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한 점 섞이지 않은 수수한 햇볕이 커튼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날씨 참 좋다.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잠에서 깬 경수가 커튼을 창틀가까이 걷어냈다. 떨어진 옷가지를 주워 세탁물통에 내놓은 뒤, 요리를 시작한다. 파란색 스트라이프 무늬가 새겨진 앞치마를 두르니 제법 요리사 같기도 했다. 발걸음을 조금 옮겨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 둘이 먹을양만 덜어 작은 접시에 올려두고 프라이팬을 달궈 야들야들한 계란프라이 두개를 재빨리 구워낸다. 마지막으로 수저를 두벌 챙겨 올려놓으니 소박하긴 하지만 제법 따뜻한 식사가 완성됐다. 창가로 눈을 돌리니 햇볕이 따갑지도 않은지 색색대며 곤히 잠들어있는 제 애인을 한껏 눈에 담았다. 또 발걸음을 몇번.
-백현아, 일어나야지.
-조금만더….
잠에 취해 웅얼거리는 백현이 더할나위 없이 사랑스럽지만 밥은 그것과는 또 별개의 문제라, 그저 잠에 빠져들고만 싶어하는 얼굴을 애써 모른척하며 백현을 일으켜 세웠다. 나가서 밥먹자. 살짝 뜬 머리와 퉁퉁 불어 뜬건지 감은건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눈이 또 귀엽기만 해서 기분좋게 웃었다. 식탁의자를 잡아끌어 수저를 드는 모습이 유치원가기 전 아침의 아이의 그것과 비슷했다. 백현이 좋아하는 자반콩에 불고기, 명란젓에 햄고추장찌개까지. 이곳에선 자주볼 수 없는 익숙한 반찬들이 상에 놓인것을 보자 백현이 번쩍 눈을떴다. 뒤이어 한껏 의문을 담은 백현의 물음.
-어디서 사왔어?
-형한테 부탁했어. 너 좋아하는거 오랜만에 해주고싶어서. 종종 먹고싶어했었잖아.
-맛있네. 오랜만에 먹으니까 좋다. 맨날 빵쪼가리, 밀가루 질려….
-그랬어? 형한테 더 보내달라고해야겠네. 많이 먹어.
-너도.
무언의 식사가 이어졌다. 오랜만의 한식이 반가웠던것인지 복스럽게도 먹는 백현에 더이상 식사를 하지않아도 배가 부를것같았다. 오랜만에 상제리제 거리 산책할까? 추억도 되새길겸. 밥만 열심히 먹는 줄 알았는데 내게 귀기울이고 있었던것인지 작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해보였다. 백현의 식사를 치우고 이를닦았다. 너는 그새 머리를 감은것인지 물기가 서려있는 머리를 하고선 내 앞에 앉았다. 그러면 나는 익숙한듯이 드라이기를 들어 네 머릿결을 정리한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늦은 식사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자 졸음이 밀려오는것인지 너는 또 눈을 감는다. 다 됐네, 예쁘다.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백현의 어깨를 톡톡치자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기시작한다. 청바지에 가디건을 대충걸친 백현에 입꼬리가 한없이 올라갔다. 뭘해도 예쁘구나, 너는.
도망치듯 온 프랑스는 평안함을 가져다주었다. 조금만 걸어나가면 느낄 수 있는 센느강은 우리에게 또다른 안식처가 되주었다. 모든것이 천천히, 또 느리게 흘러갔다. 강렬히 내리쬐던 햇살이 한발 물러서고 수평선과 지평선이 맞닿을 시각즈음 백현과 손을 맞잡고 정처없이 샹젤리제 거리를 걷다보면 그것이 나름의 우리 둘사이에 무엇인가 가져다 주기도했다. 자리를 잡는데 까지 2년, 불어가 귀에 트이고 입에 트일때까지 또 3년이 더 걸렸더랬다. 영어권나라로 갈걸 그랬나 하면서 웃던 백현이 살큼 떠올랐다. 하루하루가 참 따뜻했다. 상대적으로 물가가 세 궁핍했던 처음 2년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이불마저 넉넉히 살 돈이 없어 한국에서 정신없이 챙겨온 일인용 이불을 둘이서 나눠 덮으면서도 행복하다 말할 수 있었다. 90년대 흑백 텔레비전을 연상케하는 작은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들리지도 않는 불어를 더듬더듬 읽어가던 우리의 모습이 또한번.
완전한 저녁이다. 근처에서 간단히 먹고가겠냐는 내물음에 그럼 그러자며 대답한 너의 손을 이끌고 작은 샌드위치 가게에 들어섰다. 아메리카노 두잔과 호밀빵 샌드위치가 예쁘게 담겨 나왔다. 오물오물 거리며 잘도먹는 백현에 절로 눈꼬리가 호선을 그려냈다. 창가에 앉아 달빛이 여과없이 비춰졌다. 태양빛에 진배없이 반짝이는 달빛이 너를 많이 닮은것같다. 이곳에서 달력을 하루하루 넘기다보면 생각이 참 많아진다. 마냥 이대로의 정처없는 삶을 누릴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이 시간과 여유도 언젠가는 끝날것임을 알기에. 좀 더 많이 누리고 함께 하려하지만 다짐은 다짐으로 남을뿐 정작 실천되는것은 몇없다. 잡생각을 뒤로하고 샌드위치 가게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고급스럽게 늘어져있는 가로등길을 몇 지나다보면 익숙한 대문이보인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언젠가 한국에서 백현이 선물해줬던 키링을 대롱대롱 달고있는 열쇠를 꺼내 철컥하고 문을 열어낸다.
-나가기 전에 씻었으니까, 나 그냥 잘래.
-알았어. 근데 이는 닦고자.
-여튼 도경수. 넌 정말 건치상 줘야해.
툴툴거리면서도 욕실로 향하는 백현에 경수가 하하 웃었다. 걸치고나갔던 가디건을 벗어 개어두고 백현이 아무렇게나 벗어두고간 청바지를 집어 함께 두었다. 물소리가 멎은것을 보니 다씻은듯하다. 뽀얀 얼굴을 한 백현이 침대로 올라와 자리를 찾았다. 꼼살대며 품에 안겨오는 백현의 체온이좋다. 언제까지고 누리고싶은 내여유, 백현.
이곳에 온지도 어언 8년이 다되어간다. 수많은 햇볕을 백현과 함께 맞았다. 이 시간이 언제 끝날지는 미지수이겠지만 매순간을 너를 위해 살려한다. 강렬히 내리쬐는 햇빛보다도, 아련히 빛나는 달빛보다도 더 밝고 빛나는 너. 영원히 누리고 싶은 나의 프리돔.
백현을 두팔에 안은 경수의 눈이 다 감길때 즈음 달빛이 둘의 실루엣을 감쌌다.
항상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예쁜 오백을 써보고싶었어요 오백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