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②
오늘 카페 휴무래. 나오지 마
11:32 AM 010-1234-0112
따뜻한 이불 속에서 나가기 싫어 꼼지락 거리기를 십 분, 뜬금없이 도착한 문자 한 통에 눈만 깜빡였다. 발신인은 사장님도 은정언니도 아닌 생전 처음 보는 번호 11자리였다. 분명 비상연락망 담당은 저 두 명이 전부였는데… 그러나 다시 도착한 문자 한 통으로 인해 내 궁굼증이 해결됐다.
나 도경수. 번호 저장해도 돼 11:33 AM 010-1234-0112
젠장, 이럴 거면 궁굼해하지 말걸! 밀려오는 후회에 이불을 뻥뻥 차던 도중 도착한 문자 한 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번호를 저장하라는 말을 하지 않나? 저장해도 된다니, 꼭 허락을 맡은 기분이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다. 도경수는 고등학교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
ㅡ OO아, 진짜 미안한데 대신 포스기 좀 봐주라…
은정언니는 별 다른 이유를 붙이지 않았지만 표정 하나하나와 몸짓에서 모든 게 설명됐다. 삼 일 째 변비라더니 필이 온 것 같았다. 나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언니의 등을 두드렸다. 난 주방일이 좋았다. 물론 카페에서 하는 아르바이트 한정으로 말이다. 처음 취직이 됐을 땐 40대 아줌마도 아니고 멋 없게 웬 주방일이냐며 투정을 부렸지만 접시를 닦게 된 건 내 인생 신의 한 수 중 탑쓰리 안에 드는 일이었다. 이유야 단순했다. 포스기에는 일명 포박령(포스기 지박령)인 도경수가 있기 때문이였다.
슬쩍 곁눈질한 도경수는 굉장히 언짢아 보였다.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 시간대에 홀로 주문을 받고 있으니 그런 것 같았다. 어차피 도경수는 나같은 오징어에겐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냥 철판 깔고 들어가자!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가갔다. 도경수 쪽에만 길게 늘어져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나는 경련이 날 것만 같은 미소로 주문을 받았다.
ㅡ 제가 자리 작작 비우라고 말 했…
ㅡ 네, 손님 아메리카노 한 잔 카페라떼 한 잔…
맞으시죠? 하하… 나를 은정언니로 착각한 도경수는 존내 살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그걸 들은 나는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고. 눈 앞에 있는 손님은 이건 뭔 병신이지?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도경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로 앞에서 저기요! 를 외치는데도 넋이 나가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주문을 받았다. 왠지 모르게 멀미가 났다.
ㅡ 미안
ㅡ 으, 으응?
ㅡ 이은정 누나인 줄 알았어
ㅡ …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주문을 받는 내내 한 생각은 딱 하나였다. 도경수가 방금 전 사건을 잊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한 순간 도경수는 곧바로 내게 사과를 해왔다. 시발, 도경수가 S대 의대생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머리 좋은 놈이 잊을 리가 없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은정언니가 원망스러웠다.
ㅡ 야 OOO, 있잖아…
ㅡ 저기요
나는 분명 도경수의 말을 들었다. 그것도 토시 하나 빼먹지 않고. 그러나 내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 손님에게 온 신경이 쏠린 척 고개를 돌렸다. 도경수가 무슨 말으 할 지는 몰라도 등골부터가 서늘한게 영 불안했기 때문이였다. (사실 도경수와의 대화는 늘 무서웠다) 결과적으로 이 손님은 내게 구세주나 다름 없었다.
ㅡ 네, 손님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ㅡ 그게 아니라 아까부터 지켜봤는데요 너무 제 스타일이셔서요
ㅡ …넹?
ㅡ 번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두근두근, 심장이 멈추질 않았다. 남자가 잘생기거나 내 스타일인건 절대 아니다. 그래, 이건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주방의 노예로 전락해 카페 로맨스 짓밟힌 내 여린 하트에 마데카솔을 발라주는 느낌이였다. 볼이 뜨끈해져왔다.
ㅡ 저, 저는… 그러니까…
ㅡ 손님, 영업중에 번호교환은 안 됩니다
화사하게 필터가 꼈던 시야에 먹물이 끼얹어졌다. 나지막한 도경수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남자는 그런 도경수를 좋지 않은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 쪽이 무슨 상관이세요, 주고 안 주고는 이 분 마음이죠' 그래, 그건 내 마음이지! 잘 한다! 나는 속으로 내 눈 앞에 남자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도 말하지 않았는가, 도경수는 고등학교 시절과 변한 게 없었다.
ㅡ S대 간호학과네
ㅡ 너, 너… 누군데…!
ㅡ 그럼 13학번 김종대는 알고?
나는 태어나 단 한 번도 S대학교가 궁굼했던 적이 없었다. 물론 환상같은 거야 있었지만 그 이상 관심을 두진 않았단 말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런 내 사상에 금이 갔다. 도대체 S대 간호학과 13학번 김종대가 누구길래 이 남자의 얼굴이 이렇게나 허옇게 질리는 걸까. 도경수는 한 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남자를 내려다봤다. 순간 오금이 저렸다. 흡사 고등학교 시절 제게 시비를 걸던 남자 무리들을 조지기 전 지었던 표정과 비슷해서 였다.
ㅡ 과잠 입고 학교 주변에서 설치지 마
ㅡ 네, 네!
아아… 님은 갔습니다, 그것도 졸라 멀리… 물론 남자가 내 타입은 아니었지만 생애 첫 번호따임이였는데 마음이 아팠다. 적어도 내 선에서 해결할 일을 제가 처리했다며 사과라도 할 줄 알았던 도경수는 뻔뻔했다. 간호학과 애들 상태 안 좋아, 너 나한테 고마워해야해. 씨발, 목구멍까지 욕이 차올랐으나 꾸욱 삼킬 수 밖엔 없었다.
ㅡ 저기 근데…
ㅡ 뭐
ㅡ 우리 영업중에 번호 교환 안 되는 거 였어?
은정 언니는 많이 한다던데… 괜한 미련에 툴툴거리자 도경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히, 히익…! OOO, 이 미친년아 상대를 가려가면서 깝쳐야지! 사랑에 눈이 멀어 목숨을 내놓은 셈이였다. 그 순간 똥통에 빠졌나싶던 은정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둘러 언니에게로 달려갔다.
ㅡ 언니! 나 얼른 설거지 하러 갈래요
ㅡ 엉?
ㅡ 빨리 모자 받아요, 응?
다행스럽게도 도경수는 그런 나를 붙잡지 않았다.
*관전 포인트*
1. OO이에게만 따로 문자를 보낸 경수 2. OO이를 은정이로 착각해 미안해썬 경수 3. 급한 마음에 거짓말한 경수 ㅠㅅㅠ 4. S대학교 간호학과 김종대는 누구인가?
경수는 OO이가 은정이에게 달려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음ㅋㅋㅋㅋㅋㅋ 왜냐면 번호교환금지는 구라거등 쿄쿄 >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