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틈 사이로
w. 량군(for. 브로)
5.
유세르공국의 역사는 카잔과 함께했다. 카잔제국이 왕국인 시절부터 대륙의 심장을 수호한 것은 유세르공국이었다. 역사가들은 일개 왕국이 공국을 거느린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었다. 다만, 정설로 여겨지는 것은 황금시대의 종말 이후 카잔왕국, 염국(炎國), 뤼진느, 유세르공국, 현(賢). 이 다섯 국가를 세우고 현재 대륙의 형태를 정립한 각 국의 건국왕들 간에 있었을 모종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설이다.
유세르공국은 대대로 대륙의 심장, 성지(聖地)를 수호했다. 성지에 관한 자료는 크게 알려진 것은 없으나 공국(公國)을 다스리는 공왕(公王)이 수호자라는 것만은 명확했다. 또한 공왕의 위(位)는 이름으로 세습되었는데, 이에 대한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 * *
"그래서, 부족하다?"
공국의 중심부에 위치한 공왕저(公王邸)엔 서늘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사내는 흑좌에서 일어나 방 중앙에 기묘하게 일그러진 거대한 공간 위를 거닐었다. 아니, 정확히는 공간 위에 고요히 휘몰아치는 바람에 몸을 실었다.
"이봐, 날개.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사내는 섬세히 세공된 검집에서 검을 빼들었다. 검신은 일반적인 그것들과는 무척이나 다른 형태를 보였는데, 마치 흑요석으로 만들어낸 것 같이 투명하고 짙은 흑색을 띠었다. 사내가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오직 사내 주위에서만 꿈틀대던 바람이 검을 따라 춤을 추었다.
"안 그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미처 문장을 맺기도 전에 사내가 날카롭게 뻗어낸 검을 따라 바람이 고동치며 방 한 곳을 향했다. 공기를 가르는 바람의 마찰이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이 정도 분풀이는 받아줘야 하는 것 아닌가."
"…충분히 받아드렸습니다."
"자넨 여전히 박정하군."
바람이 향한 곳에서 잠시의 번쩍임과 함께 내실의 흑막이 한들거리다 이내 제 자리를 찾듯 가라앉았다. 방 안은 모든 벽과 창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있었다.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빛 한 점 들지 못해야할 방 안은, 기이하게도 정 반대편에 있는 남자가 찬 검집의 정교한 세공이 보일 정도의 시야가 확보되었다. 그것은 방 중앙의 거대한 원 모양을 그리고 일그러진 공간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공간에서 뻗어 나오는 빛은 안개와도 같이 가라앉아 있었다.
"각하. 그분께오선 보다 자세한 정황을 원하십니다."
"이보다 더한 노릇을 하라니, 위대한 자네의 그분께선 내게 무엇을 바라신단 말인가."
"―공작 각하."
"되었네. 자네에게 뭔 말도 못하겠군."
"송구합니다."
"원하시는 대로 눈과 귀가 되어드려야지, 내 무슨 힘이 있겠나. ―고작 갇힌 자의 운명이 그러한 것이지."
"……."
"뜻대로 해드리겠다 전하게.“
“…….”
“아, 더불어. 옛정을 생각해서 부디 적당히 부리시라 간청하였다고도 전해주시게. "
사내를 공작이라 칭한 남자는 사내의 마지막 말에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꾸벅 경례를 하고 이내 흑막을 걷어 창을 열었고, 이내 사라졌다.
"하여간에 주종이 똑같군."
공작이라 불린 사내, 세훈은 열린 창을 바라보며 투덜댔다. 저만 날아가면 다인가. 빛이 들면 고달파지는 것은 나인 것을, 세훈은 어느새 자리를 옮겨 창을 닫고 검은 천은 단단히 여미었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 스며든 햇살에 분개하듯 이형의 공간이 요동쳤다. 세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지체 없이 등을 돌려 이지러진 기형의 대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
“야!!!”
시우민은 화가 났다. 첸의 성화가 지겨웠던 까닭이다. 성에서 방치되었던 그 날, 우여곡절 끝에 성을 빠져나와 돌아온 자신을 반겨주는 것은 첸의 취조나 다름없는 질문세례뿐이었다. 첸은 시우민에게 정말 쉴 새 없이 물었다. 저와 헤어졌던 황궁 어귀에서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풀 한포기까지 묘사하라 닦달했다. 시우민도 처음엔 황궁에 가기 전에 보았던 첸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리며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벌써 사흘이나 지난 오늘에도 같은 이야기를 되묻는 첸의 얼굴을 마주하며 참았던 짜증이 터졌다.
