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떠나 보낸 봄은 금새 지나갔다. 이젠 가을이다. 노쇠한 낙엽은 발길에 짓밟혀 으스러지고. 꼿꼿하게 서서 자리를 지키던 나무는 죽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겨울이다. 당신은 떠나기 전 소원을 하나 빌었었다. 나와 함께 바다를 보고 싶다는 소원. 당신은 그럴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고 싶어했었지. 나는 그 소원을 이루게 해주겠다고 대답했지만, 이루어주지 못했다. 불씨가 타닥타닥 불만을 토하며 타들어갔다.
시립게도 아름답고 푸른 바다. 당신은 그 속에 잠겨있다. 혀로 입안을 핥자 짭짤한 소금과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당신은 지금 그 차가운 바닥 밑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난 당신이 빌었던 소원을 떠올리며 매년 가을에 홀로 그 바닷가의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어다녔었다. 그럴 때마다 파도에 떠밀려온 조개와 소라 껍질에 짓밟혀 무수한 피를 흘려댔다. 피는 모래사장을 타고 바다로 흘러갔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았는데 항상 이상야릇한 감각에 휩싸였다. 꼭 당신이 내 피를 받아 먹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꿈 속에서 자꾸만 당신의 형상이 보인다. 그림자 하나라도 밟으면 좋을텐데. 그럴 수 없다. 슬프다. 괴롭다. 당신이 눈에 밟히면 밟힐수록 내 가슴은 찢겨져 너덜너덜해진다. 나는 그렇게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을 바다의 차가움이 몸을 덮쳤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차가운 시체 속에서 당신을 발견한다면 꼭 끌어안을 것이다. 죽음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는 죽음뿐이다. 죽음을 통해 당신과 함께 하는 것. 죽음으로 인해 맺어질 인연. 내가 바라는 것은 그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