다 먼저 도착한 나는 카페 밖에서 휴대전화를 하며 수정을 기다렸다. 내가 온 후 몇 분 안 돼서 도착한 수정은 얼른 들어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제일 편해보이는 자리로 가서 가방을 내려놓고 앉아 수정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로 없으면 죽을 것 같이 사귀더니 결국 너희도 헤어지는구나.”
“사람 사귀는 게 뭐 다 그런 거지.”
“와, 못된 년. 걔랑 하루 이틀 사귄 것도 아니면서 남 일 얘기하듯 쉽게 말한다?”
“그럼 이 상황에서 너한테 울고 불고 난리라도 치랴?”
“야, 차라리 그래라. 네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나오니까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럽네.”
담담한 나를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수정이를 보고 카페 왔으면 커피나 사 오라고 등을 떠밀어서 보냈다.
으아, 수정이가 주문하러 떠나고 갑자기 조용해진 주위를 둘러보다 순간 눈이 한 곳을 향해 멈췄다.
내가 잘못 본 거였으면.
아니면 차라리 눈이 마주치지 않았으면.
“야, ㅇㅇㅇ. 뭐해?”
“어? 그... 그게...”
“하여튼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줄은 몰랐네. 이 언니가 오세훈한테 꿀리지 않을 남자 소개해 줄게.”
“아냐. 나 그럴 여유 못 가지는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근데 너 저번에 갔다 온 곳 얘기 좀 해 줘. 나도 시간 날 때 거기 가고 싶어서.”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네가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널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마주쳐 버리니 너무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공중에서 마주친 너의 눈빛은 싸늘했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몸은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수정아, 미안한데 나 알바 있는 거 까먹었다. 나중에 만나면 내가 밥 쏠게. 진짜 미안해.”
“너 알바 지금 이 시간대 아니잖아. 무슨 일 있어?”
아, 예리하다.
기억하는 데 소질이 있는 수정이의 머리를 내가 간과했다.
그런 수정이에게 속삭였다.
“여기 오세훈 있으니까 제발 가자, 응?”
“헐, 뭐야. 미리 귀띔이라도 하지.”
나오면서 내게 정말 미안해하는 수정이에게 굳이 그럴 필요 없다며 달래주었다.
이미 끝난 사이인데, 뭘.
버스를 타고도 조금 걸어가야 나오는 외진 곳에 사는 나의 집을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가고 있는데 수정이가 미안하다며 위험하니 택시를 타고 가라고 돈을 쥐여줬다.
거부할 수도 없어 받고 멍하니 수정이가 떠난 곳을 보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고도 내 머릿속엔 오직 하나의 장면만 재생되었다.
날 바라보던 너의 싸늘한 눈빛.
다 잊었다고는 했지만 사귈 때 나에게 보여주던 눈빛과는 너무 정반대여서 적응할 수 없었다. 뭐, 이제 와서 적응이란 말을 뱉어내는 자체가 우습긴 하다.
이미 끝난 사이면서.
난 속으로 나를 자조하며 비웃었다.
몇 개월 만에 만나는 너와의 재회가 이런 상황이라니. 꼭 뒷담화를 하다 걸려버린 여고생같은 기분이었다. 지금 기분을 말로 표현하자면 욕, 그 자체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왔지만 너를 마주쳤을 땐 아니란 게 내 마음 안에서 이미 들통났다. 넌 여전히 잘생겼고 멋지다. 다만 나를 보는 눈빛이 180도 다를 뿐. 너와 나는 결국 한 때 사귀었던 사이로만 남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이 들어 온몸이 우울함에 사로잡혔다. 혼자 상실감, 우울감 등의 별별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쯤 수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안해. 정말... 아 진짜 내 입이 방정이지."
"아냐. 너도 몰랐잖아. 그리고 이미 다 끝난 사이인데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웃기다. 우리 항상 그랬던 것처럼 넘어가자."
"그래도..."
"야, 됐어 됐어. 그렇게 미안하면 나중에 밥이나 쏴."
