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what though life conspire to cheat you - A.S. pushkin 中
Blue Moon
(꼭 틀어주세요.)
"어떤 연유로 자꾸 부르시는지 모르겠네요."
"저희가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일부러 한껏 더 날카롭게 내 뱉은 말에 앉아있던 연구원이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언제봐도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기분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그와 함께 같은 공간 속에 있다는 것도 짜증났고, 무엇보다 태형의 좋지 않은 모습을 봤던 장소에 또 다시 발을 들였다는 것이 제일 짜증났다. 오른쪽으로 길게 배치된 소파 위에, 그 날의 태형이 있는 것만 같았다. 두 눈을 꾹 감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주먹을 꽉 쥐고 연구원을 바라보자, 그의 얼굴 위로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그 얼굴이 마치 무언가를 찾아내 듯 꼼꼼히 내 얼굴을 훑었다.
"아아-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섭섭하네요. 전 저희가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심을 나누는 깊은 사이는 아니라도, 사이 좋은 친구 정도는 되는줄 알았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독한 보드카를 들이키던 그가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입술을 꾹 깨물고 그를 노려보다, 일단 얘기라도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에 태형이 앉았던 소파와 가장 먼 곳에 자리 잡고 앉자, 아끼는 술이라며 앞에 있던 술을 집어든 그가 내게 권했다. 술 잔 안을 빙빙 도는 얼음들을 바라보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11시. 예상보다 많이 늦어버렸다. 평소였으면 아무 생각도 없었을 걸, 누군가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들떴다. 빨리 용건만 얘기하라는 식으로 연구원의 눈을 바라보자, 소파에 깊게 기대앉은 그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제가 아끼던 게 있었는데."
"어이없게도, 그게 도망 가버렸더라구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린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혹시 탄씨라면 어디있는지 알지 않을까 해서."
"똑똑하잖아, 그쪽."
아끼던 것. 그리고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 목소리 속에 담긴 비웃음. 그의 말 끝 하나하나가 다 태형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든 걸 다 알고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듯한 그의 눈빛이 끊임없이 나를 쫒았다. 궁지에 몰린 듯한 느낌에 등골이 서늘했다. 신세한탄 좀 하려고 불렀는데, 탄씨가 이렇게 선을 딱 그어버리니까.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네요. 능청스럽게 웃던 그가 입 속에 든 얼음을 아드작 씹었다. 웃는 눈꼬리에 따라 얕은 주름이 진 눈이 순식간에 내려앉고, 금새 싸늘해진 눈동자 속에 내가 담겼다.
"탄씨."
진득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나를 불렀고,
"제가 요새 좋아하는 속담이 있는데."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라고, 아세요?"
자신의 손을 들어올려 내 눈 앞에 흔들던 그가 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독한 술내음이 코를 타고 들어와 나를 괴롭게했다. 콧잔등을 찡그리며 숨을 참는 내 모습을 보면서도 술을 한모금 더 들이킨 그가 술잔을 내려놓고,
"처음엔 몰랐는데, 생각해보니까 아주 무서운 말이더라구."
"하늘에서 뭐가 떨어질지 모르잖아."
미친 것 처럼 광기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낄낄거리는 웃음 소리를 내뱉었다. 눈은 분명 싸늘히 굳어있는데, 입만 올라간 괴기한 모습에 움찔 온 몸이 떨려왔다.
"그러니까,"
"주제 모르고 나댔다가, 괜히 자기 눈만 가리는 꼴이 될 수 있다는 거야."
내 앞에서 흔들던 손 위로 반대 손을 쿵 내려 찍은 그가 장난스레 손을 툭툭 털었고,
"탄씨는 제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그런 무모한 짓, 하지 않길 바랄게요."
순간적인 무서움에 잔뜩 굳은 내 몸을 비웃 듯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주제 파악 못한다는 거,"
"진짜 꼴불견이거든."
역시,
"제 말, 알아 듣겠죠?"
그는 모든 걸 다 알고있었다.
