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저기. "
" ...어? "
" 보건실... 갈래? "
*
ㅇㅇ이가 다리를 생각보다 심하게 다친 탓에, 거의 껴안고 있는듯한 자세로 부축하여 보건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많이 아픈건지 계속해서 인상을 찡그리거나 옅은 신음을 내뱉는데, 정말 나때문에 다친 건지 자꾸만 신경쓰여 기분이 좋지 않았다.
"...미안해. "
" 어?... "
" 내가 바통만 잘 넘겨줬어도 너 안 다쳤을 텐데, 진짜 미안... "
" ㅇ,아니야, 내가 덤벙거리다가 넘어진거야, 너가 왜 미안해. "
*
보건실에 도착해 ㅇㅇ이가 운동장에서 계주연습을 하다가 넘어졌다, 그래서 이렇게 아파한다, 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선생님의 표정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 ...ㅇㅇ아, 너 괜찮아? 아프지 않아? "
" ...아프긴 한데, 막 죽을 것 같고 그 정도는... "
" 찰과상 같은데? "
" ...네? "
" 이 정도면, 2차감염 위험도 있고, 정형외과 한 번 가봐야겠다, 외출증 내가 끊어올테니까 태형이랑 여기 있어. "
" ㅇ,아... "
*
찰과상이라니, 자세히는 잘 모르지만 엄청 심각한 상황인 것 같았다. 자꾸만 신경이 쓰여 결국, 내지않은 핸드폰으로 찰과상에 대해 검색을 해봤는데,
' 찰과상 소독 안하면 죽나요? '
' 찰과상 2차감염시 어떻게 되나요? '
' 찰과상이라는데 수술하래요. 마취주사 아파요? '
' 저 학교 조퇴하는 법좀 내공 60드림 '
뭐지, 엄청 심각한 병인 것 같다. 죽는다니, 감염이라니, 세균은 또 뭐고, 수술이라니, 마취라니, 내가 ㅇㅇ이에게 못할짓을 저지른 것 같다. 어떡하지, 어떻게 사과를 건네지, 병원비가 나오면 내가 다 물어줄거다, 내가 대신 아프고 싶다. 아, 이 와중에도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ㅇㅇ는 참 귀엽다.
" ㅈ, 저기 ㅇㅇ아. "
" ...어? "
" 진짜 미안해, 나 때문에 너 이렇게 다친 거 맞아, 진짜 뭐 어떻게 사과를 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
" 아, 그만해. "
" ... "
" ㅇ,아니, 나 혼자 다친건데 너가 계속 사과하고, 이러니까···.
*
병원에 가보니 심하게 다친 건 아니고, 그냥 좀 심하게 다친 거 라고 한다. 뭔소린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수술하고 피뽑고 그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피부가 많이 벗겨지고 2차감염의 위험도 있으니, 당분간은 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으라고, 보건선생님이 내게 전해주셨다. 시발,
니가 거길 왜 가? 빨리 수업이나 들어가.
아, 쌤, 친구가 저 때문에 다쳤는데, 안보내주면 진짜 사람도 아니다, 제발요.
너 이거 무단이야? ㅇㅇ이 혼자 가는것도 아니고 내가 같이 가겠다는데 넌 왜, 수업이나 빨리 들어가.
*
" ..."
" 저기, 아까 화내서 미안···해. "
" ...넌, "
" ... "
" ...아니야, 치료는 언제부터야? "
" 내일...부터, 학교 끝나고 오래. "
" 같이 가. "
" ... "
" 같이 갈 거지? "
" ...응. "
*
" ...야. "
" ...? "
" 그, 내가 좋아하는 애 있다고 한 거 기억나냐? "
" ... "
" ...다리를 다쳤는데, 내가 계속 미안하다고 그랬는데, 존나 병신같이 보였겠지. "
" ... "
" 사실 아까 보건실에 단둘이 있었는데, 안을 뻔 했어. "
" ... "
" 넌 어떻게 생각하냐? "
" ...뭘 어떻게 생각해. "
" ... "
" 니가 좋으니까 뭐라고 안했지, 내가 그랬어봐, 존나 욕 먹었겠지. "
" ... "
*
정확히 열흘 지났다.
