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짐 뭐야?"
"문학 쌤이 옮기라고 하셔서"
"이리줘"
문학 쌤은 이유 없이 나한테 심술을 부리셨다. 성적도 상위권에 선생님들 속을 썩인 적도 없는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예쁘장한 애들을 싫어한다는 소문은 꾸준히 돌고 있으나 내가 그렇게 예쁜 편도 아닌데 어째서일까. 수정이는 세훈이랑 사겨서 그런다며, 잘생긴 남자 좋아한다고 조잘거리기 바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학생을 그렇게 대하실까. 내 생각은 지금 오세훈 앞에서 웃으며 말을 걸고 있는 문학 쌤에 의해 바뀌었다. 정말 어이가 없다. 학생한테 뭐하는 짓이람.
"어머, 세훈아 이걸 왜 네가 옮기고 있니?"
"아무리 봐도 여자 애 혼자서 들기엔 힘든 짐 같은데, 남자 애들 시키시죠."
"어유, 난 에리가 혼자 들 수 있다길래."
"혼자 옮기는데 너무 힘들어 보여서 제가 돕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세훈이는 대답을 마치고,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내 팔을 잡고 계단을 내려왔다. 창고에 책들을 쌓은 뒤, 수고했다고 어깨를 토닥이자 저 쌤은 왜 너만 부려먹냐며 투덜거리는 세훈이다. 으이구, 그래서 속상했어? 하고 볼을 꼬집자 내 머리를 꾹 누르면서 응, 그랬어 하고 대답한다. 이럴 땐 완전 애라니까. 뒤이어 수정이가 똑같은 책들을 들고 들어와서 내려 놓더니, 너네 여기서도 연애해? 하고 묻다가 우리 앞에 놓인 책들을 보더니 이젠 나도 시킨다, 문학이 하면서 한숨을 쉰다. 수정이는 예뻐서 찍힌건가.
점심 시간이라서 신나게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어떤 여자 애의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세훈이가 잡아줘서 넘어지진 않았지만. 그 여자 애는 어, 미안 하며 성의 없게 사과를 하고 지나갔고, 뒤에서 보던 수정이가 일부러 저런 거라면서 날뛰었다. 세훈이는 그런 수정이를 보며 놔두라고 얘기했고, 수정이는 우리 뒤를 따라오며 화를 내는 게 맞는 거라고 자기 일인 마냥 버럭했다.
"헐 요플레 나와!"
내 말이 끝나자 마자, 세훈이는 받은 요플레를 내 식판 위에 올려놨고 영양사 선생님께선 이러다 여자친구 살 쪄 하며 웃으셨다. 나는 따라 웃으며, 이거 먹는다고 안 쪄요! 하고 자리에 앉았다. 수정이와 내가 마주보고 앉고, 내 옆에 세훈이가 앉았는데 아까 발을 걸었던 여자 애가 세훈이 앞에 앉더니 애들이 다 먹고 가버려서 그런데 같이 먹어도 되냐고 물어왔다. 수정이가 성질을 못 참고 뭐라고 하려는 걸 세훈이가 막더니 무표정으로 얘기했다.
"미안, 난 좀 불편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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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잖아."
"뭐가?"
"헤어졌으니까, 애인 사이는 아니고. 넌 나한테 어떤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난 너한테 마음이 있고. 지금처럼 계속 좋아한다고 말 할 거고."
"어이가 없다."
"난 사실만 말했어."
