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유명한 그룹의 멤버와 사귀는 것 치곤 평범한 만남이었다.
내 남자친구는 박지민이라고 요즘 한창 대세라는 흥탄소년단의 멤버였지만 나와 만남을 시작했을 땐 그는 그저 형체가 보이지 않는 막연한 데뷔를 기다리던 흔하디흔한, 수많은 연습생중 한명일 뿐이었다. 그리고 난 그런 그와 같은 학교를 다닌 반 친구 중 한명일 뿐이었다.
고2때 같은 반이 되었을 때 그저 반에 연습생이 있다는 소문으로만 그를 알았을 뿐 직접적인 친분 따윈 전혀 있지 않았다. 당시 난 연습생 신분이라는 그보다 교내에서 더 인기가 많았던 1년 선배인 한정훈이라는 남자 친구가 있었고, 날 너무나도 잘 챙겨주는 남자 친구 때문에 다른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랬기에 반 여학생들이 박지민과 한반이 됐다고 호들갑을 떨던 그때, 난 그에게 그 어떤 관심도 두지 않았다.
예민하고 까칠한 박지민과 사귄다는 건.
(부제: 그때의 우린,)
W. 배찌민
전날 밤 이혼 얘기까지 오고간 부모님의 부부싸움때문에 속상한 마음에 잠을 설치고 새벽 일찍 집을 나서 학교로 향했다. 아직 어둑한 거리가 제법 음산했고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 이른 봄바람은 칼날 같았다. 괜스레 더 기분이 우울해져 남자친구인 정훈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등교를 좀 일찍 해서 내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하려했지만 폰이 꺼져있다는 메시지만 들릴 뿐이었다.
학교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아무도 있지 않았다. 아니, 책상위에 가방은 하나 올려져 있었지만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앉아있으니 기분은 점점 더 가라앉았다. 그래서 나 역시 가방만 자리에 둔 채 교실을 빠져나왔다. 적막한 교내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시간을 때우는데 어딘가에서 음악소리가 들려 발걸음을 그 곳으로 돌렸다.
음악소리를 따라간 내 발걸음은 무용실 앞에서 멈췄다. 살짝 열린 문으로 음악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그 소리에 맞춰 누군가 춤을 추는 발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고개를 빠끔 내밀어 무용실 안을 살피니 그 안에 흰색 기본 티셔츠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남자가 춤을 추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지? 라는 생각도 잠시, 춤을 추는 그 모습을 난 정말 넋이 나간 듯 쳐다보았다. 그렇게 몰입했던 내 시선이 깨진 건 그가 발을 삐끗해 바닥에 넘어진 뒤였다.
"시발. 왜 안 되는 거야! 진짜 좆같네."
거친 욕설과 함께 화를 내는 그 모습에 그제야 흠칫 놀란 내가 뒷걸음을 쳤다. 하지만 당황한 내 발걸음은 그만 꼬이고 말았고, 조금 전 그가 넘어진 것처럼 나 역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철푸덕 넘어지고 말았다. 그 소리에 그가 시선을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 덕에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내가 넋을 놓고 봤던 남자는 내가 여태껏 관심도 두지 않았던 연습생이라던 같은 반 박지민이었다.
"훔쳐봤냐?"
서늘한 말투였다. 얘가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의문이 들만큼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로 날카로운 말투였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조금 전 욕 했던 건 머릿속에서 지워라."
"어? 어."
"괜히 소문내고 다니지 말란 말인데, 제대로 알아 들은 거 맞아?"
"어? 어. 그럴게."
그가 묻는 대로 얼떨결에 대답을 하긴 했지만 사실 지금 이 상황이 난 어이가 없고 황당할 뿐이었다. 그리고 곧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 못했다고 이렇게 차갑게 말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뭐라 한마디라도 톡 쏘려고 입을 떼는데 그 순간 그가 날 지나쳐 무용실을 빠져나갔다.
근데 스치듯 지나간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이 그 찰나의 순간에도 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난 생각에 앞서 몸이 먼저 움직였고, 그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박지민이 놀란 듯 몸을 움찔거리며 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너, 울어?"
내가 멈춰 선 그의 앞으로 가 눈을 마주했다. 그러자 그가 살짝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놔."
"무슨 일인지 몰라도 울지 마."
내가 옷소매로 그의 눈가를 닦아주자 박지민이 놀란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나 역시 내 그런 돌발 행동이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저 지금은 그 누구의 눈물도 보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던 같다고 그 이유를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정말 울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이렇게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참았던 눈물이 더 이상 참아지지가 않잖아 정도의 이유였다.
이혼 얘기가 오고갔던 부모님의 전날 다툼이 다시금 떠올라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결국 눈가에 고인 박지민의 그 눈물을 보며 난 저도 모르게 참았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이번엔 내 눈물에 박지민이 놀라더니 곧 제 옷소매로 내 눈물을 닦았다.
"눈물도 전염 되냐? 나보고 울지 말라고선 넌 왜 울고 그래."
그러게.
내가 생각해도 정말 이상하고 황당한데, 잘 알지 못하는 박지민 앞에서 난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 때문에 살짝 눈물이 맺혔던 박지민의 얼굴엔 눈물자국이 어느새 가셨다.
무용실 바닥에 날 앉히고는 진정을 시킨 그가 물을 내밀었다.
"다 울었냐?"
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고개를 끄덕이자 정말 눈물이 다 멎은 건지 확인하려는 듯 그가 나처럼 낮게 고개를 숙여 내 얼굴을 살폈다.
"그러네. 다 울었네."
그제야 그는 나와 마주하던 자세에서 몸을 틀어 내 옆에 같이 쭈그리고 앉았다.
"너 박지민이지? 난 너랑 같은 반..."
"알아, ㅇㅇㅇ."
"어? 알아? 그렇구나. 그럼 더 확실하게 부탁하겠는데 방금 나 운거...너도 잊어줘."
내 말에 박지민이 한참을 내 눈을 바라보다 피식하며 웃었다.
"왜 웃기만 해? 난 니 부탁에 그래준다고 바로 대답했는데."
"그거 부탁 아니었는데?"
"부탁 아님 뭐였는데? 안 들어줘도 되는 거야? 너 막 욕하고 성질 더럽다고 소문내도 돼? 어?"
"그거 부탁 아니라, 경고였는데."
"어? 경고?"
"말 퍼트리면 나도 너에 관한 거 소문 낼 거라는."
"우와, 치사하다 치사해. 운거 소문 내! 뭐, 상관없어! 그리고 니가 그 말 했던 건 나 울기 전이거든? 경고는 무슨. 센 척하..."
당황스런 마음에 조잘조잘 말을 쏟아내는데 박지민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의 입술이 이내 내 입술에 맞닿았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놀란 나머지 밀어낼 생각도 못하고 숨만 참은 채 굳어 있자, 박지민의 입술이 내게서 떨어졌다.
"니가 나에 대해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없어. 근데 나랑 입 맞춘 거, 반에 소문나도 괜찮겠어? 너, 남친도 있는데."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날 무용실에 남겨둔 채 그렇게 내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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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편이라 구독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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