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한복 입고 살던 그 시절에, 행복한 부부 한 쌍이 살았답니다.
서로 얼굴도, 성격도 모른 채 이름만 알고 결혼하게 되었지만, 왜 "천생연분"이란 말이 있잖아요. 그건 딱 이 부부를 위한 말이었어요.
혼인식 날, 마주본 두 부부가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둘은 첫 눈에 반해버렸어요. 남자는 여자의 산딸기 같이 싱그러운 자태에, 여자는 남자의 토끼같은 눈웃음에 모든 마음을 허락해 버렸어요.
비록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부는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무더운 여름 햇빛 아래에서도, 북쪽에서 찬 바람이 세차게 몰아칠 때도 남자는 여자 생각에 늘 웃음이 끊이지 않았어요.
여자의 요리가 서툴었지만 임금님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고, 여자가 만들어 준 옷이 조금 많이 컸지만 '앞으로 더 많이 먹어서 살을 찌워야겠다!'라고 생각했어요. 일하는 시간동안 여자를 못 보는 게 너무나 마음아파, 저 태양을 여자 얼굴 삼아 일 하다 한 번, 밥 먹다 한 번, 쉴 때 한 번, 쳐다보곤 했답니다. 시장에서 예쁜 치장거리를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고, 꽃은 또 얼마나 많이 따다 줬는지, 온 동네 꽃이란 꽃은 모두 남자가 지나갈 때면 잔뜩 긴장했어요.
농삿일이 끝나고 동료들과 막걸리 한 잔 할 법한데도, 남자는 매일같이 일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달려갔답니다. 그런데 이 남자, 집이 보이기도 전 부터 고래고래 여자의 이름을 불러대는 까닭에 고을 아낙네들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 우리 남편도 곧 오겠구나,'하고 짐작하곤 했어요. 그리고 남몰래 질투도 했다네요. '우리 남편도 저러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말입니다.
여자는 남편을 기다리며 바느질도 하고, 물도 길어오고, 그동안 따다 준 꽃들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시집 오기 전, 어머니께 바느질을 배웠지만 남자와는 다르게 손이 서툰 여자는 바느질이 참 힘들었어요. 바늘에 찔려 아기같은 손가락에 피가 나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서방님이 따뜻하게 입어줄 걸 생각하면서, 집중력에 눈동자가 가운데로 몰리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한 땀 한 땀 옷을 만들었어요. 날이 저물어 갈 때면 서방님이 언제 오시려나, 하며 마당을 기웃기웃거렸고 오늘 하루 힘들었을 서방님을 위해 맛있는 저녁도 준비했답니다. 서방님이 좋아하는 닭고기 반찬은 하루도 내놓지 않는 날이 없었어요. 그래서 온 동네 닭들은 여자가 시장에 나타날 때마다 잔뜩 긴장했어요.
오늘도 어김없이 저 멀리서 서방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사랑스러운 부인의 이름을 마구 부르면서. 사실 여자는 동네 여자들이 모두 자기를 부러워 한다는 것쯤은 눈치 챈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이거, 들을 때마다 부끄러운 걸 어쩌겠어요. 볼은 빨개지고 심장은 쿵쾅쿵쾅. 서방님이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이렇게 마음 간지러운 걸 어쩌겠습니까.
하지만 하늘도 그 행복을 질투한 나머지, 이 부부에게 엄청난 슬픔을 주었답니다.
여자는 원인도 모를 병을 얻어 하얗던 얼굴이 생기를 잃어갔고, 앵두 같던 입술은 가뭄든 논 마냥 갈라졌고, 초롱초롱하던 눈은 빛을 잃어 슬픔만이 가득 차게 되었어요. 남자는 동네방네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다니며 여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든 의원들은 여자의 맥을 짚어보곤 자신이 고칠 수 없는 일이라며 이내 돌아가곤 했어요. 그럴 때마다 희망의 끈은 하나, 둘, 사라져갔고, 여자의 생명의 촛불도 조금씩, 조금씩 스러져 갔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어요. 남자는 모든 일을 그만둔 채 여자 살리기에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직접 약초를 캐러 높은 산에 올라갔다가 뱀에 물려 끙끙 앓았지만, 자신까지 아프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아픔도 잊은 채 다시 산으로 향했어요. 여자는 자기 때문에 남자가 아파하는 걸 보며 너무 힘이 들었어요. 병이 주는 아픔은 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병을 원망하며, 자기 자신을 원망하며 여자는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습니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보는 게 너무 가슴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았어요.
괜찮아,
내년 봄에는 어떤 꽃을 따다 줄까,
부인이 해주는 닭고기 반찬 먹고 싶다아,
내일이면 다 나아있을거야,
내일이면,
내일이면,
...또 내일이면.
매일 같이 태양을 보며 여자를 생각하던 남자였지만, 여자가 병을 얻은 후로는 매일 밤 달을 바라보며 여자를 위해 기도했어요.
제 부인을 낫게 해주세요,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원이 나타나게 해주세요,
제가 대신 아플 수 있게 해주세요,
......부인이 죽어야 한다면... 그래야 한다면, 제가 없을 때 말고 그녀 곁에 있을 때 그렇게 하세요.
겨울에 병을 얻었던 여자는 끝내 꽃이 한 두송이 피기 시작할 무렵,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다행히 여자의 숨을 거두어간 얄미운 하늘은 한 가지 소원은 들어주었어요. 여자는 남자의 곁에서 그의 손을 꼬옥 잡은 채로 눈을 감았습니다.
다음 생에도 다시 부부의 연으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남자는 그러겠노라고, 눈물 속에 맹세했습니다. 그 날은 온 동네 사람들이 하늘을 원망하며 남자의 슬픔을 함께 해주었습니다.
아낙들도 이 부부의 기구한 운명을 안타까워하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남자는 하루가 다르게 살이 빠져갔고, 덕분에 여자가 생전 만들어 준 옷은 더 커져버렸어요.
집안의 꽃들은 여자가 돌보지 않아서인지, 여자를 잃은 슬픔 때문인지, 아니면 그 모두 때문인지 시들어 죽어버렸고, 행복만이 가득했던 집 안에는 슬픈 먹구름만 잔뜩 끼어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여자의 장례식을 치른 후 꼭 세 달이 지난 밤이었어요. 그날 밤도 울다 지쳐 쓰러져 잠든 남자는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파아란 하늘 아래 그보다 몇 곱절은 더 파아란 물망초 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희미한 파람의 경계 한가운데에 남자는 서 있었어요. 공기마저도 파랗게 느껴지는 그 때, 어디선가 낯선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지금 생을 포기한다면 다음 생에 여자와 다시 만나게 해 주겠다"고.
여자가 곧 삶의 이유였던 남자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습니다.
"그러겠습니다."라고.
그리고 남자는 물망초 밭의 파란 빛 속에 스러져 잠기고 말았습니다. 아찔한 물망초 향이 온 몸을 휘감았습니다.
남자는 파란 꽃들로 흠뻑 젖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