" 지민아 오늘은 교과서 가져왔네? "
" 지민아 ㅇ,이거 너 주려고 산거야! "
이 이상한 여자애가 나를 졸졸 따라다닌지,
사실 처음엔 그냥 내버려 뒀다.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애는 얘가 처음이었고, 누가 나를 좋아한다고 대놓고 표현한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 기분을 오랫동안 느껴보고자, 솔직히 사귈 마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칠 마음도 없었다.이렇게 생각해보니 나는 참 못돼먹은 새끼였다.
며칠 전 수업시간에 일이 터졌다,
선생님께서 수행평가 때문에 2명씩 짝을 지으라고 말씀하셨다. 그것도 하필 남자여자, 끼리 짝을 지어야 했다.
내 성격이 워낙 살갑지 않고 무뚝뚝한 탓에, 내게 호감을 표시한 여자애들도 질려 포기한 적이 많았다. 그때문에 반에 친한 여자애가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다.
" 야 박지민, 너 누구랑 할거냐? "
" ...몰라. "
" 니 빠순년한테 같이 하자고 해라. "
" ...뭔, 빠순년이야. "
주위를 둘러보니 그래도 꽤 말을 텄다고 생각했던 여자애들은 이미 짝을 만든지 오래였고, 커플들끼리 짝을 짓는 경우도 허다했다. 시발, 진짜 누구랑 하지.
*
" 시간 많이 줬다, 번호대로 짝 누군지 불러. "
" 방시혁이요 "
" 송호범이요 "
" ... "
" 박지민은, "
" ... "
" 박지민, 짝 누구냐? "
"...ㅇㅇㅇ이요. "
*
얘 진짜 시끄럽다.
분명 같이 앉은지 5분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공책 한 장을 썼다. 물론 수행평가가 아닌 다른 쓸데없는 얘기만이 가득했다.
" 지민아, 넌 이상형이 뭐야? "
' 너만 아니면 돼 '
" 지민아, 내가 같이 하자고 했을 때 기분 나빴어? "
' 응 '
" 지민아, 대답 좀 해주라. 나혼자 대화하는 거 재미없어... "
" 싫ㅇ... "
" 어, 대답했다! 이거 오늘 일기에 써야지, 오늘은 지민이가 나한테 대답을 해줬다, 그래서 엄청 기뻤다. "
" ... "
" ... "
" ... "
" ...그, 우리 수행은 뭐 어떻게 하지, 그냥 아무거나 조사하면 되는건가, 하하. "
" ...야. "
" ...어? "
" 너 나 좋아하냐. "
" ... "
" ... "
사실 내가 말하긴 했지만, 지금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렇게 대놓고 좋아하는 티를 내는 여자애한테 참 병신같은 질문을 한 것 같다.
" ...왜? "
" ... "
" 넌 내가 너 쫓아다니는 게 너 좋아해서 이러는 걸로 보여? "
" ...어? "
" ... "
" ...아, 아니야? "
" 사실 맞아, 나 너 엄청 좋아해. 근데 너는 나 싫어하는 것 같아서 요즘 좀 고민이야. 지민아, 어떻게 하면 너가 날 좋아할까? 얼마면 돼? "
" ... "
얘 진짜 이상하다.
*
" 진짜 못 들어주겠네요. "
" 김태형 저 새끼 수줍은 척 하면서 여자 얘기하는 거 진짜 못 봐주겠다. 잘했어 윤기야, 잘 버텼어, 너 이 멋진새끼. "
" ...형은 또 왜그래요. "
" ...얘들아, 혹시 오늘 내 방 들어온 사람 있어?
" 왜요, 누가 또 야동 지워놨어요? "
" ...아니, 그게 아니라···. "
*
참 좋은 일요일이다, 예전까지만 해도 일요일 밤이 그렇게 싫을 수 없었는데, 요즘은 꽤 즐거운 것 같기도 하다. 이게 다 ㅇㅇ씨 덕분이다. 누가 전원을 끈건지, 갑자기 날아가버려 마무리하지 못했던 보고서를 작성하다, 갑자기 또 ㅇㅇ씨 생각이 났다.
