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亂) 그리고 난(暖)
03
♬ 이 노래를 들으면 좋아요 " 린 - 시간을 거슬러 "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낭월대군과 함께 설화정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깊은 이야기를 나눌 것 같아 도망치듯 그 자리를 나왔던 것 같다. 하지만 어찌나 멀리도 왔던지 걸어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거리여서 걷다가 말없이 내 옆에 온 낭월대군과 함께 말을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영훈오라버니가 계셨지만 낭월대군과 함께 돌아오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혼인을 시킨다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만약 낭월대군이 나와 혼인할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왕가의 반대가 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 절 혼인시키실 생각이십니까?”
“그러하다.”
“도대체 어떻게..”
“나는 낭월대군이 너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너는 몰랐느냐?”
“예? 낭월대군은 그저 저희 남매들과의 추억을 그리워하여..”
“낭월대군은 너와의 추억이 그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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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 놀다 비가 쏟아져 물이 갑자기 불어난 그 날, 나는 그 여자아이를 보았다. 그 여자아이는 분명 나보다 어려 보였는데 강에 빠진 사람도 아닌 가축의 짐승들을 구하기 위해 직접 사람들을 모으고 어디선가 밧줄을 구해온 모습을 보았다. 비를 맞으면서도 눈은 가축들에게서 떼질 못 하던 그 여자 아이를 어떤 마음이 들어서인지 나는 그 여자 아이 머리 위로 내 비단 옷을 들어 비를 피하게 해주었다. 내가 비를 맞는 건 상관 없었다. 그 여자 아이의 눈에 내가 보이지 않아도 상관 없었다. 내 눈엔 그 여자 아이, 연희 밖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그 후로 연희의 뒤를 쫓아 다녔다. 밤엔 몰래 별당에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곤 했고 글도 좋아하고 무예도 좋아하던 연희를 따라 글을 배우고 무예도 배우며 둘도 없는 벗이 되고자 했다. 연희의 말은 다 들어주려고 애썼고 연희의 행동을 다 칭찬해주고 싶었다. 연희의 따스한 햇볕이 되고 싶었다.
“연희야, 이 글자가 무엇인지 아느냐?”
“이 글자는.. 눈 설 아닙니까?”
“역시 연희 너는 알 줄 알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글자가 바로 이것이다.”
“주연 오라버니는 눈을 좋아하십니까? 저도 좋아합니다!”
“눈은.. 참 맑고 순수하지 않느냐. 나는 눈을 눈을 밟으면 우리의 발 모양도 보이고, 글자를 쓰면 그대로 보여주는 맑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마치 너처럼..”
“예? 왜 제가 눈입니까?”
“너의 눈을 보면 내가 보이고, 너와 함께 있으면 내 진정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님에겐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놀기만 하는 팔푼이로 보이시겠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며 글을 쓰고 그것을 나누며 살고 싶었다. 때론 같이 사냥도 가고 같이 물놀이도 하면서 나와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살고 싶은게.. 내 삶의 목적이다.”
“저도 남자였다면 꼭 정치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닌 제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그것을 중요시 여길 것 같습니다. 주연 오라버니는 참 생각이 깊으셔요.”
“너와 형님들도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데 아버지는 이해해주지 못 하시는구나..”
“저는 주연 오라버니를 응원하겠습니다. 저는 주연 오라버니가 좋으니까요!”
“나도 연희 너가 참 좋다.”