“갑자기 왜 성질이야.”
“너라면 지금 짜증 안 나게 생겼어? 벌써 사흘째 몇 번이나 묻는지 알긴 하냐!”
“첫 날에 지쳐보여서 세 번, 어제 다섯 번. 그래도 오늘은 처음인데?”
“야!!!”
“아, 왜.”
“마지막으로 말하건대, 더는 이 형님 시험하지마라. 응?”
“흐음, 글쎄다. 애초에 누가 형님이라고.”
체에에에엔! 시우민의 목소리가 기어이 백주대낮의 시전바닥을 울렸다. 씩씩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시우민을 보며 첸은 어깨를 으쓱하곤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헤쳐 나갔다. 시우민은 오늘에야말로 첸과의 위계질서를 바로하겠다고 결심하며 꼭 저 얄미운 갈색 머리칼을 쥐어뜯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우민이 제 앞마당이라 여기는 시전은 첸에게도 마찬가지인지라 첸을 쫓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북적거리는 거리보다 시우민의 발걸음을 붙잡는 것은 사람들의 말이었다. 시우민이 발걸음을 뗄 적마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시우민을 향해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잡혀갔다던데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염려 섞인 말부터 그대로 죽으러 간줄 알았더니 용케 살아왔다며 짓궂은 놀림까지. 첸에게도 많은 인사들이 오갔지만, 첸이 지인이라고 한다면 시우민에게는 마치 잃어버린 동생과 아들을 만난 것과 같이 그의 귀환을 기뻐하며 환대했다.
시우민이 끝내 사람들에게 붙잡힌 것을 보며 첸은 설핏 웃었다. 일개 천민일 뿐인 시우민이 평민들에게까지 저렇게 환대를 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바로 시우민, 본인 자체가 발하고 있는 마법과도 같은 매력 때문이었다. 그것은 빌어먹을 조각보다도 귀한 것이었다. 시우민은 사람을 끌어당기는데 천부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순수하지만 순진하지는 않았다. 능력을 품고도 감출 줄 알며 입은 험해도 자신보다 타인을 아끼는 이가 바로 시우민이였다.
어느새 차가워진 얼굴로 건물 벽에 기대어 첸은 생각했다. 필사적으로 숨겨왔던 비밀을 황제가 알았다. 첸은 시우민이 황제의 친위대인 흑령의 뒤를 따라 황궁에 들어서자마자 사람을 풀어 황제가 무슨 수로 이 비밀을 알아챈 것인지에 대해 조사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혹여 시우민을 따르는 녀석들 중에 혈기를 누르지 못한 놈의 입방정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보았지만 그것 또한 말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시우민의 조각은 자신과 그의 죽은 부모밖에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아직 자신은 들키진 않은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해주는 것인지 알 방도는 없었으나 황제의 최측근인 ‘창공의 크리스’가 마지막으로 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시우민을 주시하고 있다면 분명 자신 또한 그 감시에 포함되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후자의 경우일지라도 시우민의 조각을 눈치챈 자라면 분명 빠른 시일내에 자신의 정체 또한 알아낼 것이 분명했다. 시우민을 순순히 풀어준 것도 –물론 그것은 무척이나 다행인 일이었지만- 그렇고 도대체가 모든 것이 미심쩍은 것 투성이었다.
얽혀가는 사고 속에도 시선이 느껴져 첸은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저를 보며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시우민이 보였다. 첸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자 시우민이 금세 울컥하는 것이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다. 첸이 시우민을 향해 강아지를 부르는 시늉을 하자 당장에라도 달려와 때릴 것처럼 굴다가도 다리에 매달린 아이를 보고 기쁜 얼굴로 안아주는 것이 보였다.
반드시. 아이와 함께 웃는 얼굴의 시우민을 보며 첸은 과거의 맹세를 되뇌었다. 피로 얼룩진 억압은 이 세상에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새 세상엔 새로운 영웅이 필요했다. 힘도, 사람도 모든 것이 충족되어있다고 첸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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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
물고기 님 제일 님 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
너무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여러가지 바쁜일이 겹치다 보니 연재가 너무 늦어졌네요 ㅠㅠ
그래도 늦은만큼 분량을 길게 쓰려고 노력했어요:-]
재밌게 봐주시고 댓글은 언제나 힘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