수정의 부담을 덜어주려 마지막은 장난스럽게 말해주었다. 정말 미안해하는 수정의 마음이 수화기 건너 내 마음까지 전해졌다.
눈을 감고 양이라도 세어보며 잘 생각을 하지만 세훈의 생각은 양을 한 마리 없애고 자신을 채워 넣고 있었다. 복잡했다. 곧 머리가 터질 듯한 느낌이었다. 애먼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생각을 애써 잠재웠다.
꿈에는 세훈이 나왔다. 나를 붙잡고는 왜 헤어졌냐고 나를 향해 다다다 쏘아 붙이는 말이 무서웠다. 난 그런 세훈을 외면하고 끈질기게 붙잡아오는 손을 외면한 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잠이 깼다. 기분 나쁜 꿈이다. 그 꿈을 꾸고서 내 머릿속은 암전이었다.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됐을 무렵엔 또 다시 세훈의 표정이 나를 잠식해왔다.
회사에서도 집중을 못해 욕을 얻어 먹기 일쑤였다. 미운 털이 박혀 있는 나를 박부장은 이때다 싶어 미친듯이 갈궈대기 시작했다. 꼬투리 하나 잡히니까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할만큼 갈궈왔다. 퇴근 시간까지 내 할 일을 다 못 한 나는 회사에 꾸역꾸역 남아 내 할 일을 마치고 퇴근해야했다. 회사에서 미처 확인하지 못한 휴대전화가 내 눈에 가득 찼다. 습관처럼 확인하는 핸드폰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러나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연락이 와있었다.
하지만 확인하기엔 너무나 무서웠다. 그래서 그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한 채 1이란 숫자를 계속 동동 띄우며 하루를 보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외롭고 쓸쓸하다. 차가 있지만 잘 타지 않는 나로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다니는데 오늘같이 야근을 할 때면 차를 탄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야근이었기 때문에 차는 회사 가까이에 없다. 그리고 새벽을 바라보는 시간에 대중교통은 배차가 끊긴지 한참이었다. 집은 취직할 때 최대한 회사 가까이에 구해놓긴 했지만 그래도 거리가 있는터라 여자 혼자 걷는 밤길은 무서웠다.
아직까지도 불이 반짝거리는 대도로를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가로등 불빛이 미약하게 빛나고 있다. 길을 걸을 때마다 마주치는 쓰레기 더미들이 분위기를 더 우중충하게 만들어준다. 가끔 들려오는 고양이의 앙칼진 울음소리는 나를 공포에 몰아넣기 충분했다.
혼자 골목을 걷고 있을 때 뒤에서 터벅터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기겠어?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손은 머리와 따로 놀았다. 팔의 동선을 최대한 줄여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경찰서 번호를 다이얼에 입력해 놓았다. 내가 예민해서 그런가하고 걸음을 조금 빨리했더니 뒤에 있는 그 사람 역시 걸음이 빨라진다.
확실하다. 이제 곧 대도로가 보일 것이다. 최대한 뛰어가면 살 수 있어. 손에 들린 휴대전화는 생각하지도 못한 채 뛸 생각을 잔뜩 하고 있었는데 골목의 옆에서 어떤 남자가 튀어나오더니 어깨동무를 한다.
"제가 오빠인 척 할테니까 대도로까지 나와요."
최소한의 단어로 나에게 작게 속삭인 그는 말이 끝나자 뒤에 사람도 잘 들릴 것만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오빠가 일찍 다니랬지. 그리고 골목으로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자꾸 골목으로 오고 그래."
남자는 키가 컸다. 아까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어서 몰랐는데 나와는 머리통이 한 개 반이나 차이가 났다. 생각이 끝난 후 어색하지 않게 남자의 말에 대충 대꾸를 했다.
"그러게. 오늘은 좀 무섭다. 진작에 오빠 말 들을 걸."
남자의 말을 이어 능청스럽게 대꾸하다 보니 대도로가 나왔다. 어느새 뒤에 있는 의문의 사람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정말 간 떨리는 순간이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려는 순간 남자의 얼굴을 마주치니 어디서 마주친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곰곰히 생각을 하다 보니 내 머리에선 한 가지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려졌다. 아, 그 면접?
