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국아 (수줍) ]
[ 정국아아ㅏ아아ㅏㅏㅏㅏ ]
[ 너 젊은애가 아직 자니?????? ]
[ 졍구기 횽이랑 영화보러 가까여? ]
[ 야 ]
[ 전화걸면 받아라 ]
[ 안 받으면 넌 쥬겅 ~,〈 ]
내가 혹시 이 형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나? 정국은 자신이 일주일 내내 손꼽아 기다려온 주말의 아침잠이 방해받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건 꿈이야… 저 형이 아무리 또라이라도 내가 잠수타면 자기가 어쩔 거야, 찾아올 거야? 그냥 자자. 자…면…. 정국이 차츰 다시 수마에 젖어갈 때쯤, 예고대로 정국의 핸드폰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아직 아홉 시도 안 됐는데!!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진짜! 하지만 겉은 근육 돼지, 속은 소녀의 감성을 지닌 정국은 태형의 전화를 무시할 만한 배짱을 가지지 못 했다. 저 형이라면 분명히 월요일까지 난리를 쳐 댈 거야. 결국 정국은 반쯤 포기한 얼굴로 핸드폰을 잡아챘다.
" …여보세요? '
" 어, 일어났네? 난 너 자는 줄 알았는데. "
" 웃기고 있- "
" 응? 뭐라고 정국아? "
" 아뇨. 아무 말도. "
" 그럼 형이랑 영화 보러 가자! 시간도 좋네, 지금 가면 조조야. 조조! "
" 지금 아홉 시도 안 됐는데요. "
" 응 이제 막 8시 21분 지나는 중이네? 그럼 9시까지 보자! 뿅! "
이런, 씨.. 정국은 태형과의 통화에서 자신이 욕을 뱉어내지 않은 것에 대해 큰 대견함을 느꼈다. 자신보다 한 학년 선배인 태형은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유달리 정국을 챙겨줬었다. 술을 잘 마시지 못 하던 신입생 정국을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에 불러내어 주구장창 폭탄주만 말아준 덕분에 이제 웬만해선 잘 취하지도 않을 정도의 주량으로 만들어 놓는다던가, 정국의 소녀감성을 이용해 오늘처럼 혼자서 보러 가긴 창피한 만화영화를 보러 갈 때 일행으로 써먹던가 하는. 결국 툴툴거리면서도 준비를 마친 정국은 차를 가져갈까, 하다가 집까지 태워다 달라고 난동을 부릴 것이 분명한 태형을 생각하며 작게 도리질을 쳤다. 그냥 버스 타고 가야겠다. 터덜터덜 걸어서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정국은 자리에 앉아 옆을 쳐다보고선 그야말로 기함을 했다. 하얀 피부, 레몬빛 머리카락. 거기다 검정색 후드티. 민윤기였다. 민윤기가 우리 동네엔 왜 온 거지? 쉬지도 않고 머릿속에서 피어나는 궁금증들을 꾹 참은 정국은 얌전히 버스를 기다렸다. 역시 뭔가 좀 무섭단 말이야. 이윽고 도착한 버스에 정국이 몸을 실을 때까지도, 민윤기는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간간이 핸드폰을 확인하는 행동을 제외하고선.
*
'민윤기 잠수'라는 대과제를 해결하고 난 터인지 오늘따라 유달리 기분이 상쾌했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느긋하게 점심 식사까지 마친 후, 그제야 민윤기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분명히 신경 쓰고 있을 텐데…. 마음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미안함에 모처럼의 여유를 부리느라 잊고 있었던 핸드폰을 떠올렸다.
[ 선배 메일 확인했어요!! 피피티 완전 대박이에요ㅠㅠㅠ ]
[ 잠수 타셔서 뭐라고 하려고했는데 ]
[ 너무 잘해서 할 말이 없잖아요 (삐침) ]
[ 답장 바로 안 해서 죄송해요 (눈물) ]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며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전송되기가 무섭게 사라지는 1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엄청 기다렸나 보네. 내가 너무했나…? 민윤기가 전정국이었다면 이미 죽였을 거라던 어제의 무시무시한 상상은 홀라당 잊어버리곤 자책을 하고 있던 도중, 울리는 벨 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발신자는 예상했던 대로 민윤기였고. 살짝 미안한 마음에 머뭇거리다 목소리를 가다듬고선 전화를 받았다.
