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꽤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가랑비 탓인지, 한층 더 추워진 날씨에 겉옷을 여매며 멍하니 벤치에 앉아만 있던 차에, 익숙한 목소리가 고요하다 못해 메말랐던 저의 적막을 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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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 또 여기서 멍때리고 있었어요? 그만 일어나서 나랑 같이 밥으러 가요. "
정국이었다 윤기의 후배로 알게된 정국은 곧잘 '누나 누나'소리를 뱉으며 저를 잘 따랐고,
3년 전 오늘, 그러니까 윤기가 세상을 떠난 날 부터 틈만나면 꺼지려 하는 저의 작은 불을 항상 지켜주었다.
모든 것의 의미를 잃고 자신마저 포기해버린 저를 정국은 묵묵히 지탱해주었다.
" 아....정국아, 나 오늘.... "
" 아, 오늘 벌써 그렇게 됐구나
난 괜찮아요 얼른 가봐요 윤기 형 누나 기다리겠다. "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곧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애써 실망감을 감추는 정국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요즘들어 정국을 볼 때면 가슴에 묘한 감정이 얽히고 섥힌 기분이 자주 들고는 했다.
전까지는 정국에게선 전혀 느끼지 못했던 기분, 이건 분명 저가 변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끝까지 부정하며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해봐도 결국 도달하는 답은 자신이 변했다는 것 이기에 결국 생각을 포기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도착한 납골당 앞에서 살짝 긴장을 하고 말았다.
과제를 핑계로 근 한 달간 오지못했던 것은 둘째치고 눈치백단 민윤기가 비록 하늘에 있을지라도 변한 저의 마음을 눈치채진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만큼 변화하는 자신때문에 윤기에게 많은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전과는 달리 오늘의 발걸음은 무겁지 못해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분명 한 달 전 방문 때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지금 이러는 것은 분명 저에게 변화가 생겨서 그런 것이라.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윤기의 앞에 섰다.
딱 오늘이 3년 째 되는 날이었다. 윤기가 떠난지.
평소였다면, 한 달 전처럼 미친 사람인 양 떠들어 댔겠지만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혼란스러워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서있기만 했다.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점점 지워지고 있었고, 채워지지 않을 것 같던 빈자리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채워지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 이상 머리가 복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싫었다. 윤기가 없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던 제가 어느 새 윤기가 없는 미래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제 윤기를 생각하면 정국이 떠올랐다.
윤기를 따라 죽어버릴 껄, 하고 생각을 하면 누나는 살아서 윤기 형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던 정국이 생각났고,
윤기와 가장 많은 추억이 담겨있는 그 벤치에 앉아 멍하니 추억을 되살리다 보면, 어느 새 정국이 언제쯤 와서 말을 걸어올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윤기 앞에 있는 이 순간에도 이곳에 오기 전 보았던 정국의 표정으로 인한 그 감정이 아직도 잠잠해지지 않고 있었다.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더욱 무거워진 마음만 떠안은 채로 서둘러 납골당을 나왔다.
아니, 나올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 훨씬 정확한 표현 일 것이다.
지금의 상태로 더 있다가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작은 줄기의 가랑비는 무시했던 제가 우스워질만큼 어느새 저를 축축하게 만들어 더욱 위태로운 상태로 치닫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겨우 버틸 수 있을 정도까지 버텨왔건만 도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저도모르게,
" 여보세요? "
" 정국아, "
" 네, 누나 왜요? "
" 우리, 밥먹자 "
정국을 찾고 말았다.
익숙한 글이다 싶으면 맞을겁니다...독방에 잠깐 올린 적 있거든요
덕분에 가랑비라는 예쁜 제목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냥 한번 써본 글이라 별로죠? 분량도 엄청 적네요 보니까.
그저 윤기의 아는 동생이라고만 생각했던 정국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제 안에 들어와버린 거예요.
서서히 젖어가는 가랑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