과장님이 ㅇㅇ씨의 사수를 맡게 되셨는데, 요즘 텃세가 정말 심하시다. 여자라고 만만하게 보시는 건지, 정작 가르쳐줘야 하는 건 가르쳐주지도 않고, 대놓고 무시도 하신다. 아무리 기를 잡는다지만 정말 너무하다. 마음같아선 내가 대신 ㅇㅇ씨의 사수를 맡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난 일개 신입사원일 뿐이니, 이런 망상은 잠시 접어두도록 한다.
*
뭐 어떻게 말을 걸어야하지, 사실 같은 부서이긴 하지만, 밥도 같이 안먹는 사이고, 전화번호도 없다. 드라마같은 데 보면, 같은 사원끼리 서로 사랑이 싹을 틔우다 결국 연애까지 성공에 이르던데, 드라마는 진짜 그냥 드라마 인가보다.
" ...저, "
" 네? "
" ... "
" ... "
" 일처리 똑바로 안해요? "
" ... "
" 신입이면, 신입답게 빠릿빠릿하게 해야할 거 아니에요, 벌써 빠져가지고. "
" ... "
*
김석진 이 호구새끼, 분명 어제 과장님이 텃세를 부린다, 뭐다 하며 혼자 곱씹은 게 기억이 나는데, 내가 텃세를 부려 버렸다. 그것도 같은 신입사원끼리, 직급이 높으면 몰라. 김석진 이 호구새끼.
구내식당에 들어가 동료들과 밥을 먹는데, 저 멀리 혼자 앉아 밥을 꾸역꾸역 먹고있는 ㅇㅇ씨가 눈에 띄었다. 같이 먹고싶다, 저 앞에 앉아서 먹고싶다, 옆에 앉아서 먹여주고싶다.
" 그, ㅇㅇ씨는 친한 사람 없는거야? "
" 저도 잘... "
" 석진씨랑 얘기 좀 나누던데, 말 튼거야? "
" 아, 그냥 같은 부서니까···. "
" 좀 챙겨줘라, 가뜩이나 여자도 별로 없는데, 혼자 신입에, 얼마나 눈치보이겠어. "
" ...네. "
*
이게 웬 떡인가, 안그래도 친해지고 싶었는데, 구실이 생겼다. 난 그냥, 대리님이 친해지라고 하셔서, 그냥, 같은 부서니까, 혼자 여자니까, 같은 사원이니까,
" ...안 피곤해요? "
" ㅇ,아, 아니요, 안 피곤해요...! "
" 왜 그렇게 놀라요, 뭐 죄 지었어요? "
" 아니요, 그냥 갑자기 말 거셔서, 좀, 놀라서. "
" 왜 나는 말 걸면 안돼요? "
" 아니요, 저 싫어하시는 줄 알고···. 그래서 그냥 최대한 눈에 안 띄려고 했는데, 갑자기 말을 거셔서 좀 놀라서···. "
" 누가 ㅇㅇ씨 싫어한다고 했나, 전 그런 적 없는데요. "
" ㅇ,아니, 아까도 막 화내시고, 뭐라 하셔서 제가 진짜 맘에 안드셔서 그러시는 줄 알고... "
" ㅇㅇ씨, 부서에 친한사람 없어요? "
김석진 이 호구새끼. 부서에 여자라곤 ㅇㅇ씨 혼자인데, 친한 사람이 있을리가, 게다가 온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걸 질문이라고, 김석진 이 호구새끼.
" 없···는 거 같아요, 그냥, 다 저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 "
" 왜요. "
" ···사실 아까도 팀장님한테 불려가서 혼났어요, 신입사원인데 복사도 제대로 못해오고 인사도 제때제때 안하고, 혼났어요. 그냥, 다 제 잘못은 맞는데, 막 억울하고, 고등학생 때 버릇 아직도 못 고친 거 같고 그냥, 철 없는 어리광이죠, 뭐. "
" 나도 예전에 그랬어요. "
" ... "
" 화장실도 맘 편히 못가겠죠? 눈알 굴리느라 정신도 없고, 혹시 내가 캐치 못한 게 있으면 어쩌나, 혹여나 상사 인사를 무시했으면 어쩌고, 복사는 제대로 됐는지, 혹시 날 싫어하는 건 아닌지, 다 신경 쓰이죠? "
" ... "
" 그래도 모든 사람이 다 ㅇㅇ씨 싫어하는 건, 아닐 거 같은데. "
" ... "
" 난 ㅇㅇ씨 좋아하는데, 왜그리 부정적으로 생각해요. "
*
요즘 무슨 바람이 분건지, 새끼들이 틈만 났다하면 여자얘기다. 전정국은 말 안해도 알겠고, 윤기형은 요즘 입가에 웃음이 끊이질 않고, 김남준은 그냥 재수없고, 김태형은 뭐 청순한 여자로 이상형이 바뀌었다느니, 박지민은 자길 쫓아다니는 여자가 싫단다, 배부른 새끼. 석진이형은 같은 부서 여자한테 빠졌단다, 시발.