내가 좋아하는 과일조각을 내 접시에 옮겨주면서 오세훈은 뻔뻔하게도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런 세훈이를 째려봤고, 백현이 오빠는 어색하게 웃으며 싸우지 마라, 밥 맛있게 먹고 가자 하면서 우리를 달랬다. 오빠 얼굴 봐서 참는다 하고 고개를 돌렸더니, 세훈이가 나 봐서 참으면 안 돼? 하고 묻는다. 너 보면 폭발할 거 같으니까 그만 좀 하지? 내 말에 세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음식을 먹는 데, 집중했다. 오늘따라 조금 과하게 먹는 거 같아서 그만 먹으라고 그릇을 툭툭 치니까, 세훈이는 나 걱정해? 하고 능글맞게 물어온다. 백현이 오빠는 그런 세훈이를 보더니, 너 많이 능글맞다? 좀 변했어 하고 고개를 저었고, 오세훈은 백현이 오빠에게 눈빛을 보내며 내가 좀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애라니까, 애.
"그만 먹어, 대회 어떻게 하려고 그래."
"나 걱정하냐니까?"
"국가 인재가 이렇게 썩는 게 아까워서 그래."
"그럼 먹고."
"그래, 네 걱정해. 오세훈 걱정한다고."
오세훈은 그제서야 포크를 내려놓았다. 집에 가는 길 내내 싱글벙글 웃으면서 내게 팔짱을 끼고, 팔랑팔랑 뛰는 오세훈 때문에 먹은 음식이 올라올 지경이였다. 세훈아, 정신 사나워 하고 팔을 툭툭 치자, 그제서야 멀쩡하게 걷는 세훈이다. 어휴, 진짜 얘가 무슨 국가대표라고. 한참을 걸었는데 오세훈이 갑자기 멈춰 서더니 차를 가져올 걸 그랬나? 하고 묻는다. 왜? 하고 쳐다보자, 다 너 보는 거 같아 하더니 왜 그렇게 예뻐? 하고 묻는다. 제발요, 오세훈이 미친 게 분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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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연애는 순탄했다. 남들과 다를 것 없이 보고 싶다고 속삭이고, 좋아한다고 말하고. 괜히 얼굴을 붉히고, 서로를 만나러 가려고 주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남들과 다를 것 없이 정말 예쁘게 연애를 했다. 종종 싸우긴 했지만, 세훈이가 그런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정말 행복했다. 세훈이를 처음으로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미웠다, 처음으로 세훈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에리야."
"응? 왜? 영화 보기 싫어?"
"그런 게 아니라, 할 얘기가 있어."
"뭔데?"
사실 그 날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엄청 생각했다. 거짓말일 거라고 믿은 내가 바보로 느껴질 만큼 너는 무책임하게 행동했다. 그렇게나 내가 자기한테 매달리게 만들었으면 최소한 잊을 시간은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오세훈이 정말 너무 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보고 싶었다. 다시 나를 안아줬으면 했다.
"헤어지자, 2년 정도? 나 경기에만 집중하고 싶어."
"......굳이 헤어져야 가능한 일 아니잖아."
"내가 지금처럼 너한테 못 할 거 같아서 그래, 그러니까 헤어지자. 딱 2년만. 내가 다시 너한테 멋지게 고백할게, 응?"
"너, 나 좋아하는 거 맞아?"
"왜 대답을 못 해, 세훈아."
"지쳐, 에리야. 나 너한테 지금만큼 못 해. 앞으로 더 심할 거야. 그럼 너 서운하게 생각할 거 뻔하고, 그러다가 헤어지는 게 싫어서 그래. 그냥 지금 헤어지자, 내가 진짜 나중에 더 멋지게 고백할게. 2년만 모르는 사이 하자."
"내가 괜찮다는데, 네가 왜. 네가 왜 그러는데?"
"나 너 아는 척 안 할 거야, 상처 받지 말라고 하는 소리야. 부탁할게."
"말은 똑바로 하자, 이건 통보지."
"아, 진짜 구질구질하게. 너 질렸어 그거 하나 못 알아듣냐?"
"뭐? 이미 상처 받았어, 그냥 가. 차라리 오늘 데이트 다 끝나고 얘기하지 그랬어,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너랑 영화 본다고. 됐어, 뭐하러 내 눈물 닦으려고 해. 그냥 가."
