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윤기라는 이름 석 자를 들은 순간부터 눈이 휘둥그레져선, 네가 민윤기를 어떻게 알아!?라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전정국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갈수록 썩어들어가는 내 표정 따위는 가볍게 자체 필터링 한지 오래인 전정국은 사고라도 낼 기세로 나에게 질문폭격을 던졌다. 아, 피곤해. 야, 일단 운전이나 똑바로 하지? / 아니 네가 어떻게 아냐니까? 너랑 민윤기랑 과 다르잖아? / 전정국. 너 지금 핸들 잡고있다. / 너는 영어영문, 민윤기는 어디더라? / 시끄러워. / 아아, 뭐였지? / 됐어, 시끄러!!!! 한바탕의 난리 끝에 전정국과 나는 집 앞까지 도착했고, 이대로 그냥 들어갈 순 없다며 나를 자꾸만 보채는 전정국때문에 결국 근처 편의점에서 과자 몇가지를 사서 아파트 놀이터로 향했다.
그냥 버스 타고갈 걸. 놀이터로 향하면서 고개를 돌려 내 방 창문을 애처롭게 쳐다봤다. 걷혀진 하늘색 커튼이 살짝 보이는 우리 집 창문과, 바로 옆에 위치한 꾹 닫힌 분홍색 커튼의 전정국네 집 창문. 진짜 저렇게 안 생겨선 하는 짓은 꼭 16살 소녀감성이었다.
" 이제 나 핸들도 놨겠다, 말 해줘. 나 진짜 궁금했다고. 민윤기. "
" 뭐야 너 아는 사이 아니었어? 아는 사이처럼 호들갑 떨더니? "
" 나는 예대니까 마주칠 일이 아예 없지. "
" 그런데도 그렇게 유명해? 되게, 음.. "
" 어땠는데? "
" 온순한 햄스터. "
온순한 햄스터라고!? 민윤기가!? 자기가 난리를 쳐서 기껏 말해줬건만 줄곧 저런 반응이다. 소문처럼 그런 사람은 정말 아닌데. 티라미수 하나 마음대로 못 시켜서 눈치를 보는 사람이, 소문처럼 괴팍하고 마이웨이를 달린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문창과는 여자들이 대부분이니까 귀여움도 많이 받을 것 같은데. 행동도…
" 아, 맞아. "
" 왜? "
" 마이웨이. 그건 좀 있는 것 같던데? "
"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
" 오늘 조별과제 대강 마무리하고 같이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갔거든? 그런데 좀 있다가 혼자 뭔가… 뭔가에 열중하는 것 같더니, 그냥 택시 잡고 가더라. "
" 말도 안하고? "
" 인사 하긴 했지. 했는데, 좀. 말투도 되게 다르고…. "
" 그거 또라이 아냐!? "
" 야 그 정도는 아니거든!? 그리고 또라이는 너 아니냐? 양심이 있으면 그 근육에 핑크색 커튼은 좀 아니지 않아? "
기껏 태워다 줬더니 남의 취향 가지고 난리야! / 그런 네 취향을 옆에서 고스란히 봐야 하는 나도 배려 좀 해주지? / 최유정, 너 마카롱 내놔. 아 빨리 내놔! / 니가 방금까지 까먹은 초코송이랑 칸쵸 그거 다 내 돈이야, 왜이래? / 내가 너 태워다주려고 면허 땄냐? / 필기에서 3번 떨어진 주제에? 누가 보면 베스트 드라이버인 줄 알겠네. 누-가 보며-언. / 야!!!! / 거 조용히 좀 합시다!! 시간이 몇 신데!!
점점 더 높아진 목소리에 결국은 혼이 나 버렸다. 전정국은 어느새 민윤기는 다 잊어버린 듯 유치하게 시비나 걸어왔고. 결국 엘리베이터에서도 이어진 실랑이는 서로의 집 문을 열 때까지 계속 됐다. 저걸 일일이 다 상대해 주는 나도 가만히 보면 아직 애인 것같기도…. 어찌됐건 집에 도착을 하니 포근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아- 편해. 소파에 엎어져선 그대로 잠들 뻔 하다가, 그제야 민윤기가 카페에서 한 말이 생각났다. 집에 들어가면 카톡으로 이메일 좀 보내줘. 피피티 다 완성되는 대로 보내줄게. 지금 상태로썬 발표 준비를 하는 것보다는 내 피로를 푸는 게 급선무였다. 이메일만 보내놓고 나머지는 내일 해야지. 일말의 미련도 없이 할 일을 내일로 미룬 후, 민윤기에게 카톡으로 이메일을 전송했다. 빨리 씻고 자야겠다. 욕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질질 끌렸다.
