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호지 밖으로 언뜻 비추어지는 붉게 타오르는 불꽃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불꽃 사이를 걸어오는 사내들의 모습 또한 보였다. 그 중 우두머리에는 그가 서 있겠지. 내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김상궁과 궁녀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착잡함이 밀려왔다. 내 사람들이 저리도 벌벌 떨고 있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 나는 내 사람들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이구나.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이 나라의 중전이다. 그 누구도 나를 해할 수 없을 것이야. 벌벌 떨리는 두 주먹을 당의 속으로 숨겼다. 초점을 잡지 못해 이리저리 흔들리는 두 눈동자를 눈꺼풀을 내려 가렸다. 너무나도 떨려 딱딱 거리며 부딪히는 이들을 악물었다. 나는, 죽지 못한다. 내가 가진 것들을 지킬 것이다. 이 모든 걸 어떻게 가졌는데. 눈을 꾸욱 감고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궁녀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드디어 오셨구나.
방금 전까지 두려움에 떨던 나는 없었다. 대군이 나를 해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내가 너무나 잘 알아버렸기 때문이겠지. 생각이 바뀌었다. 더는, 이 세상을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사람들을 지키는 일이고, 대군을 지키는 일이겠지. 악착같이, 버러지같이 살아온 인생. 이제 미련 남기지 않고 끊어낼 때가 온 것일 뿐이라고, 내가 아프게 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 때가 온 것일 뿐이라고, 그 중의 한 명이 유양 대군이라고.
"대군."
"......"
"유양 대군."
"......"
"윤기야."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내가 이 자리에 앉은 후에는 단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는데. 가까스로 그의 이름을 내뱉었지만 그의 반응을 볼 용기는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한 없이 떨리고 있을 것임을 알았기에,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가는 나의 더럽디 더러운 마음들이 다시 비집고 올라와버릴까봐. 차마 그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였다. 대군, 유양 대군, 민윤기, 윤기야. 나는 당신을 더럽힌 사람입니다. 아니, 사람도 못 되지요. 짐승만도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대는 깨끗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더러운 것은 아래로 깨끗한 것은 위로 솟아야함이 옳은 것이옵니다. 우리는 그저 옳음을 따를 뿐이옵니다.
"그 칼을, 제게 겨누십시오."
"......"
"그리고 저를 찌르십시오."
그게 옳은 것이옵니다, 대군. 우리는 이제 새로운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옵니다. 대군은 이 나라의 왕의 자리로, 저는 지옥의 불구덩이로. 저는 남은 인생을 살아봤자 또 대군을 아프게 할 것이옵니다. 천한 것의 본성이 어디 가겠습니까. 또 다시 대군을 더럽히기 전에, 또 다시 대군을 고통스럽게 하기 전에 깔끔히 없어지는 것이 옳은 것이옵니다. 대군, 대군은 이 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끌 수 있을 것이옵니다. 대군은 언제나 그리 하셨듯이 눈과 귀를 열어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귀울이시고 사악한 이들의 말에는 눈과 귀를 닫으시면, 그러시면 되옵니다. 그리고 대군을 도운 공신들의 어여쁜 자녀들 중 가장 참한 아녀자를 고르시어 중전의 자리에 앉히시면 되는 것이옵니다.
대군, 유양 대군. 한때 당신과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하였사옵니다. 한때 당신의 이름을 불러드릴 수 있어 행복하였사옵니다. 민윤기, 윤기야. 너를 아프게 하여 미안하다. 그 어떠한 것들보다도 하얗던, 투명하던 너에게 나라는 오물을 엎어버려 미안하다. 윤기야, 윤기야. 나의 대군, 나의 윤기야. 부디 나를 잊어다오. 너에게 상처만 준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가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