" 네, 선배. "
" 으.. 유정아, 나 연락 안돼서 속 많이 상했지. 진짜 미안. "
" 아니에요! 솔직히 좀 당황했었는데, 이제 정말 괜찮아요. "
" 혹시 지금 시간 되면 잠깐 나올래? "
" 네? 지금요? "
으응-! 저번에 네가 이야기했던.. 그 버스정류장. 바쁘면 굳이 안 나와도 돼. / 아, 아뇨-!? 나갈 수 있죠. 있는데… 하하, 잠깐만 기다리고 있으시면 금방 나갈게요! 아 어떡해, 망했어!! 전화를 끊고 난 뒤, 머리를 헤집으며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대충 사람 꼴은 하고 있지만 지금 당장 어떻게 나가냐고! 민윤기에게 굳이 잘 보여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쪽팔린 건 쪽팔린 거였다. 급한 대로 기본만 하고 나가자. 어차피 동네니까 옷은 편하게… 입으려고 하니까 왜 입을 게 없어! 머리는 대충 앞머리만 고데기로- 아악, 머리는 아까 왜 헤집어선!!! 최유정 이 멍청아!
한바탕 집을 뒤엎고 무려 10분 만에 외출 준비를 끝낸 덕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기다리느라고 되게 심심했을 텐데. 느릿하게 떼어내던 발걸음을 조금 빨리해서 버스정류장 근처에 도착하니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진짜 캐릭터 확고하네. 오늘도 검정색 후드티에 머리는 후드 모자로 폭 덮여있었다. 민-유운기이- 서언배애-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일부러 말을 늘이며 민윤기를 부르자 마치 자동반사처럼 어깨를 꼼지락, 하며 움츠렸다가 이내 뒤를 돌아보는 민윤기였다. 눈이 마주친 후, 반가운 듯 환하게 웃던 얼굴은 내가 가까이 걸어갈수록 점점 더 울상이 되었고. ..내가 괜히 더 귀찮게 했나? / 선배, 저 진짜 저엉-말 괜찮아요! 마음 안 쓰셔도 되는데, 정말로. 손사래까지 치며 온몸으로 괜찮음을 표현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민윤기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맞아, 선배. 저 얼마나 기다리신 거예요? / ..어? 별로 안 기다렸어, 어.. 음.. 이십분쯤? 아, 맞다. 민윤기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손바닥을 쫙 펴서 박수를 한 번 치더니 후드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었다. 꼬물꼬물. 잠깐을 그렇게 꼬물거리던 민윤기는 고개를 살짝 숙여서 한번 배싯거리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선 민윤기가 양손 가득 나에게 건넨 것은,
" 이게 다 뭐예요…? "
" 사실 일 다 끝내고 정신을 차리니까, 네 생각밖에 안 나는 거야. "
" 화 난건 아닐까, 나한테 실망했겠지… 온갖 가설은 다 세워봤는데 너는 연락도 안 되지. "
" 무턱대고 저번에 너랑 한 카톡 보고 여기까진 왔는데, 빈손이더라고. 완전 빈털터리. "
" 망했다 싶어서 막 주머니를 뒤지니까 딱 오천 원 한 장이 나오는 거야. 그래서- "
" 그래서 사탕을 이렇게 많이 샀어요? "
" 난 단 거 먹으면 기분 풀리거든. 그래서 너도, 그거 먹고 "
" ..나 미워하지 마. "
평소에 말이 많은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꽤 긴 말을 전한 민윤기는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선 자꾸만 내 시선을 피했다. 사실 단 것은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시험기간을 제외하곤 즐기지 않는데도, 지금 내 양손을 가득 채운 사탕들을 보니 자신을 기다리며 끙끙거렸을 민윤기가 눈에 보이는 듯해서 웃음이 났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라 조금만 빨개져도 티가 더 많이 나는 것도 재밌었고. 열이 오른 얼굴에 살짝 분홍끼가 도는 게, 꼭 딸기맛 사탕 같았다. 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민윤기가 준 사탕들을 잠깐 정류장 의자에 내려놓은 후, 딸기맛 사탕을 골라서 민윤기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선배, 지금 얼굴 빨개진 거 알아요? 딸기맛이랑 진짜 똑같은데. 민윤기는 장난기가 다분한 내 말을 듣고선 내 장단을 맞춰주려는 듯 나를 살짝 흘기며 두 손을 감싸곤 뺨의 열을 식혔다. 애석하게도, 곧 이어진 내 말에 다시 불타올라버린 뺨이었지만.
" 선배. 저는 딸기맛이 제-일 좋아요. "
*
한편 정국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태형이 원하는 대로 9시까지 늦지 않게 역에 도착도 했고 수많은 초등학생들과 함께 전혀 취향에도 맞지 않는 순전히 태형의 취향인 만화 영화까지 함께 관람해주었다. ( 이런 건 너무 유치하다던 정국의 말과는 다르게 정국의 속눈썹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 영화관을 나와서는 여기저기로 끌려다니며 태형의 쇼핑백 보관함 노릇도 완벽히 해내었고. 이제 남은 건 밥. 밥만 먹고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집으로 돌아올 작정이었던 정국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려고 작정을 한 듯한 태형은 오늘은 꼭 정국이 끓여주는 라면을 먹어야 할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저 인간은 라면을 먹이면 소주가 당긴다고 할 인간이야. 자신과 함께 김태형의 피해자 1순위를 다투는 지민의 생생한 증언을 기억해낸 정국은 작게 몸서리를 쳤다. 이건 죽어도 안 돼.
