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세계관 주의
w.모르
* * *
수현은 폐위 시켜 달라는 현우의 말에 멍해졌다.
현우는 초점없는 눈으로 바닥을 바라봤고.
한참 정적이 흐른 후, 수현이 먼저 입을 열였다.
"왜, 왜 그러느냐, 현우야. 현우야.
아까 나간 후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아니면 혹여 내가 싫어진것이냐? 그래, 그래. 차라리
싫어졌다고 말하거라. 제발, 제발. 현우야.
내 널 다시 사랑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 그건 가능하다."
쉴 틈 없이 내뱉은 수현의 떨리는 목소리에
현우는 참았던 눈물이 다시 쏟아지려는 것 같았다.
"나갔다 무슨 일을 당한것이냐."
그 말을 하고 숨을 들이킨 수현은 갑자기 현우의 어깨를 두손으로 꽈악 잡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현우와 시선을 맞추었다.
"삼촌을 만난 것이냐?"
화를 억누르고 억눌러서 짓이겨져 나온 목소리.
"왜! 왜 그러느냐! 말을 해보아라. 말을!"
수현은 현우에게 소리치며 어깨를 흔들어댔다.
현우의 입술이 붉어지고 더는 붉어질 수 없을정도로 꽉 깨물고 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에도 아랑곳 않고 말했다.
"네.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정한 일입니다.
제가 여자라고 속여야 하는것도 이제 지긋지긋하고,
이제 더이상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것 같습니다.
저를 현우라고 다정히 불러주고, 사랑해주는 그 사람을 사랑했지,
속 빈 껍데기 같이 이름만 불러주는 그대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라를 바꿔보겠다고 한 그 사내는 어디 간 것입니까.
왜,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그대는 누구길래!"
현우의 말에 수현은 팔에 힘이 풀렸다.
현우는 이번엔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수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던 처소에 수현이 말을 꺼냈다.
"내가 못됐었다. 내가 잔인했다. 내가, 내가 전부 잘못했다.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핑계로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 살았구나."
수현은 현우를 처음 만난 날, 첫눈에 반해버렸던 그 순간을,
기억 속 저 멀리 감춰져 있던 그 날을 기억해냈다.
말똥말똥 뜬 눈이 큼직하고 귀여웠던, 오물거리는 입이 귀여웠던,
웃음소리가 사랑스러웠던 현우를 사랑했던 자신을.
하지만 지금은?
날이 갈수록 말라가는 느낌. 더더욱 수척해지고,
입술은 메말라가고, 눈엔 눈물이 마를날이 없다.
남자이지만 여자인척 살아가려했던 지난 약 1년은,
그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현우에게, 정인에게 고통이었을 것이다.
"현우야, 현우야.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내 정인.
내 영원한 사랑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겠다.
지난 1년간 고통스러워한 너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
"만천하에 나의 황후가 여자가 아닌 남자인것을 밝혀야겠다."
현우는 그의 말에 그의 품을 끌어안고 소리내어 울어버렸다.
-
그 일은 그 다음날 오후 쯤,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왠일인지 수현과 현우의 예상과는 달리 그렇게 큰 파장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렴 뭐 어때."
"황후께선 그럼 자신의 아이도 아닌 아이를 데려다 키우고 있었다는 건가?"
"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어미가 죽었다는군. 그걸 가여워 해서 데려다 키우고 있대."
"황후께서 손수 옷을 지어다 입히셨다는군. 황녀가 된다지?"
"황녀라. 사실 추방감이겠지만 이 세상도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이미 이웃나라들은 많은 변화가 있었지. 우리 나라가 느린편이야."
큰 파장이 일어나지 않은 까닭은 상당히 개방적인 한 이웃 나라의 영향이 컸다.
그 나라는 동성애가 합법적이었고, 거리에서 스킨쉽은 자주 볼 수 있는 편이었다.
처음엔 사람들이 질색하였으나, 세월은 모든 사람의 생각을 점점 무뎌지게 만들었다.
"이 기회에 동성애를 합법으로 만들면 좋겠구만."
"사람들의 생각은 변화하고 빠른데 항상 법은 느리다니까. 하하하!"
-
어떤 야망은 원하지도 않는 곳에서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수현의 삼촌은 이런 반응은 꿈에도 몰랐는지 그저 멍하게 있었다.
그리고 수현이 작정하고 이렇게 만천하게 공표할 줄은 몰랐다.
"수현한테 시집가기 싫다니까요. 아버지."
그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왜 내가 못볼꼴 다 볼 사이인 조카한테 시집을 가요!
어릴때부터 같이 자라서 이젠 얼굴도 보기 싫다구요!
이 나라는 참 이상해. 근친혼은 허용하고선 동성애는 왜 불법이람.
그리고 이제 그만하세요 아버지! 고리타분해서 원."
투덜대며 사라지는 자신의 딸을 보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원대한 꿈을, 황실을 주무르겠다는 꿈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이야.
-
수현은 속으로 웃었다. 사실 근친혼이야 예전부터 있어서 만연하게 퍼져있는게
사실이지만, 이것도 이웃 나라 덕분에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고리타분한 그가 무너질것은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지만,
1년 사이에 많은 것이 변화한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에 대해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시찰은 나가보지도 않고 그저 가신들하고만 얘기했던 자신의 불찰이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
수현은 현우의 옆에 앉아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우릴 축복하는구나."
"수현."
"현우야, 날 많이 사랑해다오."
수현은 갈망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현우는 슬며시 웃음 지으며 수현의 코를 톡, 쳤다.
"네, 수현."
"마음이 한결 놓이는구나."
"저두요."
"아참, 그러고보니 그동안 황녀의 이름을 정하지 않았구나.
아버지가 얼른 정하라고 하더군. 자고로 아이의 이름은
많이 불러줄 사람이 지어야 한다면서 말이지."
"음,"
현우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우리 이름 중에 현이 공통으로 들어가니 현이 들어갔으면 좋겠구나."
넌지시 자신의 생각을 비춘 수현의 말에 현우가 웃었다.
"지혜롭게 살아라 하여 '지' 와 '현'을 붙여, 지현은 어떨까요?"
"하하. 그래, 그게 좋겠다."
하늘은 맑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처음 만난 그날 처럼 기분이 상쾌했고, 모든것이 싱그러웠다.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그 둘 사이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황녀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황녀는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곧게 자랐다.
이 세상에 대해 이름 그대로의 지혜를 가지고,
이 나라 최초의 여성 황제가 되었으며,
편견없이 만인을 사랑한 황녀는 후에 성녀라고도 불렸다.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였던 수현과 현우는
황녀에게 사랑을 주고, 후에 황녀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기 까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이웃 나라의 문물을 더욱 받아들였다.
또 화목하고 사이가 좋아 결혼한 자들의 본보기가 되었고,
최초로 동성애 혼인을 한 황제와 황후가 되었다.
그들 이야기는 여기서 완결입니다. 차후 외전은 없을 예정이고, 다른 장르로 써 볼 예정입니다. 커플링은 여전히 수현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완결 까지 봐주신 세모네모님, 김수현님, 엘모님 감사합니다. 봐주신 모든 분들도 감사합니다.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