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부탁해!
下: 보통연애
징징. 지이잉. 징. 징징. 징징징.
베개 밑에 깔린 핸드폰이 계속 진동했다.
“아. 전화 좀 받지?”
박지민의 말에 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박지민이 베개로 날 내리쳤다.
“내가 불편하거든?”
“전화 아니에요. 그, 문자에요. 문자.”
“문자면 폰이라도 꺼놓고 있지? 아니면 읽기라도 하던가.”
“……안 읽어도 돼요.”
“나 같으면 궁금해서 읽기라도 하겠다.”
그렇게 말한 박지민이 베개를 내려놨다. 궁금하긴 하지만, 읽으면 안 돼요. 읽으면…… 큰일 나버리니까.
“너 되게 수상해.”
“뭐가요.”
“요 며칠 집에도 안 들어가고 계속 내 침대에만 붙어 있잖아.”
“아. 그러게요. 고마워요.”
“덕분에 난 바닥에서 자고. 내가 아끼던 티셔츠도 니가 입고.”
“……미안요.”
“미안하면 집에 좀 가라.”
미안해도 그건 안 돼요. 내 말에 박지민이 고개를 숙이고 혀를 끌끌 찼다. 이유라도 말해주던가. 그 말에 안 된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된다. 이유도 말하면 안 되고,
징징. 징징징.
문자도 확인하면 안 된다.
* * *
“형. 어디예요?”
핸드폰을 며칠 내내 거의 안 보듯이 했다. 그냥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액정이 나갈 대로 나가버린 핸드폰이라 별 쓸모도 없긴 했다. 이대로 그냥 확 잃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김태형한테서 오는 문자를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텐데.
-나 지금 가고 있는데.
“얼른……”
“통화 중이었네. 진짜.”
뒤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내 몸이 굳었다. 김태형 목소리다. 당황해서 내가 멍하니 허공만 바라봤다.
“정구기.”
“……”
-여보세요? 야. 점심 뭐 먹을래.
“정국아.”
또박또박 해진 발음에 김태형이 장난치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다. 내가 전화를 내려놨다. 전화를 끊고 나서 고개를 돌려 김태형을 바라봤다. 며칠 만에 마주친 얼굴은,
“오랜만이네.”
“……”
“목소리 좀 들려주지.”
“……아.”
“목소리를 잃은 인어 공주야?”
여전히 잘생겼다. 분명 말투는 조곤조곤했지만, 그런 말투로 내뱉는 말은 비꼬는 듯한 말이었다.
“……그게. 같은 조 선배랑,”
“변명하는 거야?”
“……같은 조 선배랑 과제. 어. 같은 과라서. 어. 그게, 네. 그래서…… 며칠.”
“아. 방금 전화한 사람도 그 사람이고?”
“……네.”
“같은 과. 같은 조? 알았어.”
그렇게 말한 김태형이 돌아섰다. 한숨 돌렸다. 잘생긴 얼굴을 봐서 그런지 심장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너무 놀라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잘생겨서 그런가. 그 뒷모습을 보는데도 여전히 심장이 쿵쾅거렸다. 꼭 간식을 훔치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아. 맞다.”
“어이. 전정국이.”
왼쪽에서는 내게 손을 흔드는 박지민이, 그리고 오른쪽에서는 방금 돌아선 김태형이 나를 불렀다.
“……”
“아는 사람?”
박지민이 김태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네. 그 대답에 박지민이 김태형에게 말했다.
“그쪽 먼저 말하세요.”
“그럼 먼저 할게. 밥같이 먹자.”
원래 박지민과 같이 먹기로 한 건데. 김태형의 말에 내가 그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한참 정적이 흘렀다.
“싫어? 싫으면 말아. 너 그 조별 과제 언제 끝나는지, 참 궁금하네.”
여전히 가시가 박힌 말이다. 박지민이 돌아서는 김태형을 붙잡았다.
“뭐야.”
“같이 먹어요. 밥. 저 얘랑 같이 조별 과제 해서 점심같이 먹기로 했는데, 그쪽도 같이 먹으면 딱이겠네.”
“……”
“난 상관없는데, 그럼 그렇게 한다? 정국아. 같이 먹는다?”
김태형이 내 앞에서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 말에 김태형이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완전 보고싶었어.”
* * *
혹시 박지민에게 이상한 관계라는 걸. 아니 이상한 관계는 아니고, 어정쩡한, 애매한 관계라는 걸 들키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조마조마하는 날 느낀 건지, 김태형은 더 이상 티를 내지 않았다. 아직 확실한 그런 사이는 아닌데. 그리고, 난…….
“맛있다. 이거. 학식 잘 안 먹는데. 먹어야겠네.”
“어. 우리 학교에요?”
“응.”
“어디 과에요?”
박지민이 김태형에게 물었다. 김태형이 돈가스를 입에 가득 집어넣으며 우물거렸다.
“화학공학.”
“아. 어쩐지 마주치기가 힘들더라.”
“그쪽은?”
“신방과요.”
…….
한참 또 정적이 흘렀다. 박지민한테 김태형과 내 관계를 들키지 않은 건 다행인데, 다른 걸 들켜버렸다. 아까 분명 조별 과제를 하는 같은 과라고 얘기를 했는데. 나는 경영이고 박지민은 신방과고.
빼도 박도 못하게 거짓말을 한 것을 들켜버렸다.
