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백/리얼물] 시작의 문제 02
백현은 종인과 헤어진 후 소속사 주위를 한참 서성였다. 제발 누군가가 자신을 찾으러 나오길 바랬기에 그렇게 한참을 서성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누군가 자신에게 달려와 이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랬다. 자신의 데뷔가 좌절된것이 아니기를, 착오로 벌어진 일이기를 빌었다. 하지만 백현의 바람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10분을 기다려도 1시간을 기다려도 소속사를 빠져나오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저 사생들만 북적일 뿐이었다.
긴 시간의 기다림 끝에 백현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엑소의 최종 멤버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종인 때문이었다.
집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 모를 정도로 백현은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집앞이라는 말이 딱 맞을 정도였다. 백현은 현재 눈앞이 깜깜했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가 없었다. 잠깐이지만 세상의 목표, 인생의 목표로 여기고 달려왔던 모든것이 없어져 버렸다.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싶을 정도였다.
도저히 이유를 알수 없어 더욱 그러했다. 자신은 종인에게 딱히 밉보인것도 없었다. 오히려 친했다고 할 수 도 있었다.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연습생 기간이 문제랄수도 없었다. 연습생 기간이 짧은것은 종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종인이 어깃장을 놓은것은 백현 뿐이었다. 괜히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백현은 한참을 그렇게 문 앞에서 서있었다. 집에 도착했지만 차마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밝게 웃으며 자신을 맞아줄 엄마를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평소에 밤 늦게까지 연습을 하는 저를 애처롭게 바라보던 부모님이었다. 평소에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고마웠지만 오늘은 두려웠다. 애처로움 뒤에 숨어있는 백현에 대한 기대감이 이제는 근심으로 바뀔것이기에 더욱 두렵고 무서웠다. 그리고 부모님이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것을 알고 있었기에, 괜히 죄스러워졌다. 차라리 왜 그렇냐고 뭘 잘못했냐고 책망이라도 하신다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꼭 저가 이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집안의 애물단지가 되어버린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알고 있었지만 가슴한켠이 답답한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서있을 수 도 없었다. 죽고싶을만큼 비참한 현실이었지만 모든것이 그대로였다. 단지 백현이 이제 더이상 엑소로 데뷔할수 없다는 것만 변했을 뿐이었다. 굳이 상기하고 싶지 않아도 앞으로 자신은 다시 연습생 신분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도 부모님께 데뷔가 무산되었다고 말씀 드려야 했다. 한참동안 부모님께 할 말을 정리했지만 마땅히 할수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과 데뷔의 무산. 백현은 그 두가지 사실만 계속해서 되뇌일 작정이었다. 도저히 다른 이야기는 꺼낼 수가 없었다. 백현은 비밀번호를 치고 문을 열기전에 잠깐 문 손잡이를 잡은채 눈을감고 서 있었다. 괜찮아. 몇번을 되뇌인후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집안은.
평소와 달랐다.
"엄마 이게 무슨일이야...?"
집안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부모님의 표정이었다. 눈을 감고 쇼파에 기대 계시는 아버지와 쇼파에 주저앉아 한숨을 쉬는 어머니. 평소의 오순도순하진 않았지만 편안한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공기중에 미묘하게 부유하는 긴장감과 근심들이 나로 하여금 어색함을 불러일으켰다.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한걸음씩 떼었다. 집안으로 한발자국씩 옮길때마다 기이한 분위기는 무거움을 더해갔다. 꼭 죽음을 목전에 둔 집마냥 그렇게 침울한 분위기가 나를 옥죄고 있었다. 꼭 이미 나의 탈락을 알아채신것 같은 분위기에 무슨일이냐는 그 말밖에 나오질 않았다. 설마 벌써 아셨을까 싶어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때 집안의 어두운 분위기에 휩싸여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티비속에서나 봐오던, 내 삶에서 실제로는 절대 볼일이 없을것 같던 빨간딱지가 가구 곳곳마다 붙어있었다. 백현은 그대로 멈췄다. 아니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집안 전체를 둘러보았다. 한 곳도 빠짐없이 빨간 압류딱지가 붙어있었다. 백현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낮까지만 해도 깔끔했던 집이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백현의 부모님은 그런 백현을 불러 앉히고는 한참동안 말없이 백현을 바라보았다. 백현 또한 입을 먼저 열 수가 없었다. 자신도 해야할 말이 있었지만 일단 이 상황에 목이 막혔다. 백현의 부모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깊은 한숨을 쉬고는 지금 현재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는 간단했다.
그리고 흔히 아침 드라마에서 볼수있는 그런 소재였다.
연대보증. 그것이 문제였다. 착실하게 살아온 백현의 부모님이었지만 한번 잘못 선 보증이 이런 처참한 상황을 나았다. 친한 친구의 보증을 서 주었는데 친구분이 갑자기 돈을 들고 튀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액수가 자그마치 20억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이셨다. 길지 않은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이 얽혀들어갔다. 20억은 적은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돈을 갚을 능력이 있는사람은 아버지와 형 뿐이었다. 만약 자신이 데뷔를 할 수 있었다면 자신도 도움을 줄 수 있었을테지만 지금은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런 부모님을 보며 백현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전 문앞에서 한참을 되뇌었던 문장들을 말하기 위해 입을 뗄 수 없었다. 당신의 아들이 이제 더이상 엑소의 멤버가 아니라고, 최종 선정에서 떨어져 다시 연습생이 되었다고 그 말을 도저히 꺼낼수가 없었다. 자신을 향해 그래도 네가 있어 다행이라는 그런 희미한 기대를 품고계신 부모님의 눈빛을 바라보며 백현은 그저 굳은 얼굴로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제는 백현이 이 집안의 가장이었다. 백현에게는 형이 있었지만 평범한 샐러리맨의 월급으로 20억은,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빚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가수로 데뷔하고 성공만 한다면 손쉽게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물건너가겠지만 그래도 가장 가능성이 높은 해결방법이었다.
백현이 가수로 데뷔하는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한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잠깐 누구 좀 만나고 올께요."
"이시간에 누굴..."
그제서야 백현은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볼수 있었다. 어머니의 눈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얼마나 우셨는지 알 수도 없을만금 퉁퉁 불어 달아오는 눈을 바라본 순간 백현은 눈물이 날것 같았다.
"데뷔때문에요. 이야기하다말고 왔거든요. 다시 잠깐 갔다올께요. 그리고 엄마..."
"... ..."
"괜찮을 거에요."
"... ..."
"나 이제 데뷔할거니깐, 우리 잠깐만 참고 견뎌요."
백현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가족의 행복과 백현의 삶. 백현에게 누군가가 이 둘 중 하나를 포기한다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선택을 했을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지금 눈앞에 와 있었다. 차라리 자신 하나의 희생으로 가족 모두가 행복해진다면 그 어떤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이제 백현에게 선택권따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