-
사람은 역시 적응력이 뛰어난 동물이었다. 태형이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미 익숙해져서는, 그의 잿빛 눈동자가 처음보다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태형은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숱이 많았다. 욕실 바닥을 가득 채운 은색 머리칼에 당황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 머리칼을 주어담는 요령까지 터득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만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했지만. 호석 또한 마찬가지인 듯 했다. 처음에는 본성이 어떻든 실험부에서 나온 태형을 신뢰할 수 없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던 그도 이제는 태형과 함께 밥을 먹기까지 했다. 뭐, 우리가 익숙해진 건, 저기서 심각하게 콩을 옮기는 태형도 똑같을 테지만.
"김태형, 손."
혼을 내 듯 단호하게 튀어나간 목소리에, 콩을 향해 다가가던 태형의 손이 멈춰섰다. 다시 젓가락을 집어드는 그의 뒷모습이 축 늘어졌다. 콩 주변을 미끄러지며 안쓰럽게 허우적 대는 젓가락 끝이 접시를 콕콕 찔렀다. 태형이 진짜 늑대이긴 한건지, 태형은 뛰어난 후각과 청각에 비해 움직임이 섬세하지 못했다. 뭘 하려고만 하면 무언가를 깨뜨리기 일수였고, 꾸준히 반복되어 온 젓가락질 연습도 아직까지는 효과를 드러내지 못했다. 며칠 째 연속되는 젓가락 연습이 힘들긴 한 건지 눈꼬리를 축 내린 태형이 나를 바라봤지만,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허우대 멀쩡한 성인 남자가 계속 포크를 쓸 순 없지 않은가.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삐질삐질 서툴게 젓가락을 놀리는 태형을 본 호석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쟤가 진짜 갠줄 아냐?"
왜 사람한테 훈련을 시키고 지랄이야, 그냥 있는대로 살면 되지. 자기 집인 양 소파에 드러누워 툴툴 내뱉은 호석의 말에 반짝반짝 기대를 담은 태형이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고, 애 좀 그만 괴롭혀라. 이어서 뱉어진 말에 태형이 금새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처음에는 정호석 눈도 못마주치더니, 남자끼리 뭐가 맞긴 맞는지 가끔보면 아주 그냥 찰떡궁합이다. 괜히 심술이 나서는 태형이 옮겨놓은 콩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놓자, 다시금 많아진 콩을 바라보며 울상을 지은 태형이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쓰럽게 숙여진 잿빛 머리칼이 접시에 닿을 듯 낮게 가라앉았다.
"개한테 젓가락질을 가르치진 않지."
"못돼 빠져가지고는."
"그래서, 불만있어?"
톡 쏘아붙힌 말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 호석이 됐다며 손을 휘저었다. 네가 불쌍하게 됐다며 태형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는 퍽이나 다정스런 손길에, 몰래몰래 손가락으로 콩을 옮기고 있던 태형이 어색하게 베시시 웃어보였다. 호석의 옆에 있을 수록 태형의 잔꾀만 느는 것 같아 호석 가까이 앉아있는 태형의 옷자락을 잡아끌자,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태형이 콩이 담긴 쟁반을 들고 일어나 내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점점 눈치가 느는 듯한 그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왼손을 들어 잿빛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고개를 푹 숙인 태형이 다시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아주, 지랄들을 해요."
다시금 콩을 콕콕 찌르는 태형을 본 호석이 넌더리가 난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어디가냐는 말에 호출이라며 짧막하게 내뱉었다. 요즘따라 호석의 호출이 잦았다. 실험부가 그 지랄을 떠는데 강력계에도 그 소문이 퍼지지 않았을리 없었다. 차라리 그 때 폐기처분 임무를 받은 게 나였더라면. 괜히 나 때문에 호석이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것 같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간다."
무뚝뚝히 일어나 신발을 챙겨신는 호석을 본 태형이 한쪽 손을 들어올려 이리저리 흔들었고, 그를 본 호석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점점 더 태형을 보내기가 싫어졌다.