머릿속에서 기억이 하나하나 회상된다.
"아... 여기 면접 보러 오셨나 봐요?"
옆에 앉아 있던 인상 뚜렷한 남자가 말을 건다.
"아, 네."
그닥 달갑지 않아 단답으로 말을 끊으려 했다.
"되게 긴장 타시는 것 같은데 그럴 때 저는 눈을 감고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면 쉽게 풀어지더라구요."
"아, 감사해요."
"그리고 면접 프리패스상이시네요. 정말 깔끔하고 단정하게 생기셨어요!"
"아... 그래요?"
갑작스러운 물음과 또 갑작스러운 외모 칭찬이 더해진 대화는 나를 민망함에 밀어넣기 충분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또 대화를 이어나가는 실력을 보면 정말 대단한 친화력이다. 어딜가든 편하게 살 것만 같은. 의문형으로 끝난 내 말 뒤에 따라오는 말들은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면접이 끝나면 다시 볼 사이도 아니니까.
"000번부터 005번까지 들어오세요."
단정하게 차려입고 머리를 하나로 질끈 동여맨, 이 시대의 여회사원상에 부합한 여자가 나와 말하였다. 일어나서 약간 구겨져 있는 정장 치마의 뒤쪽을 손으로 툭툭 털고는 그대로 면접장에 들어갔다. 물론 그 인상 강한 남자도 같이 말이다. 내 면접에만 집중하느라 주위 사람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데 이 사람만은 참 기억에 남았다. 당차고 포부있는 모습이 회사에서 원하는 모습과 너무나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이다. 난 결국 그 회사 취직에 실패했지만 이 남자의 결과가 궁금했는데 그 남자를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드라마였으면 참 운명적인 만남이라면서 별별 시덥잖은 얘기들을 떨어댔겠지. 여튼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하는 순간 그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저 기억나시죠?"
"네. 그 면접."
"기억하고 계시네요. 박찬열이라고 해요."
뜬금없는 악수 요청에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얼떨떨한 바보같은 표정으로 박찬열의 손을 맞잡았다.
"이런 골목 여자 혼자 밤에 다니면 위험해요."
"아는데도 습관이 무섭네요. 근데 여긴 어떻게 계셨어요?"
"집이 이 근처라서 나와서 바람이라도 쐴까, 하는데 어떤 여자가 걸어오는 거예요. 뒤엔 남자가 꽁무니처럼 따라오고. 이건 티비에서 봤던 그 상황이랑 똑같은데? 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신고하려고 몰래 보고 있었는데 그게 그쪽인 거 있죠. 전 아직 기억하거든요. 되게 깔끔하게 생기신 분."
약간의 과장된 말투를 섞어서 말하는 박찬열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날 그렇게 기억한다니, 은근 기분이 좋았다.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을 거라 믿는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화기애애한 대화 분위기 속에 살며시 밀어넣는다.
"근데 박찬열 씨는 거기 취업 됐어요? 되게 기억에 남았거든요. 취업 됐을까 안 됐을까 궁금했는데."
"아, 저 거기 말고 다른데 취업했어요. 궁금해 했다니 영광이네요."
"아, 어디 취업하셨어요?"
"성우요."
순간 몸이 움찔한 게 느껴졌다. 성우라면 세훈의 회사 아닌가.
"좋은 데 취직하셨네요."
하지만 티내지 않고 담담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네. 주위에서 다 취직 잘했다고 그래요. 음, 이름이 뭐예요 그쪽은?"
"ㅇㅇㅇ이에요."
"ㅇㅇ씨는 거기 붙었어요?"
"아뇨. 떨어지고 다른 데 붙었어요."
겨우 두 번 만난 남자한테 별 얘길 다한다 싶었다. 박찬열은 말하기 편한 분위기를 깔아준다. 이러다간 가정사까지 얘기하게 될 분위기여서 미리 말을 끊고 얘기했다.