“먼저 일어납니다. 전.”
“……”
“어. 왜 그렇게 빨리 먹어요? 아직 다 먹지도 않았잖아요.”
“그냥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리고, 정국아.”
늘 부르는 정구가, 정구기, 꾸가. 하는 발음이 아닌 너무나 정확한 발음. 벌써 두 번째다.
“언제부터 신방과랑 경영과가 같은 과였는지 난 잘 모르겠네.”
“……”
“빠른 시일 내에 얼굴 볼일 또 있었으면 좋겠다.”
그 말은 즉, 집으로 얼른 기어들어오라는 말이다. 김태형이 얄쌍한 다리를 휘적휘적 내저으며 식당을 빠져나갔다.
“무슨 소리야? 신방이랑 경영이랑 합친대? 왜 난 몰랐지.”
“……그런 거 아니에요.”
“뭐야. 그럼 저 사람은 무슨 소리 하는 거래.”
여전히 박지민은 눈치가 없다. 다행이라고 느껴야 하겠지. 아. 어떡해야 돼. 진짜.
* * *
딱 마지막으로 오늘 하루 박지민네 집에서 고민을 하려 했다. 과제를 핑계로. 그러나 며칠 내내 그 집에 붙어있다 보니, 과제는 이미 끝낸지 오래였다.
‘야. 진짜 재워주고 싶은데. 오늘 하필 엄마가 올라와서.’
박지민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발걸음을 집 쪽으로 돌렸다. 김태형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쾅거렸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아. 그냥 노숙할까. 날도 별로 안 추운데.
“어라.”
“……”
“정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발음이다. 김태형이었다. 오늘로 두 번째 보는 얼굴. 가로등 밑에서 비닐봉지를 든 김태형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말 잘 알아들었나 보네?”
“……어디 갔다 와요?”
“너야말로.”
“……나 진짜 과제하느라.”
“너 좀 실망이야.”
김태형이 그렇게 말하며 내 손에 봉투를 쥐여줬다. 이거 좀 무겁다. 니가 들어줘. 너무나 당연하게 말한 김태형에 내가 그 봉투를 꽉 쥐었다.
“……”
“똑똑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멍청해.”
“……그게요.”
“거짓말도 똑똑해야 친다던데, 맞는 말이었네.”
김태형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할 거리가 없어서 내가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는 너 엄청 좋아해서 연애하자고 한 줄 알아?”
그 말에 내가 당황스러웠다. 걸음을 멈추고 김태형을 쳐다봤다. 작은 뒤통수가 좌우로 박자를 타듯 흔들린다.
“원래 연애는 그런 거야. 자기도 모르게 하다 보면 감정이 생기는 거야.”
“……”
“연애 좀 부탁하려 했는데. 형 말 지지리도 안 듣지. 코흘리개 시절 때는 잘만 듣더니.”
“……”
합리화다. 이건 합리화야. 그렇게 생각하며 자꾸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지만, 김태형의 말에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우리 관계는 리스크가 좀 크지만. 남남에다가, 10년 알고 지낸 사이고.”
“……”
“근데 난 너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 부탁한 건데. 너무해. 진짜.”
김태형이 그렇게 말하고 나를 뒤돌아봤다.
“딱 대답해. 정구가. 나 여기 있을 테니까.”
“……”
“내 부탁 안 들어줄 거면 그냥 여기서 나 지나쳐서 가면 돼. 난 그럼 그 길로 바로 우리 집 갈 거고.”
“……”
“내 부탁 들어줄 거면, 나 여기서 안아줘. 그 자질구레한 봉투 버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내 손에서 힘이 풀렸다.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고, 봉투 속 맥주 캔이 우르르 떨어져 차도로 굴러갔다.
“……”
“나 지금 방금 그거, 긍정으로 받아들여도 돼?”
김태형이 그랬다. 분명. 김태형이 그랬어.
연애는 하다 보면 감정이 생기는 거라고. 근데, 생각해보면 난 지금 이미 감정이 생겨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 아예 애초부터 김태형과 연애를 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
“안아달라니까?”
김태형이 팔을 휘적이며 말했다. 결국 내가 김태형을 끌어안았다.
“와. 나 남자친구 생겼어.”
“……”
“넌 안 기뻐?”
“기뻐요.”
“근데 뭔 반응이 그래. 헤어질까?”
그 말에 내가 김태형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세게 끌어안았다.
“아뇨.”
“헤어지기 싫지? 그럼 연애하면 돼.”
김태형이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 * *
“정구가. 일어났어? 오늘은 정구기가 좋아하는 계란 말이야.”
“형.”
“웅? 밥이 너무 적나? 더 줄까?”
아침에 일어나니 며칠 전과 같은 상황이 데자뷰처럼 앞에 펼쳐졌다.
“여전하네요.”
“뭐가?”
맛대가리 하나도 없는 계란 말이요.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뒤집개를 들고 설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애써 맛없는 계란말이를 삼켜냈다.
“아니요. 그냥. 귀엽다고요."
“그치. 누구 애인인데.”
“내 애인이죠.”
“응. 그치.”
“……근데 형.”
내 옆에 앉아 내게 물컵을 건넨 김태형을 불렀다. 웅? 귀여운 소리를 내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요리는, 하지 마요.”
FIN.
그렇다죠.. 태형이.. 계란말이... (씁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