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셨습니까."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중전마마."
"저는 언제나 강녕하였지요. 오라버니를 이리 맞이할 줄은 상상치도 못하였는데-,"
눈을 감았다 떠보았다. 이것이 꿈은 아닐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기에. 내 앞에는 내가 그리도 잘 따르던, 어쩌면 나의 지아비가 되었을지도 몰랐을, 석진 오라버니가 서 계셨다. 언제나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주었고, 언제나 나를 친동생처럼 아끼어주던 석진 오라버니가 맞았다. 헌데 오늘은 무언가 조금 달랐다. 아니, 많이 달랐다. 오늘만큼은 석진 오라버니께 다정한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른손에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혈흔이 잔뜩 묻은 칼이 들려있었다. 항상 단정하였던 석진 오라버니의 옷에도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혈흔이 잔뜩 튀어져 있었다. 또한 항상 빛이 나는 듯 하였던 석진 오라버니의 신관에도,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송구하옵니다."
한동안 이어지던 긴 정적을 깬 것은 석진 오라버니셨다. 무엇이 송구스럽사옵니까. 무엇이 제게 그리도 송구스럽사옵니까. 여쭙고 싶었다.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지만, 석진 오라버니의 음성으로 듣고 싶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그저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이 뱉어내는 거짓부렁일 뿐이라고. 속에서부터 무언가 끓어올라왔다. 울컥이며 올라오는 그것을 참아내려 하니, 참아지지 못 한다는 듯 더욱 울컥이며 올라왔다.
"아니지요?"
"......"
"제가 들은 그 모든 것들이, 정녕 사실이 아닌 것이지요?"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 석진 오라버니의 입술이, 잔뜩 굳어버린 석진 오라버니의 말끔한 신관이, 처음으로 미웠다. 왜, 어찌하여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겝니까. 아니라고 말씀하여 주십시오, 내가 들은 그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하여 주십시오, 그것이 사실이라 할 지라도, 변명이라도 해주십시오, 오라버니의 말씀이라면 그 어떠한 말이라도 다 믿겠사옵니다. 저는, 저는 그럴 수 있사옵니다. 옴싹달싹도 하지 않는 석진 오라버니의 입술이 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 또한, 미웠다. 아니, 싫었다.
"...시간이 늦었사옵니다. 어서 나가실 체비를 하시지요."
또 다시 눈을 감았다 떠보았다. 이것이 정녕 꿈이 아닌 것일까. 아니, 꿈이어야 한다. 이것은 꿈이여아만 해. 아-,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내 눈 앞에는 아직도 석진 오라버니께서...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어찌, 어찌 변명조차도 하지 않으시는 겝니까. 어찌 저에게 그런 무책임한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어찌 저에게, 이 나라 왕의 부인이자, 이 나라의 어미인 저에게,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시는 겝니까. 차라리 오라버니께서 변명이라도 해주셨더라면. 이 모든 게 백성들을 위한 것이며, 이 나라를 위한 것이며, 차라리 나를 위한 것이라며 변명이라도 해주셨더라면.
오라버니를 따를 수 없다. 나는 나의 사람들을, 감히 버릴 수 없다. 감히, 떨쳐낼 수 없다. 그것이 나의 선택이었다. 당의 속에 숨겨진 은장도를 꾸욱 쥐었다. 한 번에, 한 번에 끝내야 한다. 잘 할 수 있을 것이야, 나는, 잘 해야만 해.
"돌아가시지요. 저는 이 곳에 남을 것입니다."
"마마!"
"돌아가십시오. 제가 드릴 말씀은 이 뿐입니다."
석진 오라버니의 날카로운 음성이 나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서늘한 것이 나의 손목을 파고들었다. 이를 악물었다. 그 어떠한 소리도 나의 입술에서 새어나가지 않도록. 너무나도 감사했다. 석진 오라버니와 내가 어둠 속에 있을 수 있어서.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를 꽤나 오래 전부터 연모하였사옵니다. 오라버니를 처음 보았던 그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쭈욱. 오라버니만을 연모해왔사옵니다. 허나, 허나 저는, 이제 오라버니를 연모할 수 없사옵니다. 이미 전하와 혼인을 하였고, 초야를 치뤘으며, 전하의 아이 또한 품었사옵니다. 저는, 저는 오라버니에게 어울리는 아녀자가 아니옵니다. 오라버니는 단정한 외모와, 성품과, 지식을 가지고 계시오니 저보다도 아리따우고, 인자한 아녀자를 부인으로 들이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미련 두지 마시옵고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뒤는 절대로 돌아보지 마십시오. 저의 끝을 절대로 눈에 담지 마십시오. 조선의 모든 악들은 제가 쓸어 가져가겠사오니, 이 나라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우소서. 이 나라 조선의 왕이 되어, 모든 백성들이 복을 누리고 살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어릴 적엔 석진 오라버니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그토록 싫었는데, 지금은 석진 오라버니의 뒷모습을 볼 수 있어 행복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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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에서 탄소들의 빈말을 듣고 겁 없이 와버렸슴다. 예쁘게 봐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