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①
한창 설거지를 하고 있던 싱크대 속에 디저트가 담겨져 있던 접시들이 우루루 쏟아졌다. 방금 전 것들만 닦으면 숨 좀 돌릴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점심시간이 마무리되는 때 였다. 하기야 남의 돈 받고 아르바이트 하는 주제에 쉬는 시간은 무슨… 착잡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 내 모습을 흘끗 쳐다보던 은정언니가 입을 열었다.
ㅡ OO이 넌 무슨 한숨소리가 팔십대 노인같냐
ㅡ 에이 팔십대는 너무한 거 아녜요?
ㅡ 너무는 무슨! 나 처음에 너 한숨 쉬는 거 보고 깜짝 놀란 거 알아?
생긴 건 완전 여성스러운 애가 한숨을 쉬는데 세상 다 산 노인같잖아! 잔뜩 과장된 제스쳐를 취하는 언니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나도 내가 애늙은이같은 건 알지만 저 정도는 아닌데, 은정언니는 참 과장을 잘했다. 접시 모서리에 꾸덕꾸덕하게 말라붙은 치즈를 닦아내던 중 알록달록한 색의 고무장갑이 떨어졌다. 갑작스레 날라온 물체에 놀라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도경수가 서 있었다. 나는 눈만 깜빡였다.
ㅡ 십 분 뒤에 온수시설 점검 있대요
ㅡ 그럼 하루종일 찬물로 설거지 하란 거야? 야, 경수야…!
은정언니의 물음에도 도경수는 제 할 말만 끝낸 뒤 주방을 벗어났다. 분명 주방에 있는 알바생이 나만 있는 게 아니란 걸 알텐데 도경순 왜 내 것만 준비해줬을까, 괜한 망상에 심장이 두근댔으나 은정언니의 비명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에이 씨댕! 물 조올라 차가워! 십 분 뒤라더니 벌써 점검을 시작한 것 같았다. 냉수나 맞고 정신 차리자 OOO. 나는 하나뿐인 고무장갑을 언니에게 건냈다.
ㅡ 이걸 왜 나를 줘?
ㅡ 언니 추위 잘 타잖아요. 저는 괜찮아요
ㅡ 에이 그래도 경수가 너 준 거 아냐?
아닐 거 예요.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수세미를 쥐었다. 도경수가 나를 준 거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되는 가설이다. 도경수는 내가 가진 것을 뺏으면 뺏었지 뭔가를 줄 위인이 아니였다. 그건 고등학교 삼 년 내내 지켜봤던 빠순이로서 장담했다. 분명 사장님이 주방팀에 고무장갑이라도 한 짝 가져다주라고 일러서 말 그대로 한 짝만 챙겨 가져온 게 뻔했다. 내기할 수도 있었다.
ㅡ 근데 OO아 내가 생각해봤는데…
ㅡ 언니 또 실없는 소리하지마요
ㅡ 야! 내가 무슨 실없는 소리를 한다그래!
ㅡ 저번에도 훈남 손님이 언니한테 관심 있다고 설레발 쳤다가 여자친구 왔잖아요
야, 내가 그 얘기 꺼내지 말랬지! 그리고 이번 건 그런 종류의 생각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은정언니는 양 볼까지 발그래 붉히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나보다 두 살이나 많으면서 참 귀엽단 말이야,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알겠어요, 뭔데요? 언니는 그제서야 큼큼 목을 축이며 눈을 깜빡였다. 경수 있잖아, 너 좋아하는 것 같아. 나는 그 말 하나에 박장대소를 했다.
ㅡ 아하하, 하하… 아우 눈물이야…
ㅡ 야 OOO! 나는 진짜 생각하고 말한 건데 왜 웃어!
ㅡ 말이 안 되니까 그렇죠.
도경수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인데 심지어 그 상대가 나라고? 생각만 해도 웃음이 터졌다. 기쁨이나 설렘 뭐 그런 게 아니라 어이없음 그런 쪽으로 말이다. 은정언니는 내 반응이 싱거웠는지 열변을 토하며 이유를 댔다. 잘 들어봐, 도경수 맨날 너 쳐다보고 있다니까? 내가 목격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예요! 그리고 재 S대 의대생 아니냐? S대 의대생이 무슨 아르바이트를 해? 분명 이유가 있으니까 하는 거지! 소문으로는 집도 엄청 잘 산다던데. 그리고 결정적으로 고무장갑! 왜 너한테만 줘? 그것도 포스기 지박령인 도경수가 직접 움직이면서까지. 이정도면 빼박아냐? 은정언니의 이유들은 죄다 그럴싸했다. 대상이 도경수가 아니었다면 나도 솔깃하며 가슴을 떨려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는 도경수다, 동화고 얼음왕자이자 상또라이 도경수. 나는 코웃음을 쳤다.
ㅡ 걔 원래 사람 잘 꼬라봐요. 그리고 의대생이 아르바이트 하는 게 뭐 어때서요? 제 친구네 부모님도 사회성 기르라고 시키던데… 그 고무장갑 분명히 점장님이 시키신 거라니까요. 장담해요.
ㅡ 무슨 장담까지 하냐? 아니 정황상 틀린 게 없는데 혹시나라는 마음도 없어 너는? S대 의대 에이스 도경수잖아!
ㅡ 그니까 혹시나 안 하는 거죠. 언니 말대로 S대 의대 에이스 도경수가 미쳤다고 저를 좋아해요?
그리고 저는 이미 한 번 차인 전적이 있단 말예요. 차마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 한 이 말은 도경수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나는 거품이 나질 않는 수세미에 퐁퐁을 뿌려 조물거렸다.
*
ㅡ 저, 저기… 경수야
ㅡ 야 너 나 알아?
ㅡ 으, 으응?
ㅡ 얻다대고 경수야, 친한 척하지 말고 성 붙여
ㅡ 미안! 진짜로 미안…
ㅡ 됐고 용건이나 말 해
ㅡ 그러니까… 저, 저기… 경수… 아니, 아니! 도경수… 나 너 좋아해!
자그만치 삼 년이라는 시간동안을 바라봤던 도경수와의 첫만남 그리고 첫대화는 생각보다도 훨씬 쇼킹했다. 그 땐 바로 눈 앞에 있는 도경수가 너무너무 잘생겨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극강의 싸가지였다.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이틀 밤을 새서 만든 케이크를 건내며 고백했을 때의 도경수의 표정을.
ㅡ 근데 어쩌라고
ㅡ …어?
ㅡ 니가 나 좋아하는데 뭐 어쩌라고
이래서 기집애들은 질색이라니까, 존나 쓸 데 없는 거에 불러내고 지랄이야. 그건 마치 내가 벌레를 볼 때 내는 표정과 비슷했다. 그것도 다리가 엄청 많은 벌레. 나는 그 날 태어나 처음으로 인생의 쓴 맛을 봤다. 그리고 그 쓴 맛은 대학을 입학한 뒤 꼬박 이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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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간직하던 글 풀어요 *'ㅂ'* 심심풀이 땅콩 삼아서 보시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