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나를 제외한 나머지 조원들은 답이 없다던 민윤기의 말대로, 조별과제를 위해 만든 단체카톡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결국 일찌감치 포기하고 둘이 만나서 진행하자던 민윤기의 의견에 동의한 것까지가 어제의 일이다. 꼬박꼬박 '유정씨'하며 존대를 붙여오던 민윤기를 가까스로 말려서 말을 놓게 한 것도 어제이고. 소문처럼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어제 만날 장소를 정하던 도중, 서로의 집이 생각보다 가까워 만나기로한 중간지점 쯤의 프랜차이즈 카페는 밖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크고 깔끔했다. 이런 데서 사람 찾는 건 좀 힘들겠는데- 하며 걱정어린 시선을 돌린 바로 그 때였다. 카페의 창가자리에 위치한 소파에 몸을 폭 파묻고 있는 검정색 생명체를 발견했다. 저렇게 후드티에 푹 뒤덮힌 사람을 못 본 척 하는게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더불어서, 살짝 삐져나온 레몬빛 머리카락도.
" 선배, 저 왔어요. "
" 오셨네요? "
" 어제 말 놓기로 하셨잖아요. 안 놓으시면 제가 불편해요. "
" 아, 말 놓는게 입에 잘 안 붙네. 미안. "
뭐 미안할 것 까지야 있나. 후드에 푹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는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니, 꼭 무슨 할 말이 있어 안달이 난 사람같았다. 후드소매가 가열차게 꼬물거리는 걸로 봐선 손가락들은 이미 난리가 난 것 같았고.
" 혹시 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 "
" 아냐, 별 거 아니니까 이제 과제 어떻게 할지 대충 방향부터 잡을까? "
" 아닌 게 아닌거같은데. 말 놓는거 싫으시면 다시 존대 하셔도 돼요. 편하신대로 하세요. "
" 저, 그러면.. 부담가지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줘. 아니다 싶으면 그래도 돼. "
후드에 파묻힌 레몬빛의 머리속에선 이미 거절당한 상황을 생각 중인지 세모난 모양의 눈이 잔뜩 침울해졌다. 뭐야, 고백이라도 하는 건가? 난 저 선배한테 관심이 없는데. 물론 꽤 귀엽긴하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에 고백 받는건 좀.. 아 어떡해 저 선배 상처받겠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몇초간의 정적 동안 빠르게 생각을 부풀려나가던 나를 바라보던 민윤기는 결심했다는 듯이 눈썹뼈에 힘을 꽉, 주고 입을 열었다. 그에 맞게 두 눈썹도 꿈틀, 했고.
" .. 유정아, 너있잖아. "
" .. 네. 말씀하세요. "
" 우리, 그러니까.. 아니 진짜 싫으면 싫다고 해야된다? "
" 대체 뭐길래- "
" .. 우리, "
" ....네. "
" 티라미수 시킬래? "
" 에? "
아. 혼자 오버했네. 솔직히 민윤기가 두번째로 뜸을 들일땐 이미 ' 오빠, 저희는 아직 안지 일주일도 안됐잖아요. ' 라는 멘트까지 준비했었다. 그런데 나온 말은 고작 티라미수 시킬래?라니. 에? 라고 멍청하게 반문하는 나의 목소리 이후 이어지지 않은 대답을 보며 또 눈꼬리가 쳐지는 민윤기였다. 아니, 이사람아. 그 이야기를 왜 그렇게 심각하게 하냐고.
" 싫어하는구나.. 하긴 우리 누나도 그거 질색을 하더라. "
" 아뇨 저 티라미수 완전 좋아해요. 그런데 너무 심각해서 저는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잖아요. "
" 아.. 그런거 전혀 아니야. "
" 저 가리는 거 없어요, 막 시키셔도 돼요. "
진짜? 다행이다. 아까는 축 쳐졌었던 눈꼬리가 반절로 확 접혔다. 살짝 벗겨진 후드 모자 사이로 나타난 레몬빛 머리카락이 마치 민윤기의 마음을 대변하는 새싹같았다. 포롱포롱- 뭐 그런 느낌.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시선을 의식한건지 큼큼, 몇 번 헛기침을 한 민윤기는 그럼 잠시마안, 하며 후드를 고쳐쓰곤 카운터로 향했다. 티라미수와 여러가지 케잌들이 진열된 것을 행복해 죽을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민윤기는 이내 그토록 원하던 티라미수와 함께 돌아왔다. 나느은- 단게 들어가야 머리가 돌아가더라고. 작업 할 때도 그렇고.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작업은 무슨 작업인데요? ..말 실수야. 작업이 아니라 공부. 아아, 저도 그래요.
간간히 이어지던 사적인 이야기를 배제하고, 완전하게 과제에 관련 된 이야기가 주어지자 민윤기는 또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저 선배 군필이라던데, 진짜 군대 갔다온 거 맞을까..? 민윤기 고백설에 이어 미필설까지 생각을 뻗치던 나를 바라보며 민윤기는 또 다시 눈썹뼈에 힘을 줬다. 그럼 또, 아까처럼 눈썹도 같이. 꿈틀.
"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부탁이 뭔데요? "
" ..어떻게 알았어? 나 부탁할 거. "
" 그렇게 비장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데 어떻게 몰라요. 말 해 보세요. "
" 음, 내가 자료조사랑 피피티는 나혼자 다 만들 수 있어. 그런데 발표는.. 마이너스 일 것 같다."