AM 11 : 40
금요일은 공강인 탓에 마음놓고 푹- 잔 것 같아서 기분이 상쾌했다. 씻고, 점심 먹고. 드라마 밀린 것도 보고! 정말 자신이 짠 시간표였지만 금요일 공강은 신의 한 수 인 것 같았다. 물론 고딩시절을 피씨방에서 가열차게 보낸 덕에 수강신청의 달인이 된 전정국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전정국은 아직도 삐졌으려나? 아, 맞다. 민윤기. 카톡 답장이 꽤 빠른 편이었는데. 분명히 답장이 와 있을 터였다. 그 특유의 우물우물하는 말투로 답장이 와 있겠지. 어제같은 돌발상황을 제외하곤, 만난 지 채 일주일도 안 된것치고 캐릭터파악이 꽤 쉬운 편이었다. 그런 잡생각들을 하며 채팅창을 열었는데,
[ 선배 늦게 보내서 죄송해요ㅠㅠㅠ (눈물) ] 1
[ [email protected] ] 1
[ 메일 보내시고 답장 부탁드려요 (방긋)(방긋) ] 1
…내가 잘못 본 건가? 아리송한 느낌에 채팅창을 위로 밀어서 확인해보았지만, 민윤기의 답장 텀은 항상 2~3분이었다. 그런 민윤기가 어제 11시에 보낸 카톡을 아직도 확인하질 않았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일함에도 들어가봤지만, 반기는 거라곤 스팸메일들뿐이었다. 진짜 뭐지.. 민윤기..? 설마 이러다가 잠수타고, 막 그러는건가? 계획적인 엿먹이기, 뭐 그런 거에 내가 걸린 건가. 갈수록 엄한 곳으로 민윤기를 몰아가는 내 머릿속을 가까스로 멈췄다. 제출은 월요일 자정까지고, 지금은 금요일 낮이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고. 괜히 사람 의심하고 그러지 말자, 최유정. 한 번 의심을 했다가 괜히 쪽팔릴 뻔 했던 티라미수 사건을 생각하며 마음을 비웠다. 사실 비운 척이라고 해야겠지만. 어쨌건 간에 토요일 저녁까진, 기다려봐야지.
" 와,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1을 확인하며, 이제는 잘 하지도 않던 혼잣말까지 터져 나왔다. 현재 시각 오후 9시 반. 물론 토요일 저녁 9시 반이었다. 계속해서 잠수를 타는 민윤기 덕분에 불안해서 핸드폰만 붙들고 어젯밤을 꼬박 새었다. 파일이라도 보내놓고 잠수를 타던지, 나보고 어떡하라고! 하필이면 왜 이런 조에 걸린 걸까부터 시작해서 민윤기에 대한 원망까지 머릿속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에 걸맞게 기분은 갈수록 땅굴을 파며 아래로, 아래로 치달았고. 정말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원망을 간신히 눌러 담은 후에 다이얼을 눌렀다. 제발 받아라, 제발.
하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지금은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적어도 상황설명은 해 주고 잠수를 타던가!! 그렇게 혼자 열불을 내는 동안에도 어느덧 시간은 흘러 10시가 되었다. 아, 어떡해. 그냥 지금부터 나 혼자서라도 해야겠다. 민윤기는 전정국이었으면 이미 죽었을 거다. 애꿎은 정국까지 끌어들인 채 무시무시한 상상을 해가며 분노의 파워포인트를 완성하고 난 후 시계를 보니 시간은 새벽 한 시를 훌쩍 넘기고있었다. 으, 그래도 맘에 안 들어. 애초에 민윤기에게 말했다시피 파워포인트에는 정말 소질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도 꼭 파워포인트는 다른 조원들이 맡았었는데. 하지만 제출이 내일 12시인데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람. 완성도에 대한 걱정보다는 피피티를 다 만들었다는 안도감에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딱 10분만. 잠깐만 엎드려있다가 정리하고 발표연습 해야지…. 조금만….
" 으음… 지금, 몇 시지…? "
나도 참 대단하다. 책상 위에 엎드려서 그 불편한 자세로 무려 13시간을 꼬박 잤다. 이틀 밤을 새웠다쳐도 경이로운 숫자였다. 불편했던 자세 탓에 뻐근해진 허리를 지탱하며 핸드폰을 찾았다. 어제 하도 난리를 쳐 댄 탓에 난장판이 된 책상은 핸드폰 하나 찾기도 어려웠다. 핸드폰을 찾아 쥐고선 실낱만큼의 기대도 없이 홀드버튼을 눌렀는데,
[카카오톡]
새로운 메시지입니다.
