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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박 민매니저와의 동거
W. 뮤뮤
" 하, 지금 그래서 나보고 감시를 당하라 이건가? "
언제나 그랬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나를 보며 환호했고, 내가 그들을 어떻게 대하든 나에게 굽신거리기만 했다. 심지어 소속사 대표 조차도 말이다. 푹신한 쿠션감이 마음에 드는 까만 쇼파에 편하게 몸을 기대고 힐을 신은 두 다리를 건방지게 꼬은 자세로 말했다. 나의 앙칼진 목소리와 잡아먹을 듯한 눈빛에 김대표가 움찔하는 것이 보인다. 그는 기대고 있던 몸을 바짝 세우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어렵게 말을 이었다.
" 여주야, 이게 다 너를 위한 일이야 "
" 하아..김대표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내가 미간을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긴 머리를 배배꼬며 말하자 김대표는 당황한 티가 역력한 어조로 답했다.
" 그...요즘 인터넷 안하니? "
" 응. 김대표가 하지말라며. 그래서 SNS도 안하는 걸? "
" 하.., 그니까 요즘 너에 대한 소문이.. "
" 소문? "
대체 무슨 소문? 연기자든 아이돌이든, 유명인에게 특히나 민감한 단어인 `소문`이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뱉어지자마자 나의 얼굴이 팍 구겨져버렸다. 김대표는 이내 식은 땀 까지 흘리는 듯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체크무늬 손수건 하나를 꺼내들었다.
" 그러니까,.여주 너 이미지가 워낙 천사 같고, 순수하고 하다보니 그런 소문도 도는 거 같은데.. "
" 아, 그러니까 무슨 소문! 답답하게 굴지말고 빨리 말이나 하란 말이야. "
내가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빽 지르는데 마침 타이밍 좋게 누군가 문 밖에서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시 일으켰던 몸을 다시 쇼파에 기대어 앉았고 김대표는 목을 가다듬더니 간사함은 어디 갔는지 찾아 볼 수 없는, 다시 품위를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 들어오시죠. "
김대표의 말에 곧 끼익하는 마찰음도 없이 부드럽게 문이 열렸고 형광등 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들어왔다. 옆구리와 팔 사이에 하얀 노트북 하나를 끼고 온 남자는 거리낌없이 나의 맞은편에 앉았고 김대표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조금은 차가워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짧게 스캔하던 남자는 옅게 미소를 띄운 채 김대표에게 말했다.
" 갑작스럽게 연락을 주셔서 놀랐어요. 민윤기라고 합니다. "
" 그런 연락에도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잘부탁 드립니다. 여기는 김여주., "
" 아시겠지만 김여주라고 해요. "
김대표가 나를 소개하기도 전에 나는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말했다. 짧막한 인사와 함께 손을 내밀자 자신을 민윤기라고 소개한 남자가 다시 차갑게 변해버린 표정으로 나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잡은 손을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며 내게 말했다.
" 아, 들어본 이름 같기는 하네요. "
뭐? 들어는 본거 같다고?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내가 어이없다는 듯 멍하니 자신을 보고만 있자 민윤기는 잡고있던 손을 놓으며 팔장을 꼈다. 나는 머쓱해진 손을 제자리에 두며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남자를 관찰했다. 대체 이 남자 뭐하는 사람이야? 나에게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않았다. 나는 분노와 호기심이 섞인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 들어보셨다니 다행이네요. 저는 배우겸, 가수에요. 그쪽은..? "
조금은 살벌해진 분위기에 김사장은 민윤기와 나 사이에서 안절부절 하지 못했고 그에 반해 과할 정도로 평온해 보이는 민윤기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 글쎄요. 뭐, 연예 기획사의 잡다한 일을 맡고 있죠. 하지만 지금 부터는 적어도 매니저라는 말이 어울리겠네요. "
" 매니..저..? "
외모적인 것으로 보나 말투나 제스쳐 같은 분위기로 보나, 민윤기는 매니저라는 직업과 굉장히 어울리지 않다 못해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민윤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확인을 시켜주었다. 그때 우리 둘 사이에 끼지 못하고 있던 김사장이 말했다.
" 우리 여주한테 아무나 붙일 수는 없잖아. 연예 기획에 있어서 유능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분이.. "
" 그럼, 아까 숙소에서 같이 생활하라던 매니저가 이 사람이야!? "
" 이 사람이라니..여주야, 일단 말을 좀 듣고.. "
" 김사장 지금 미쳤어? 아무리 능력있고 대단하다해도 이 사람은 남자라고! "
안그래도 좋지 못한 성격에 이런 말 까지 들으니 더이상 참지 못한 내가 쇼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민윤기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나를 올려보았다. 그냥 나가버릴 생각으로 몸을 트는데 민윤기의 말 한마디가 그런 나를 잡아 세웠다.
" 여주씨 프로 맞죠? "
" 뭐라구요? "
" 여자, 남자 다 따져가면서 일은 언제해요? "
평소 같으면 소리를 지르고 욕짓거리를 뱉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남자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민윤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까 들고온 노트북을 키며 내게 말했다.
" 요즘 인터넷에 어떤 찌라시가 돌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
" ... "
" 뭐해요, 어서 앉지않고. 계속 서있을거에요? "
민윤기의 말에 나는 못 이기는 척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해. 내가 왜 이 남자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하지? 내가 괘씸하다는 듯 민윤기를 노려보는데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고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평소에 상대방과 눈을 맞추며 말하는 버릇이 있던 나였지만, 그와는 오랫동안 눈을 맞추는 것이 힘들어 먼저 눈을 피해버렸다. 그와 달리 민윤기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내게 말했다.
" 여주씨 동료 후배들 괴롭혀요? "
" ..뭐라구요? "
" 아니면 스케줄 마중나오는 팬들 무시하고, 받은 편지들은 읽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나? "
"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구요! "
내 성격이 아무리 더럽다지만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조금 쌀쌀맞아 보이는 행동과 버릇없어 보이는 말투는 인정하지만, 누군가를 괴롭히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태도는 보인적도,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얼굴까지 붉히며 발끈하자 민윤기는 어깨를 으쓱여보이며 말했다.
" 이게 요즘 떠도는 여주씨 찌라시에요. "
" ... "
" 어쩌다 이런 말이 나온건지는 저야 잘모르겠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정말 이런 이미지로 굳어질 수 있어요. 그래도 좋아요? "
그래도 좋냐고? 물어볼 걸 묻던가, 좀! 마음 같아서는 있는대로 성질을 내고 싶었지만, 나는 나답지않은 순종적은 태도로 그저 좌우로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김사장은 이런 우리 둘을 미묘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민윤기는 그럼 됐다는 듯 탁 소리가 나게 노트북을 접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입가에는 특유의 미소를 지어보인 채로.
" 집은 은평구의 경비도 잘 되어있고 인적드문 오피스텔로 구해놨어요. "
" ...네? "
" 아마 곧 여주씨 짐 옮기러 사람들 갈거니까 알고있으라구요. "
" 저..집..이라뇨? "
내가 어벙벙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민윤기에게 묻자 그가 다시 한번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말했다.
" 우리 둘이 같이 살 집이요. "
" ... "
" 여주씨랑 나랑, 둘이 살 집 "
이것이 나 보다도 더 개같은 성격을 가진 민매니저와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