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쾅, 문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놀려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문에 난 작은 구멍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더니 검은 후드를 걸치고 삐딱하게 서 있는 김원식이 보였다. 김원식이 나를 찾아 올 일은 하나뿐이다. 왜 하필 한 달에 한 번 겨우 쉬는 오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릿속으로 급하게 날짜를 세어보았다. 그러나 오늘을 매달 김원식이 나를 찾아와 돈을 수금해 가는 그 날이 아니었다.
나는 의아함에 조심스레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가을이 다가오는 모양인지, 싸늘한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었다. 목에 두른 목도리를 더욱 더, 꽁꽁 싸맸다. 그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이 너무 싸늘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김원식 앞에서 작은 기침으로 약점을 드러냈다.
"...뭐야? 너 감기 걸렸어?"
매번 싸늘하게 돈만을 독촉하던 김원식. 하지만 오늘을 조금 달랐다. '그' 김원식이 안절부절 못하는-동시에 안 그런 척을 하면서- 모습은 조금 색달랐다. 아니, 많이. 나는 그런 김원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김원식은 믿을 수 없는 남자다.
빚을 져 야반도주를 하고 도망간 나의 아버지, 그를 이용해 태연하게 나를 협박하던 사람. 쑥대밭이 된 우리 집 바닥에 모든 의욕을 잃은 채 널부러져 있던 나에게 다정하게, 그러나 날카로운 송곳니를 들이대던 그.
ㅡ씨발, 이 새끼 결국 튀었네?
ㅡ.......
ㅡ네 아비가 빌린 돈이 얼마인 줄 알아?
ㅡ...몰라, 악!
ㅡ1억 삼천. 네가 갚을 능력이나 있어서 말대꾸하는 거냐? 주제도 모르는 년이,
앞으로 그 돈은 네가 다 갚는 거야. 알겠어?
내 머릿채를 휘어 잡고, 씹어 뱉듯이 속삭이던 그 한마디로 내 인생은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 날 이후로 난 김원식이 소속된 조직 산하의 사창가에서 몸을 팔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이 날이, 이 순간이 모두 눈에 선하다. 비디오 테이프로 다시 돌려 보는 것처럼 눈만 감으면 다시 재생됬다. 불행의 시작을 계속해 보여주는 잔악한 신을 원망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이거 먹어. 궁상맞게 삼각김밥 이런 거나 처먹지 말고. 니 아프면 나만 손해야."
김원식이 검정색 비닐 봉투를 건넸다. 쟤가 원래 저런 애였나? 나는 기억을 헤집느라 그 것을 건네받을 새도 없었다. 뭐야, 안받아? 김원식이 억지로 내 손을 잡고 비닐 봉투를 쥐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뒤돌아 뚜벅뚜벅 계단을 올라 갔다.
나는 멀뚱멀뚱 김원식의 뒷 모습만 바라보다 손에 들린 비닐 봉투 속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 속에는 하얗고 네모난 죽 용기가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죽에서 풍겨오는 냄새가 너무 먹음직스러워서, 그리고 그 열기가 너무 따뜻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예상치 못했던 이의 위로는 생각보다 감동스러웠다. 나는 외로움만을 속에 욱여넣었을 뿐이지, 결국은 따뜻함에 굶주려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