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놈의 복사기는 허구한 날 고장이야, 우현이 짜증을 내며 복사기를 발로 찼다. 아까 호원씨가 쓸 때 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우현이 머리를 정리하며 복사기를 사용한 사람을 곰곰이 되짚어봤다. 명수씨, 나, 호원씨, 성규씨. 문득 아까 복사기 주변을 돌며 제 눈치를 보던 김성규가 떠올랐다.
"김성규씨."
좁은 사무실 안이라 크게 소리 지를 필요도 없었다. '네?' 하고 곧장 일어나야 할 머리통이 보이지가 않았다. 조금 더 큰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컴퓨터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호원이 고개를 돌릴 정도로 크게 불렀음에도 말이다. 결국 옆자리에 있던 명수가 성규의 옆구리를 찔렀다. 팀장님이 형 불러요. 꾸벅꾸벅 졸던 성규가 눈을 번쩍 떴다. 자기 자리 바로 앞까지 와 있는 우현의 모습을 보니 조금 민망해졌다.
"회사에서 잡니까?"
"죄송합니다. 조금 피곤해서……."
"성규씨만 피곤합니까? 됐구요, 복사기 아까 썼죠."
"네? 네."
'복사기' 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성규의 눈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딱 봐도 당황하고 있다는 티가 났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사원들이 둘 쪽을 흘끗거렸다. 복사기 쓰실 때 무슨 이상있던가요? 아니요, 성규의 대답에 우현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아, 엄마 나 회사 잘리면 어떡하지? 평소 실수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던 우현이었다.
"그럼 성규씨가 고장냈습니까?"
"그…그게 아니고요!"
"그게 아니고?"
"조, 종이가 끼어서 안 나오길래 잡아당겼어요."
그게 고장낸 게 아니면 뭡니까? 우현의 질책에 성규가 눈을 감았다. 망했다. 망했어. 성규가 불안함에 다리를 떨었다. '다리 떨지 마세요, 안 그래도 지금 성규씨 때문에 어수선한데.' 우현이 화를 내며 성규에게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나가서 이거 복사해오세요.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니까 밥 먹고 들어오시던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시고. 설마 이것도 실수하진 않겠죠."
우현이 한심하단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사원들의 눈도 복사기 하나 쓸 줄 모르느냐며 질책하는 것 같았다. 찾아오는 부끄러움에 종이를 받아들고 바로 뛰어나가 버렸다. 숨을 고르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무심코 거울을 봤을 땐 얼굴이 한껏 달아오른 못난이 하나가 서 있었다. 부끄러워서 그런 것 인지 뛰어서 그런 것 인지, 둘 다 그런 것 인지. 실수를 저지른 뒤에는 원래 자신이 가장 형편없어 보이는 법이다. 내가 그런거 아니야, 복사기가 그런 거야. 애써 합리화시키며 머리속을 비웠다. 다시 회사로 가서 이 종이들을 집어던지고 모든 걸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어김없이 1층에 도착했고, 성규는 다시 현실로 뛰어들어야했다.
* * *
성규가 복사한 종이들을 들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을 때, 회사 안은 아주 난리였다. 사원들이 옹기종기 한 곳에 모여서 '귀엽다!' 하고 여자애 마냥 꺅꺅 거리는 꼴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종이뭉치를 우현의 책상에 올려두고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호원이 조그마한 강아지를 성규에게 보여줬다. 귀엽지? 강아지가 억센 호원의 손에 붙들려 끙끙거렸다. 칙칙했던 성규의 눈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하얀 털이 흔들거렸다.
"왠 강아지에요?"
"몰라. 사내 분위기 좋아지라고 뭐지, 쭈꾸미가 시켰대. 키우라고."
"요즘 부장 부인이 강아지 키우는데 푹 빠졌다더니 쭈꾸미 부장도 같이 빠졌나보네."