그 때 행복하게 웃은 너의 모습이 너무나 좋았다. 평생 그 얼굴만 보고 살아도 한이 없을 정도로 나는 너무 행복했다. 웃는 모습이 아니더라도 재현 형님이 메주라고 놀릴 때 눈을 흘기던 그 표정까지도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 표정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연희에게 찾아볼 수 없었다. 연희는 매 하루 살아남기 바빴고 나는 아버지인 전하의 눈을 피해 여행을 다니느라 연희를 보기 힘들었다. 두 해 정도만에 얼굴을 본 연희는 나에게 극존칭을 쓰며 몸을 사렸다. 더 이상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연희라고 불렀던 내 입도 연희낭자라고 입이 떼어지고 말을 높여 불렀다. 언제 쯤 다시 어릴 적 우리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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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훈 오라버니의 말에 혼란스러워진 나는 달이 뜬 까만 밤이었지만 집을 나섰다. 집에서는 가슴이 너무 답답해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 보니 웃음꽃이 피어난 한 기생집 앞에 내 발이 멈췄다. 기생집 너머로 바라보니 여자들 사이에 무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화월대군이 보였다. 다른 개국공신들은 행복한 표정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화월대군은 표정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그렇게 얼굴을 보다 화월대군의 눈이 바깥을 향해 나도 모르게 담 옆에 숨어버렸다. 이젠 마주보면 안 되는 얼굴인데, 어릴 적 나를 놀리던 그 사람인데, 우리 가문을 망하게 한 가문의 자식이자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인데 왜 계속 눈이 가는지 나조차도 몰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내 앞을 가로 막는 한 사람이 있었다.
“연희야, 나를 보러 온 것이냐.”
옷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비단 사이로 보이는 오똑한 코가 그것이 화월대군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만들었다. 그 코는 내 눈 바로 앞까지 와 화월대군의 눈을 쳐다볼 수 없게 만들었고 말도 나오지 못 하게 만들었다.
“그...그것이 아니오라..”
“아직도 너는 메주를 똑 닮았구나.”
“예...?”
“푸하하하 그 메주같은 표정을 오랜만에 보니 배가 빠질 듯 하구나.”
“오라버..! 아니.. 화월대군! 그만 놀리십시오!”
“싫다면?”
“예?”
“놀리지 말라는 것은 예전처럼 지내지 말자는 소리로 들리는데, 나는 너와 예전처럼.. 그렇게 지내고 싶다, 연희야.”
“하지만 대군께서는 우리 가문을..”
“저번에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말로도 안 되면 필요한 걸 다 주겠다. 그걸로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숨을 다시 주실 수 있으시다면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그리 할 수 없으시다면 저는 아직도 대군을 용서할 수 없어요.”
“너도 너의 오라비와 똑같이 어리석은 말을 하는구나. 현실적이지 못 한 건 그 집안의 내력인가보구나.”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됐다. 오늘은 이만 가 볼테니 다음에 보자꾸나.”
너무나 미웠다. 우리 가문의 상처를 하나도 모르면서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화월대군이 미웠다. 예전에는 미워도 가끔 잘 챙겨주는 모습에 그리 장난스런 사람만은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그 사람은 나에게 원수보다 못 한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낭월대군이 화월대군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 못난 사람인데 왜 지켜주려고 하는 것인지.. 그러한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연희야, 어디 갔다 오는 것이야.”
“오라버니..”
“영훈 형님께서는 주무시니 걱정 말거라. 비밀로 할 터이니. 무슨 고민이 있어 돌아다니는 것이냐.”
“그것이.. 오라버니께서는 알고 계셨습니까?”
“무엇을?”
“낭월대군께서 저를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너뿐일 것이다. 어릴 적 너에게 해주는 행동, 말투 하나하나가 너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다. 아직도 그럴 지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어릴 적엔 틀림 없이 주연 형님은 너를 연모하고 있었다.”
“저도 낭월대군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 가문과는 절대 혼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너가 하지 않으면 그리 원하는 복수를 할 수 없다, 연희야.”
“...”
“사실 연희 너가 낭월대군을 싫다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좋다니 다행이구나. 너가 좋아하는 사람과 혼인하여 행복할 수 있도록 영훈 형님과 내가 성실히 도울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약조해다오. 낭월대군과 혼인하겠다고.”
“저에게 시간을 주세요. 낭월대군과 더 가까워진 후에 혼인하고 싶습니다. 아직은.. 예전처럼 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알았으니 얼른 자자, 늦었구나.”
오늘도 더보이즈가 너무 예쁘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