그래도 난 네 체육관을 매일 찾아갔다, 네가 들어가는 모습과 나오는 모습을 보려고. 매일 네 집을 찾아갔다, 할머니를 보러 온 거라고 거짓말 했지만 너를 잠깐이라도 보기 위함이였다. 학교에서도 내 눈은 너를 쫓았다. 괜히 학교에 소문이 나는 게 싫어서, 수업 시간엔 잠만 잤고, 점심 시간엔 점심을 먹지 않았다. 보충 수업을 안 듣고 일찍 집에 간 것도 네가 학교에 있을 때 좀 더 편했으면 좋겠어서 그랬다. 그런데 너는 보란듯이 체육관에 어떤 여자랑 팔짱을 끼고 들어갔다. 키고 크고 늘씬하고, 내 단발머리와 달리 긴생머리에 몸매도 좋고, 누가봐도 예쁜 언니와 너는 팔짱을 끼고 출퇴근을 했고, 가끔 집에 같이 오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집을 나서는 나에게 너는.
"누나가 오해하니까, 안 왔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일찍 나가니까 더 일찍 오던가."
세훈이는 일주일에 한 번씩 여자친구가 바뀌었다. 나에 대한 배려인지 우리 학교나 학원에서 만들지 않았고, 건너 건너 있는 여고에서나, 체육관에서 다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등등 여러 여자를 만나면서 굳이 내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나한테 말했다. 얘는 너보다 뭐가 더 나아. 얘는 너보다 예뻐. 이 누나는 너보다 덜 귀찮게 해. 얘는 애교가 많아서 좋아 등등 내 마음을 바늘로 찌르다 못 해, 쑤셨다. 세훈이가 많이 미웠다. 변해버린 거 같아서 무서웠다. 수정이는 나를 걱정하며, 새 여자친구가 생기는 족족 알려줬다. 나보다 눈치도 빠르고, 발도 넓어서 뭐든 세훈이한테 생기는 일이라면 나한테 달려와 말했다. 다행인 건, 학교에선 우리가 아직도 만나는 줄 알고 있다는 거다. 학교에서 이런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면 정말 비참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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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이 대회 당일이다. 하, 진짜 어떡하지. 내가 다 떨린다. 경기에서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항상 객석에 있던 내가 선수대기실에 있다는 거 정도? 에이전시 팀과 기자가 한 차례 다녀간 후, 세훈이와 나만 대기실에 남았다. 원래 세훈이가 대회 전에는 대기실에서 혼자 준비해서 다들 나가서 세훈이가 문을 여는 순간을 기다리는데, 오늘은 달랐다. 준면이 오빠가 나를 데리고 나가려고 하자, 에리는 여기 둬 라고 말하는 세훈이 덕에 모두 놀라 세훈이를 쳐다봤지만 아랑곳 않고 나한테 손짓을 하는 바람에 꼼짝 없이 대기실에 앉아야했다. 혹시나 방해가 될까, 최대한 숨소리도 안 내고 있는데 정작 오세훈은 아무렇지 않은지 내 옆에 앉아 내 손을 잡고 어깨를 감쌌다가 볼을 꼬집었다가 하더니 싱긋 웃었다. 오빠 1등 할게 하고 나를 꽉 끌어안더니 대기실을 나갔다. 지금 객석으로 가긴 늦은 거 같아서, 대기실에 설치된 모니터로 보고 있는데 자신의 모습이 화면에 나오고 있다는 걸 아는지, 눈이 휘어지게 웃는 세훈이였다.