[민윤기 님의 메시지 2건]
[민윤기 님의 부재중 통화 3건]
으아아아-!! 진짜 뭘 하다가 이제야 연락을 한 거야! 문자는 2시 40분, 카카오톡은 3시 30분. 이 선배는 잠도 안 자나…? 늦은 시간이라 전화를 망설였던 건지, 8시 30분부터 한시간 간격으로 꾸준히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다. 가장 먼저 확인한 카카오톡에서, 며칠만에 나타난 민윤기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미안한 말투로 사과를 하고 있었다.
[ 지금 확인했어. 사정이 있어서 (눈물)(눈물)(눈물) 너무 늦게 확인했다 그치? 진짜 미안해서 어떡해ㅠㅠㅠ(눈물)(눈물) 피피티는 내가 금요일 저녁에 교수님 메일로 미리 보내뒀어. 피피티는 조금만 기다리면ㅠㅠ 내가 발표 대본이랑 같이 보내줄게. 너 수요일까지 그것만 외워서 발표하면 될거야. 잠수타서 미안ㅠㅠ 진짜 바빴어 정말정말 미안 (눈물) ]
[ 방금 메일 보냈어 ]
[ 확인하는 대로 답장 좀 해줘 ]
[ 미안해 ]
민윤기의 눈물바다를 보니 사정이 있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했다. 그래도, 잠수는 타면 안 되지! 괜히 마음이 뾰족하게 나갔다. 선배도 잠수타는 사람 기다리는 심정, 한번 느껴보세요. 답장을 하지 않은 채로 메일함에 들어가니 메일을 보내뒀다던 민윤기의 말과는 다르게 보낸사람 목록에는 민윤기가 없었다. 뭐지? 잘못봤나 싶어 새로운 메일함을 다시 한번 찬찬히 스크롤 해 보니 민윤기 대신 웬 알파벳으로 된 발신자가 나타났다.
" S..U..G..A.. 수,수자? 슈가? "
이름도 괜찮은 사람이 왜 굳이 슈가라는 발신명으로 보낸거지? 그런데 보통 Sugar라고 쓰지 않나. 살짝 아리송한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첨부된 파일을 확인 한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와, 진짜 피피티 신인데? 시작부터 끝까지 깔끔한 배경에 핵심만 눈에 딱 띄도록, 그냥 정석같았다. 피피티는 잘 한다는 말이 진짜였구나. 같이 첨부해놓은 발표 대본도 깔끔하고 빈틈이 없었다. 괜한 수식어구들은 배제하고 알맹이들만 넣어놓아서 암기하기에도 편할 것 같았고. 내가.. 괜히 난리 친 건가? 분노에 불탔던 지난 날은 어느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사정도 있고, 그런거지. 그렇고말고. 그럼 씻고 밥 먹은 후에 슬슬 외워볼까아-. 기분좋게 파일들을 저장하고선 기지개를 켠 후에 욕실로 향했다. 향하는 도중에 진동소리가 들렸던 거 같기도 하고?
안녕하세요, J.ae입니다!
이번 편은 살짝 쳐지는 감이 없잖아 있죠ㅠㅠ 저도 쓰면서 줄곧 느꼈어요. 다음 화에는 윤기가! (귀엽게) 등장할 예정입니다ㅎㅎ 사실 그 부분까지 쓰려고 했는데, 첫 작이라 그런가 맘대로 되지가 않아요ㅠㅠ 현재까지 나온 등장인물은 윤기와 정국이 뿐이지만, 앞으로 차차 등장 할 예정이에요.
민윤기 - 13학번 / 문예창작학과 / 2학년
여주 - 15학번 / 영문학과 / 1학년
전정국 - 15학번 / 실용음악학과 / 1학년
이정도로 정리를 해 볼수가 있겠네요. 그리고 독방에 추천 해 주신 독자분들.. 사랑합니다ㅠㅠ 어제 독방에서 추천받고 왔다는 댓글이 되게 많았는데 뿌듯하더라구요. 그러면서 이 글이 추천 받을만 한 글인가에 대해서 생각도 해 봤구요. 열심히 쓰는 것 밖엔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최대한 열심히 써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암호닉은 이번 화 부터, 앞으로 계속 댓글로 받도록 할게요! 사실 부족한 글이라서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원하는 독자분이 계셔서♥ 저도 소통을 원하기도 하구요! 댓글에 [암호닉]으로 달아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 연휴가 끝나가서 ㅠㅠ 저도 너무 아쉽지만 연재는 수,토,일. 이렇게 일주일에 세 편씩 업뎃 될 예정입니다. 오늘은 쉬어가는 편이라서 재미도 별로 없는데 사담이 역대급으로 기네요;;ㅠㅠ 남은 주말 잘 마무리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사랑합니다♡
+) 궁금한 점이나, 이해되지 않는 점들은 언제든지 물어 봐 주세요! 소통하는거 되게 좋아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