-
요새 강력계에 자주 발을 들이던 지민이 오늘도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젠 아주 그냥 강력계 팀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강력부 지리를 빠삭히 알고 있는 그가, 가져온 음료수를 익숙하게 냉장고 속으로 집어넣었다. 오늘은 태형이 젓가락질 마스터 했어요? 귀 뒷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절래절래 고개를 젖자, 거봐. 그거 힘들다니까. 하며 너털 웃음을 지은 그가 맞은 편에 자리잡고 앉았다. 처음 봤던 모습과는 달리 깔끔히 짧아진 머리를 매만지던 그가, 태형이도 머리 자를 때 된 것 같은데. 라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그의 이야기의 처음과 끝은 언제나 태형이었다.
"호석씨는 오늘도 불려간 거죠?"
그의 말에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호석이 사고칠까 걱정이라도 되는 건지, 강력부는 호석이 아무 것도 못하도록 이리저리 굴려댔다. 매일 지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다니는 호석의 모습이 떠올라 쓴 웃음을 지었다. 분명 실험부도 태형을 데리고 있는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눈치 싸움에서 죽어나는 건 호석 뿐이었다.
"실험물을 훔쳤다고 그렇게 소문이 많은데, 가만히 두는 것도 이상하죠, 뭐. 엘리트 중에 엘리트인 호석씨를 짜를 수도 없고.
강력계도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겠어요."
장난스레 피식피식 웃는 얼굴 위로 얕은 그늘이 졌다. 그리 오랜 시간을 봐온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옆에서 봐온 바. 지민은 정이 많은 듯 했다. 실험부에서는 그저 실험물일 뿐인 태형을 이렇게까지 챙기는 것도 그랬고, 무뚝뚝한 성격 탓에 매번 틱틱 거칠게 말을 내뱉은 호석 옆에서도 생글생글 잘 웃는 것도 그랬다. 그냥, 미움 받기 싫어하는 사람인 것 같았고, 미워하기 싫은 사람이었다. 힐끗힐끗 그를 훔쳐보는 내 눈을 보며 베시시 웃던 그가 헛기침을 했고, 짐짓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글쩍였다.
"근데,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호석씨야 뭐, 증거도 없고 태형이랑 집적적인 관련도 없으니까 잠깐 이러다 말텐데,"
"탄씨까지 감시가 들어갔어요."
갑작스런 지민의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올라갔던 입꼬리를 축 내린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방 안을 울렸다.
"저희도 법부는 무서운지라. 몸에 뭘 달거나 그런 짓은 못하겠지만."
"강력계 근처, 집 주변은 아마 이미 실험부 사람들이 깔렸을 거에요."
"제일 위험한 건 탄씨에요."
"걸리면 쉽게 넘어가진 못할거에요."
그래, 그건 알고 있었다. 강력계에도 실험부에도 막중한 피해를 끼친 내가 조용히 묻어갈 수 있을리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이자, 손톱을 꼼지락 꼼지락 매만지던 그가 나보다 더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그의 머릿 속엔 태형의 생각으로 가득찼으리라. 그 속엔 나와 호석에 대한 걱정도 조금씩은 묻어나오는 듯 했지만, 결국 그 끝은 태형이었다.
"그러니까, 절대 태형이 밖에 나오게 하지 마세요."
"나머지는 제가 다 책임질게요."
그에게 태형은 전부였다.
독자님들 안녕하세요!!ㅎㅎ어제 수능이 끝났죠??수험생 여러분들은 아마 지금까지 놀고계실지도 모르겠군요ㅎ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꼭 나왔기를 바랍니다!
블루문 1회가 9일 전이라고 뜨던데..약 9일만에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글이 짧네요.
죄송합니다...절할게요 진짜.
일단 불맠 부분은 다 빼는 걸로 구상을 다시 했는데, 뭔가 애매해.
글이 갑자기 진부해진 느낌...ㅎ
이 글은 좀 짧게 끝낼 생각이에요. 아마 10회? 정확하진 않지만 지금까지 생각한 바로는 그래요ㅎㅎ
길게 길게 끌어 갈 힘도 없을 뿐더러, 점점 길어질 수록 지루해질 것 같아서 짧고 굵게 가도록 결정을 했답니다..ㅎㅎ
늦게 왔는데도 글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진짜진짜 감사하고ㅎㅎㅎ
전 이제 독방 화력 올리러 가야겠어요!!총총ㅋㅋㅋ
굿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