커피를 사들고 온 준면이 오빠가 내 옆에 앉았다. 세훈이랑 무슨 얘기 했어? 하고 묻기에 그냥 잘 하고 온다더라 하고 커피를 홀짝였다. 오빠가 고개를 끄덕이고 눕더니 화면을 보는 거 같길래, 멍하니 있다가 오빠 하고 낮게 불렀다. 왜? 하고 대답하기에 나 다 안다? 하고 말하자 뭐를? 하고 벌떡 일어난다. 세훈이가 헤어지자고 한 거, 망나니처럼 여자 만난 거. 고3 때, 나 완전 수능 말아먹었잖아. 내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기에 오빠 탓 하는 거 아니야 하자, 미안하다 하고 사과를 한다. 그런 말 들으려고 한 말 아닌데.
"그냥 요새 세훈이가 나한테 너무 잘하니까, 좋았던 일만 생각이 났는데. 문득 물에 있는 세훈이를 보고 있자니, 그 때 생각이 나서."
"미안해."
"뭐가 미안해, 그 말은 세훈이한테 듣고 싶은 건데. 오빠가 미안할 건 없지, 세훈이 보러 다니게 해 준 걸로 다 갚았어."
"그런 방법 뿐이였어, 아무래도 재단 힘이 필요했으니까."
우울한 얘기 끝내자, 대회 시작한다. 내 말에 준면이 오빠는 다시 누웠고, 나는 모니터에 눈을 고정시켰다. 출발 신호와 함께 물에 뛰어든 세훈이와 선수들은 빠르게 물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세훈이가 스타트가 조금 느리긴 했는데, 곧 바로 따라잡았다. 다치지 마라, 다치지 마라 하고 마음 속으로 수없이 외쳤다. 세훈이는 1등으로 터치패드를 눌렀다. 준면이 오빠는 에이전시 팀이 모여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나는 일어나 대기실 문 앞으로 달려갔다. 곧 세훈이가 인사와 인터뷰를 끝내고 대기실로 들어올 것이다. 두 손을 모으고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세훈이를 기다렸다. 물에 젖은 발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들자, 세훈이가 환하게 웃는다. 1등 했다.
"수고 했어, 수고 많았어."
"왜 울어."
"네 경기 보는 내내, 이 말 해 주는 거 처음이야."
"너한테, 직접."
세훈이는 나를 꽉 안아줬다. 준면이 오빠가 급하게 들어오다가 우리를 보고는 조용히 문을 닫아줬다. 문 밖이 소란스럽다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덕에 마음 편안히 세훈이에게 안겨있을 수 있었다. 세훈이는 한참 나를 안고 있다가 놓더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민망해서 고개를 숙이자, 내 턱을 잡고 다시 고개를 들게 만든다. 그때 휴대폰 알림이 울리기에 휴대폰을 찾는 척 몸을 돌리려고 하자, 다시 끌어안는 세훈이다. 세훈아, 이것 좀 놔 하고 살짝 밀어내자, 웃으며 진짜 예뻐 죽겠어 하며 몸을 막 비튼다.
"휴대폰 좀 확인하자!"
"왜 부끄러워?"
"아, 이것 좀 놔!"
겨우 빠져나와서 휴대폰을 확인하자, 수고했다는 아빠의 문자였다. 우리 딸, 수고했어. 세훈이 경기 당연히 보러 갔겠지? 마음 얼마나 졸였겠어, 수고했다. 1등이라며? 역시 우리 세훈이네. 세훈이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 할머니랑 아빠도 오늘 외식 할 거야. 문자 답장을 보내고 있는데, 오세훈이 우리 아빠한테 문자가 왔다며 좋아라한다. 나한테도 왔거든~ 하고 놀리자, 딸이랑 사위한테 다 하신 걸 보니까 역시 우리 아버지야 센스가 넘치셔 하며 능글 맞게 웃는다. 진짜 이상해졌어, 오세훈. 이런 성격 아니였는데.
"너 생각나서 경기 집중 못 해서 스타트 늦었어."
"뭐래."
"근데 너 빨리 보려고, 1등으로 들어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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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애교도 없고...... 그래서 답글들이 싸가지 없다고 느끼시면 어떡하죠...... 전 암호닉을 포함한 모든 독자님들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더 럽......
초록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