"오늘 너무 감사해서 그런데 나중에 밥이라도 쏠게요."
"밥 좋죠. 근데 그러러면 번호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나?"
자연스럽게 번호를 물어오는 찬열에 당황하지 않고 번호를 알려주었다.
"오늘 감사했어요. 곧 봬요."
내 말을 끝으로 소위 말하는 운명적 만남은 거기서 헤어졌다.
회사를 다니면서 간간히 찬열과 연락을 했다. 알고보니 나와 동갑인 것이었다. 문자를 주고받다 동갑인 것을 알고는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레 말을 놓고는 대화하고 있더라. 찬열의 스케줄과 나의 스케줄에 맞추려면 주말밖에 시간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사는 김에 찬열 쪽으로 가자, 싶어서 찬열에게 미리 연락을 넣어놓은 상태였다. 그냥 밥 약속이었을 뿐이지만 전날부터 들뜨는 것을 보니 찬열과 나름 코드가 맞았다 보다.
머리를 말리며 찬열과의 첫 만남을 회고하다 그만 머리를 너무 말려 탄 냄새가 온 집을 진동했다. 처음 만났을 땐 나와는 너무 달라서 저런 사람과는 맞지 않겠다, 싶었는데 대화 한 번으로 내 선입견은 단번에 자물쇠 열리듯 풀어졌다. 누워 있는데 간간히 오는 수정과 찬열에 카톡에 나름 성의껏 답을 해주고는 내일 약속을 위해 일찍 잠들었다.
약속은 11시였지만 8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휴대전화를 확인하다가 아직도 떠 있는 1이란 숫자가 신경쓰였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끝난 인연에 연연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슬며시 들어오는 바람이 선선했다. 기분이 최고조를 달리고 있는 하루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는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더니 벌써 10시 20분이다. 약속 장소까지는 늦지 않을 시간이었지만 물 흐르듯 지나가 버린 시간에 안타까워 하는 나였다. 빨래라도 할 걸. 빨래 생각을 끝으로 나는 집 밖으로 나와 빈 택시를 잡아 타고는 찬열과 만날 약속 장소로 가고 있었다. 택시의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왠지 어색했다. 몇 년을 서울에서 살았지만 오늘은 뭔가 색다른 느낌이 나를 스쳐갔다. 택시에서 내리고는 만나기로 했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좀 둘러보는데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찬열이 보인다. 맨투맨에 슬랙스를 입은, 캐주얼한 찬열의 패션은 부담스럽지 않고 깔끔했다. 여러모로 편한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 일찍 도착했어."
앉으면서 손목시계를 흘끗보니 10시 45분을 겨우 넘기고 있는 시간이었다. 나름 일찍 도착했다 생각했지만 나보다 일찍 도착한 찬열의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겠다.
"준비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그냥 왔지."
"먹을 거는 생각해놨고?"
"풀코스로 쏘는 거야?"
"음... 그래, 뭐. 과장해서 내 목숨도 구해준 사람인데 풀코스 정도는 확실하게 쏴줘야지?"
"과장 아니고 정말 너 목숨 구해준 사람 맞거든?"
능글 맞게 대답하는 찬열의 얼굴엔 웃음이 한껏 서려있었다. 찬열이 고른 메뉴와 내가 고른 메뉴를 시키고는 대화를 시작했다.
집에 혼자 처음 살았을 때 겪었던 기이한 에피소드, 회사에서 어이없게 갈굼을 당해 억울했던 에피소드, 고등학교 때 친구들의 에피소드 등 여러 이야기를 우리는 서서히 풀어나가고 있었다. 원래 무엇을 먹을 때 말하는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데 찬열과 있으니 그것을 까맣게 잊고는 열심히 떠들고 있더라. 밥은 점점 바닥을 보이고 우리는 레스토랑을 나갈 채비를 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내 손목을 휙 잡아채왔다. 소스라치게 놀랄 상황도 아니었는데 너무나 놀란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보일만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 손을 잡은 건, 다름 아닌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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