" 선배 암기같은 거에 약한 편이세요? "
" 그런 것 보다는, 내가 낯을 좀 가려. 시선집중 되는 것도.. 안 좋아하고. "
" 저는 괜찮아요. 저 사실 피피티 잘 못 해서 걱정이었거든요. "
" 와. 진짜 고마워. 사실 이거부터 말 하려고 했는데.. 티라미수 때문에 까먹어서. "
말을 마친 후, 민윤기는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이 샐쭉 웃어보였다. 살짝 햄스터와 닮은 것 같은 입술도 보기좋게 호선을 그렸고. 이내 민윤기는 자료조사에 몰두했다. 그 덕에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또 잡생각에 빨려 들어가버렸고. 민윤기라는 사람은 따지고보면 꽤 순하고 얌전한 사람인데 왜 그런 소문을 몰고다니는 지 보면 볼 수록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매번 고수하는 검정색 후드티 차림도.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건가?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머리를 짧게 흔들었다. 훠이훠이, 잡생각아- 날아가라-. 그런 나를 흘끗 쳐다보던 민윤기는 이만 집에 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어차피 자료조사는 거의 다 했어. 피피티는 완성되면 메일로 보내줄게. 선배가 고생하시네요. 죄송해요. 에이- 고생은 네가 하는거고. 과제에 대한 틀을 어느정도 잡고 난 후라 더 이상의 화젯거리는 없었다. 민윤기와 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하게 서먹한 공기는 도시의 소음들에도 끄떡없었고. 그렇게 말 없이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덧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 카페에서 정류장까지 가까운 줄 알았더니, 꽤 머네요. "
" 그래? 난 생각보다 거리가 짧아서, ..아쉬웠는데. "
아쉬울 게 뭐가 있었지? 순전히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해서 아하하, 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그리고선 또다시, 정적. 아까 카페에선 꽤 편했었는데. 그런 생각들을 하며 옆자리의 민윤기를 흘끔 바라보자 무릎 위에 한 손을 올리고선 피아노를 치는 것 처럼 톡톡, 치고있었다. 뭐하는 거지, 리듬타는 건가? 리듬을 타는 사람이라기에는 손가락이 향하는 위치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게임 단축키를 누르는 듯한 느낌. 아, 궁금하다. 게다가 뭘 그리 몰두한 건지 이제는 뚫어져라 쳐다보는 내 시선은 느끼지도 못한 체 행동에 열중이었다. 결국 솟아오르는 궁금증을 참다못한 내가 입을 열어서 물어보려던 순간,
" 최유정, 버스는 너 혼자 타야겠다. "
" 선배? "
하고 일어나서는 택시를 잡고 휑 하니 떠나버렸다. 방금 이거 뭐지..? 아까 자기도 분명히 버스 탄다고 했었는데? 것보다 저렇게 그냥 가버리는 게 어딨어. 뭔가, 형용할 수 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이중인격이야 뭐야. 진짜 소문이 맞았던건가? 말투도 딱딱해져선, 오늘까지 내가 봐 온 민윤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갑자기 머릿속이 뒤엉킨 느낌이었다. 아, 그나저나 버스는 또 왜 이렇게 안 오는건ㄷ…
" 아저씨! 저! 탈, 탈건데요! "
" 아저씨! 아저씨이이... 하. "
오늘은 끝이 영 아닌 모양이다. 씨이, 되는 게 없어. 안 그래도 배차간격이 15분으로 꽤 긴 버스였다. 그냥 전정국한테 데리러 오라고 할까? 분명 욕은 먹겠지만 툴툴거리면서도 나올 녀석 임에 분명했다. 정국에게 마카롱을 사 두었으니 데리러 오라는 카톡을 전송한 후에, 조금 기다리니 곧 이리로 오겠다는 정국의 답장이 도착했다. 안 그렇게 생겨선 어릴 적 부터 단 것만 보면 정신을 못 차렸었다. 정국이 중학교 때 아메리카노를 마신다면서 허세를 부리다, 쓴 맛을 참지 못해 분수쇼를 열었던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면허도 따서 나를 데리러 오네….
버스 정류장에 우두커니 앉아서 추억팔이를 하다보니 어느새 익숙한 정국의 차체가 보였다. 팔을 흔들고선 익숙하게 차에 타니 마카롱을 찾는 두 눈이 분주했다. 야, 마카롱은? 당연히 구라지. 너 진짜 죽고싶냐? 아니. 그나저나 너 민윤기 선배 알아? 마지막 말을 뱉자마자 전정국의 큰 눈이 더 커졌다.
" 민윤기!? "
안녕하세요, J.ae 입니다!
1편에 댓글 달아주신 독자분들 진짜 너무 감사드려요ㅠㅠ 진짜 두근두근거려서 잠도 좀 설쳤습니당..ㅎㅎ 오늘은 bgm을 넣었는데, 어울릴런지 모르겠어요ㅠㅠ 최대한 귀여운 느낌으로 골라봤는데 글과 어울렸으면 하네요! 그리고 저는 어제 업로드 된 윤기 셀카보고 엄청 오열을 했습니다ㅠㅠ 입술이 정말 햄스터같지않나요? 사담은 이쯤하고, 제가 주로 글을 쓸때 빼고는 모바일로 인티를 하는지라, 자간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안 썼는데, 컴퓨터로 보니 조금 빽빽한 감이 없지 않아 있더라구요. 그래서 저번보다는 좀 더 간격을 넓혔는데 어떨 지 모르겠네요! 아직 많이 서툴어요ㅠ 조언해주시면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아, 그리고 정국이와는 느끼셨겠지만 러브라인 하나도 없는! 저스트 프렌드입니다ㅎㅎ 마지막으로 신알신 해주신 분들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