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야, 너는 민윤기 남자로 느껴진 적 없어?'
'민윤기를요? 설마요'
'에이ㅡ. 그래도 20년 가까이 알고 지냈는데 정말 1초도? 단 한 순간도 없었어?'
'미쳤어요 제가? 무슨 저런 애를...'
'친구가 남자로 보이는 거 한 순간이다. 조심해'
'헐.. 걔랑은 완전 평친감이거든요'
불과 2주 전 까지만 해도 그랬었던 나인데….
"웬 일이냐? 치마를 다 입고?"
"남이사, 뭘 입던"
"멋 부리다가 얼어죽는다. 이거 입어"
"너나 입어"
"아무튼... 꼭 입혀줘야 입지?"
"...."
좆됐다.
친구가 남자로 보이는 순간 01
"아, 너나 입으라고"
"그렇지. 승질머리 안 부리면 김탄소가 아니지"
평소와 다른 옷차림. 윤기를 만날 때면 항상 따뜻한 기모 후드티에 트레이닝바지를 고집했던 탄소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치마를 입은 채 등장했다. 윤기는 낯선 탄소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자꾸만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탄소는 윤기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구경 났냐? 그만 쳐다봐!"
"아니, 그냥. 신기해서. 너 나 만날 때 치마 입은거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 봐"
"너 만나러 나온거 아니거든"
"쨌든 나 부른건 맞잖아"
탄소는 나중에 한 턱 쏘기로 약속을 한 후 윤기에게 운전기사 일을 부탁했다. 탄소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윤기는 자신의 패딩을 탄소의 다리 위에 올려주었다. 탄소는 이런 상황 조차 두근거리는 자신이 싫어 인상을 확 구겼다. 탄소를 흘깃 쳐다 본 윤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그 표정은 좀 아니다"
"이런 친절. 진짜 적응 안되고 부담스럽거든요"
"다리가 워낙 굵어서 말이지"
"진짜 싫어, 민윤기"
"근데 너 누구 만나러 가는건데?"
"남자"
"누구? 김태형? 박지민?"
"아니. 낯선 남자"
"뭔 소리야"
"소개팅 하러"
탄소의 말에 차 안은 순간적으로 고요해졌다. 평소에는 소개팅에 시옷도 관심 없던 탄소였지만 자신이 윤기에게 두근거리는 이유가 다 남자가 궁해서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이 방법이 탄소에게는 최우선의 선택이였다. 신호등에 걸려 차가 잠시 멈추자 윤기는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탄소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쩐지.. 치마를 다 꺼내입더라니. 윤기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너 잘 되면 나만 솔크인거냐?"
"당연하지. 정 쓸쓸하면 태형이, 지민이 만나던가"
"걔네 만날 바엔 24일 밤에 자서 26일 아침에 일어날래"
"니 맘대로 하세요. 누나는 오늘 남친이나 만들러 갈란다"
탄소는 최대한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윤기를 보낸 뒤 소개팅 장소로 향했다. 까만 니트에 남색 롱코트. 소개팅남의 정보는 이게 다였다. 카페 안으로 들어선 탄소가 카페 안 남자들을 살펴 보았지만 까만 니트를 입은 남자도, 남색 롱코트를 입은 남자도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게 빨리 온 것도 아닌데 아직도 안오다니. 탄소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5통의 문자가 와있었다. 모두 윤기가 보낸 문자였다.
[만났냐]
[어때]
[잘생김?]
[어떠냐고]
[에라이]
탄소는 피식 웃으며 핸드폰 자판을 꾹꾹 눌러댔다. 잘생겼으면 좋겠…
"김탄소씨 맞으시죠?"
"네?"
"안녕하세요. 김석진입니다"
오, 지져스.
팡, 팡-. 마치 탄소의 마음 속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듯한 황홀함을 느꼈다. 석진은 적당히 큰 키, 알맞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 선해 보이는 미소까지. 정말이지 '완벽함' 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형상화 시켜놓은 듯한 자태의 남자였다. 네, 네. 마, 맞아요. 탄소가 버벅거리며 대답을 하자 석진은 환하게 웃으며 탄소의 앞자리에 앉았다.
"제가 많이 늦었죠"
"아니요!"
"....."
"저, 저도 방금 왔어요"
"아, 그래요?"
* * *
"대박이라니까, 진짜?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생길 수가 있지?"
"저 누나 왜 저러는거에요"
"소개팅하고 와서 계속 저 모양이다"
"누나, 김태형보다 잘생겼어요?"
"야 씨! 그걸 말이라고!"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나도 나름 내 얼굴에 자부심 갖고 사는 중인데"
탄소에게 태형의 말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 그저 남자가 궁한 것이였다. 민윤기한테 설레기는 무슨! 탄소는 그 날 석진과 번호도 교환했고 애프터까지 받아낸 상태였다.
"사귈거에요?"
탄소는 자신도 모르게 윤기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도 잠시, 탄소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지민을 쳐다보며 호언장담 했다.
"2주만 기다려라. 전화번호에 하트 달아서 보여준다"
"참 나, 맨날 말만 저렇게 해놓고 철벽은 엄청 쳐대지"
"탄소누나 철벽녀였어요?"
학교 다닐 때 유명했지, 시혁고 철벽녀. 얘가 나름 얼굴은 반반해서 은근 남자가 꼬였었거든. 근데 번호 따이려고 할 때마다 거절하면 될 것을 맨날 우물쭈물하다가 도망 갔어. 전속력으로. 바보 같은건지, 순진한건지. 가끔 내 번호도 팔아먹었다니까? 모르는 남자애들한테 전화가 어찌나 오던지. 아오, 내가 그 때 이후로 모르는 전화번호는 아예 안 받잖아.
윤기가 어이 없다는 듯이 웃자 입동굴이 확 드러났다. 또 두근-. 소개팅 이후 잠잠하나 싶더니 다시 시작 되었다.
"야, 너 웃지마"
"왜. 내가 웃겨서 웃는데 보태준거 있냐?"
"그냥 웃지 말라면 웃지 마, 임마"
괜찮아, 석진오빠 만나면 괜찮아 질거야. 그래, 그냥 내가 지금 썸의 출발선을 밟고 있는 단계니까 뭐든 예뻐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그러는거지. 괜찮을거야. 괜찮…
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