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스며들다
w. Ciel
#02
지겹도록 쏟아내리던 장마도 지나가고, 내리쬐는 땡볕더위에 사람들이 지친다. 날카로운 콧날을 중심으로 균형있게 보기 좋은 우현의 얼굴에도 짜증스러움만 한가득 담겨 있다. 아이들에게 단 한번도 살갑게 대한 적이 없고, 뭐 하나 고운 말 고운 표정을 한 적이 없는 우현이지만, 늘 툴툴대면서도 일은 열심히 한다. 시키는 일만 해주리라, 첫 날의 그 다짐은 무너진지 오래. 씨팔저팔, 혼잣말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이제는 알아서 할일을 끝내놓고 비품실 구석에 숨어 놀기도 하는 우현이다. 하, 익숙해졌다니. 나 남우현이, 이런 허드렛일 따위에 익숙해졌다니 젠장.
달칵. 무언가가 바닥과 닿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현의 목을 타고 흘러내리던 땀방울이 공기와 만나 날아가버리는 시원함이 느껴진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졸고 있던 우현이 살짝 눈을 떠 초점을 맞춘다.
"어? 제가 깨웠습니까?"
"으음..?"
졸려.. 눈이 잘 떠지지 않아 흐릿한 시야 사이로 조물조물 달싹이는 입술이 번진다. 꼭 감았다, 다시 뜬다. 성규다.
"성규형..?"
"예?"
우현이 고개를 들고 마른 세수를 한다. 하품을 크게 한 번, 기지개도 크게 한 번. 으으, 짧게 신음하며 팔을 쭉 뻗자 우두둑 소리와 함께 엇나갔던 뼈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몸이 찌뿌둥하다. 비가 오려나. 허리를 톡톡 두드리며 우현이 성규를 바라본다.
"주성이 목욕했어, 오늘?"
"주성이, 목요일은, 목욕순서 1번입니다."
"아, 그랬지 참. 뭐야, 왜 왔어. 은주쌤이 나 찾아?"
"아닙니다. 선풍기, 가져왔습니다."
"뭐?"
그러고보니 끈적거리던 얼굴이며 팔이며, 뽀송뽀송해지는 느낌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흰 색 선풍기가 놓여져있다. 우현이 늘 비품실에서 쉬는 걸 아는 성규가, 몰래 가져온 듯 했다. 최근 후원자가 조금 줄어 재정이 어려워진 이곳에서 에어컨은 장식용이다. 몇 대 없는 선풍기로 여름을 나보려고 끙끙대는 마당에, 이걸 들고 와버리면 어쩌나, 싶다.
"비밀입니다."
멍하니 선풍기 날개만 바라보던 우현에게 성규가 말을 건다. 우현의 시선이 다시 성규에게로 꽂힌다.
"은주선생님 화나면 무섭습니다. 말하면 안됩니다."
"그걸 알면서 들고 왔냐?"
"우현이 땀 많이 납니다. 일해서 더우니까, 선풍기 필요합니다."
"그래그래, 잘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우현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길게 울린다. 이호원. 끝날 시간 전까지는 연락 안한다더니 갑자기 뭐야.
"왜."
[지금 데릴러 갈테니까 삼십분 이따가 내려와.]
"갑자기 왜."
[사장님 호출.]
우현의 표정이 굳는다. 스케줄 도중에는 절대, 그러니까 이것도 스케줄이라고 본다면 동우가 우현을 호출할 리가 없다. 우현을 이 시설로 몰아넣은 스캔들 때도, 사건이 터진 걸 스케줄 끝나고서야 알았다. 그러니까, 이건. 큰일이다. 그것도 엄청.
"뭔데. 말해, 지금."
[이따 얘기해. 운전 중이야.]
"씨발, 말하라고."
[후.. 정수빈이 또 사고 쳤어. 트위터에 글 올렸는데 타깃이 너라고 기사 뜨고 난리도 아니야, 지금.]
"뭐라고 씨부렸는데."
[나는 사랑이라고 믿었는데 그 사람에게 난 그저 단순한 장난감에 불과했다. 거대한 힘과 자본주의에서 그는 살아남았고, 나와 내 아이는 버려졌다.]
빠르게 굳어진 표정,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흩뜨려놓은 우현이 주먹으로 비품실 바닥을 내리쳤다. 하, 씨발 뭐야 이게. 휴대폰 너머의 호원과 우현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불편한 침묵을 가르고 성규의 손이 잔뜩 흐트러진 우현의 머리칼을 정리한다.
"꺼져."
차갑게 그의 손을 내친 우현이, 정적만큼이나 차가운 음성을 뱉었다.
"머리카락이 엉ㅁ..."
"꺼지라고 병신새끼야!!!! 대가리만 병신인 줄 알았는데 귀까지 병신이냐???"
베시시 웃을 때를 빼고는, 늘 표정없는 얼굴에 초점 잃은 눈동자. 그 무미건조한 얼굴에 상처가 새겨진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성규가 비품실 밖으로 나간다. 탁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 끄트머리를 바라보던 우현이, 동시에 한숨을 내뱉는다.
[기자들, 너한테 연락할 수도 있어. 내 전화빼고 아무것도 받지마.]
대답없는 우현에 호원이 짧게 한숨을 쉬고 전화가 끊어졌다.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고, 비품실 벽에 기댄다. 인생 좆같고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