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의 오른손은 멈추지 않았다. 왼손은 그저 오른손을 지켜볼 뿐.
지민은 초등학교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민의 어머니는 불행한 피아니스트였다. 한창 피아니스트란 꽃을 피우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찾아 온 오른손의 마비가 폭풍이 몰아치듯 순식간에 어머니의 몸을 집어 삼켰고 결국 지민의 어머니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정신적으로 힘들어하셨는지 지민의 어머니는 항상 휠체어에 타고 다녔다. 그 밑에서 지민은 어머니의 꿈을 위해 피아노와 친해져야만 했다.
항상 지민은 학교가 끝나면 검은 차에 몸을 타야 했다. 떡볶이도 먹고 싶고, 친한 친구의 생일파티에도 가고 싶었지만 안 됐다. 그럴 수 없었다. 지민의 뒤엔 항상 어머니가 있었으니까. 검은 차에 내리는 지민을 피아노가 반겼다. 간혹 좋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싫었다. 괜히 미웠다. 그날은 정말 피아노가 싫었다.
쿵, 쿵, 쿵, 지민은 순간 자신이 피아노 앞에 서 있는 줄 알았다. 귓속에서는 메트로놈의 박자 맞추는 소리가 들렸고 심장도 박자에 따라 움직였다. 그 소리는 그 아이 앞에 서야 들렸다. 점점 빨라지는 박자 속에서 지민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며칠 후, 지민은 아이가 전학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아이는 처음으로 지민에게 말을 걸었다.
“너 피아노 배운다며?”
“잘 치니? 나 피아노 완전 좋아하는데!”
“내일 나 너 피아노 치는 거 보러 가도 돼…?”
전학 가기 이틀 전, 지민의 피아노 소리가 듣고 싶다며 무작정 찾아온 아이는 지민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약속까지 잡았다. 그럼 내일 학교 끝나고 보자-!
지민의 심장은 멋대로 날뛰었고 그런 심장에 대고 지민은 말했다. 조용히 해, 천천히, 느리게, 여기선 아다지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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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차에 지민이 올라타고 뒤이어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아이도 같이 탔다. 혼자가 아닌 둘이 타는 것을 보고 운전사는 깜짝 놀라(그래도 검은 선글라스에 가려져 지민의 눈엔 차가워 보였지만) 지민을 쳐다보자 지민은 ‘쉿- 아저씨, 엄마한테는 비밀이에요.’ 라고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했다. 조용했던 차 안이 사근사근 활기차지고 있었다. 아이와 지민의 대화 소리 때문인지, 수줍게 웃는 아이를 보며 나온 지민의 웃음소리 때문인지.
지민과 아이를 태운 검은 차는 숨겨져 있던 집 앞에 멈췄고 지민은 안으로 들어가 피아노를 가리켜 아이에게 소개해주었다.
“인사해, 내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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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은 건반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얹었고 아이는 맑은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이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고 했다. TV에서 봤는데 어느 여자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았다고 했다. 그걸 보고 엄마께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지만 안 된다며 혼이 났었다고 했다. 지민은 그런 아이에게 더욱 보여주고 싶었다. 마주하고 있는 이 피아노에도 보여주고 싶었다. 너만이 내 친구가 아니야, 난 이제 다른 친구가 생겼어. 지민은 메트로놈을 키고 가만히 있었다. 귀로 박자를 맞추고, 심장으로 박자를 맞추고, 그리고 건반 위에 다시 손을 얹고 연주를 시작했다.
지민의 연주는 막힘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민의 용기에 감동한 피아노 친구가 주는 선물인지, 자신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훌륭한 소리들이 나오고 있었다. 당연히 아이의 얼굴은 감탄한 표정이었고 슬쩍 본 지민에게도 작은 미소가 퍼졌다. 하지만 그건 얼마 가지 못 했다.
갑자기 아이의 표정은 굳어 갔고 시선은 지민의 왼손을 향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다. 지민의 오른손은 춤을 추듯 현란하게 움직이지만, 왼손은 아니었다. 당황한 지민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는 듯했지만 지민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검은 선글라스의 아저씨도, 밝게 웃고 있던 아이도. 지민과 피아노뿐이었다.
지민의 곁엔 영원히 떠날 수 없는 피아노,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는 메트로놈, 마지막 춤을 추고 있는 오른손,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왼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