" 선배, 그냥 밖에서 간단하게 먹고 이제 각자의 집으로- "
" 어쩐지 요새 쪽쪽 마른다 했지! 너 그거 밖에서 자꾸 인스턴트만 사 먹어서 그래! "
" 라면도 인스턴트인데요..? "
" ...... "
순간 말문이 막힌 태형은 작정을 변경한 듯 고개를 숙이고선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겼다. 또 뭘 하려고 저러지. 정국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캐치한 태형은 시선을 내리깔며 입을 떼었고. 아, 요새 신입생들 학교생활 존-나 편하게 한다. 나 때는 선배'님'이 눈만 떠도 엎드려뻗쳐하고 그랬는데. 아이 참, 내가 괜히 옛날이야기했네. 그치 정국아? 그런 태형을 바라보던 정국의 머릿속에는 단 두 글자만이 떠올랐다. 지랄. 정국이 풋풋했던 새내기 시절, 태형은 이미 실음과 또라이로 유명세를 날리고 있었다. 박지민과 나는 어쩌다가 저런 또라이에게 걸린 걸까? 이제는 다 말라가던 정국의 속눈썹이 다시금 촉촉하게 젖어들어 가려고 할 무렵, 태형은 다시금 정국의 대답을 종용했다. 정국아, 너네 집에 가서 라면 먹는 거 어떻게 생각해? / 네. 좋죠.
결국 김태형 퇴치에 실패한 정국은 태형과 함께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곧 집 근처의 정류장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을 들은 후, 하차벨을 누르곤 태형과 나란히 서서 내릴 채비를 했다. 음, 근데 저기 정류장에 앉아있는 사람. 뭔가 낯이 익은데. 최유정, 최유정인가? 그 옆엔…
" 헐? 민윤기 아침부터 나가더니 여자 만나러 간 거였어? "
" 네에-!? "
정국이 뭐라고 더 물을 새도 없이, 타이밍 좋게 정차한 버스 덕에 태형은 뒷문이 열리자마자 성큼성큼 민윤기에게 다가갔다. 한편 윤기는 다시금 불 타오르는 얼굴 덕에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중이었다. 선배. 저는 딸기맛이 제-일 좋아요. 자꾸만 맴도는 유정이의 목소리 덕에 이젠 딸기를 넘어서 토마토가 될 지경이었으니까. 그런 윤기를 잠재운 것은 태형의 등장이었다.
" 형, 어떻게 날 버리고 다른 여잘 만날 수가 있어!? "
" 최, 최유정. 너 거기서 뭐 해…? "
" …태형이? "
" 어, 전정국! "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막장 드라마의 촬영 현장으로 오해할법한 이상한 광경이었다.
안녕하세요, J.ae 입니다! 오늘은 처음부터 태형이가 등장을 했어요.
김태형 - 14학번 / 실용음악학과 / 2학년
으로 알아두시면 읽으실 때 편하실 거에요..ㅎㅎ 혹시 몰라서 설명하는거지만, 태형이, 여자 좋아합니다. ㅋㅋㅋ 대한민국의 건장한 남성이에요! (사실 저저 혼자 걱정하는 걸 수도..!) 좀 많이 발랄하긴 하지만요. 지민이랑 홉이, 남준이는 차차 등장하겠죠? 사실 오늘도 분량 조절에 실패(ㅠㅠ) 해서 올리면서도 좀 찝찝하네요. 분량조절 잘 하시는 분들 정말 존경합니다ㅠㅠ 그리고 암호닉은 제 생각보다 너무 많은 분들이 신청해주셔서 깜짝 놀랐었어요. 당연히 기분도 좋았구요..ㅎㅎ 그리고 갈수록 윤기 분량이 줄어가는 것 같은 건 제 착각인가요..? 쓰고싶은 건 넘쳐나는데 그 놈의 분량... 하.. 전 편에서 분명히 이번 편은 윤기가 많이 나올거라고 했는데 정작 생각했던건 5화에 거의 다 나올 것 같아요..ㅠㅠ 어째 글은 짧으면서 사담은 자꾸 길어지네요, 사담은 이쯤해야겠죠? 아, 독자님들 감기 조심하세요! 저는 지금 기침때문에 너무너무 고생 중입니다ㅠㅠ 항상 감사하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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