침대에 누워 가만히 생각하다, 문득 ㅇㅇㅇ가 떠올랐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지금 내 꼴을 보니 대충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 그 애는 나만큼 나를 생각하고 있을지, 나를 금방 잊고 다른 남자와 금방 놀아난 건 아닌지, 날 기억이나 할는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 문득 새벽감성이 물밀듯 밀려와 졸업앨범을 들춰보았다.
어느 때와 같이 ㅇㅇㅇ은, 졸업앨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어제 ㅇㅇㅇ과 함께 하교를 한 이후로 그 어떤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도, 정말 말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분명 어제까진 같이 얘기도 하고 놀기도 했다, 그리고 하교도 같이 했다. 지금 내 옆에서 몸을 바깥쪽으로 아예 틀고 앉아 필기를 하는 ㅇㅇㅇ, 얘랑 같이 하교도 했는데.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온 걸까,
" ... "
갑자기 나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얘가 뭐라고, 이젠 아예 책상도 살짝 띄워앉은 ㅇㅇㅇ이 뭐 그리 신경이 쓰인다고, 내가 뭐가 아쉬워서 필기도 하나도 하지못한 채로 걱정을 하고있냐는 말이다, 그니까 지금 내 심정은,
ㅇㅇㅇ이랑 얘기 하고싶다, 필기한 것 좀 보여달라고 하고싶다, 밥 같이 먹자고 하고싶다, 오늘도 집 같이 가자고 하고싶다, 옆으로 좀 오라고 하고싶다.
*
시간이 많이 흘러 어느새 또 야자시간이 되었다. 어느새 붙어있는 책상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때 쯤, 이젠 아예 고개를 숙이고 몸을 옆으로 틀어앉은 ㅇㅇㅇ을 보고,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지가 뭐라고, 같이 가자고 한 것도 지였으면서, 뭐 얼마나 지났다고 내가 질린건가, 뭐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질릴 게 뭐가있나, 아니면 몸이 아픈건가, 갑자기 또 ㅇㅇㅇ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정호석 이 호구새끼,
그 순간 담임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 ㅇㅇㅇ, 고개 들어. "
" ... "
" ...ㅇㅇㅇ. "
" ... "
" ...이 종이들은 다 뭐야, 컨닝페이퍼지? "
" ... "
" ...이건 시간표에, 이건 가정통신문, 이건 단어장에, 돼지우리가 따로 없네, 따로 없어, 이건 또 뭐야. "
" ... "
" ... "
" ... "
" ...정호석. "
" 네? "
" ...너 이번교시 끝나고 나 좀 보자. "
*
담임이 나가고 난 뒤 시선이 모두 내게 집중되었다.
친구들은 이게 뭔 일 이냐고, 갑자기 널 왜 부르냐고, 그걸 내가 알면 지금 이렇게 벙 쪄있겠냐고, 참 모자란 새끼들이다. 어느새 야자시간이 끝났고, 무언가를 찾는듯한 ㅇㅇㅇ를 뒤로 한 채로 걱정 반, 두려움 반, 교무실로 향했다.
*
지금 이 기분을 뭐라고 형용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10년 묵은 체증이 다 풀린 기분이다, 교무실에 다녀와 다시 교실에 들어왔을 때, 사색이 되어 무언가를 열심히 찾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다시 책상을 띄우고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뭐, 조금 귀엽긴 했다.
이 망글은 뭐죠,, 연재텀이 너무 길어진 것 같아요... 그래도 꾸준히 댓글 달아주시고 읽어주시는 분들 덕분에 글쓸 때 힘이 나네요...! 댓글을 보다보면 말투가 비슷하신 분들이 계셔서 알아볼 것 같아요 ㅋㅋ.. 항상 감사합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