성열이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성규도 평소 사원들끼리 쭈꾸미같이 생긴 부장이라며 뒷담을 까기 바빴지만, 오늘만큼은 부장의 손을 부여잡고 감사하다고 외치고 싶었다. 어렸을 때 성규의 꿈 중 하나가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지식한 부모님의 반대로 키울 수 없었고, 성인이 된 이후로는 여건이 되지 않아 키울 수가 없었다. 한참 강아지를 만지며 꺅꺅거리고 있는데 우현이 들어왔다. 커피를 마시던 우현은 들어오자마자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우현이 호원의 무릎에 놓여있는 강아지를 보고 꽥 소리를 질렀다.
"뭐하는 겁니까? 지금 회사 안에 강아지를 데리고 들어 온 거에요? 사리분별도 못 합니까?"
"부장님이 시키신건데요. 귀엽지 않아요? 각박하게 구시네."
우현의 짜증에도 호원은 그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성규는 강아지를 다시 품에 안았다. 팀장님도 한 번 보세요, 얘가 얼마나 귀여운데. 성규가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우현도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아 저리 가요.' 우현이 당황하는 모습이 꽤 웃겼다. 설마 강아지 무서워해요? 성규가 품 안에 있던 강아지를 내려놓았다. 하얀 털 뭉치가 빨빨거리며 우현에게 다가갔다. 강아지가 가까워질 때마다 우현의 기침도 늘어났다.
"뭐하는거에요, 지금? 빨리 다시 들어요. 나 알레르기 있어. 성규씨, 빨리! 제발…."
우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조그마한 강아지 하나에 부들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알레르기가 있다는 말에 성규가 바로 강아지를 안고 멀리 떨어졌다. 멀리있었지만 우현의 손목이 울긋불긋하게 달아오른 게 보였다. 그럼 팀장님 알레르기 있는데 얘를 어떻게 키워? 성종이 울상을 지었다.
"못 키우죠. 부장님한테는 내가 연락할테니까, 걔 좀 여기 안 오게 해요."
우현이 회사 안의 모든 창문을 열며 대답했다. 손목 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도 붉었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우현은 지금 매우 쪽팔렸다. 몇 시간 전에 혼내고 기를 죽여놨던 김성규에게 제발, 하며 빌어댔다니.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눈이 감겼다. 우현의 자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성규가 강아지를 맡았다. 좋다기보단 솔직히 우울했다. 결국 이번에도 애완동물은 물 건너 가는구나. 꼼지락 거리는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 * *
"팀장님도 햄스터 밥 좀 챙겨주라구요. 같은 집에 우현이랑 성규랑 사는데, 왜 저만 밥줘요? 우현이 주인인 팀장님도 밥 챙겨줘야지."
"나 털 알레르기 있잖아요. 저번에 봤잖아."
"그건 강아지 털 알레르기면서, 햄스터 정도는 괜찮지않아요? 호원씨랑 동우씨랑 매일 같이 햄스터 챙겨주는 거 부러워 죽겠어요."
성규가 해바라기씨를 까면서 웅얼거렸다. 털 알레르기가 있어서 못 키우겠다는 우현의 말에 부장은 난리를 쳐댔다. 다른 부서 다 키우는데 이 곳만 안 키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햄스터 일곱 마리를 보냈다. 우현은 이름조차 짓기 귀찮다며 그냥 부서 사원들의 이름을 갖다 붙였다. 우현이, 성규, 호원이, 동우, 명수, 성열이, 성종이. 두 마리 씩 나누어서 집을 같이 썼고, 성종이는 혼자 키우겠다며 자신의 책상에 아예 햄스터집을 갔다뒀다.
"팀장님."
"왜요."
"성규 임신 한 것 같은데…."
우현이랑 성규, 둘 다 수컷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우현이가 임신시켰나 봐요. 성규의 말에 우현이 당황했는지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김성규씨 미쳤어요? 우현이 과민반응을 하자 성규가 그를 흘겼다. 뭐 이상한 생각해요? …무슨, 내가 뭘요. 괜히 찔린 우현이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옛날에 햄스터에 관심있어봐서 알아요. 여기 젖꼭지하고, 좀 살 찐거 보이죠? 임신 맞네요. 성규 임신 축하해!"
"이상한 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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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함다^.^ㅋㅋㅋㅋㅋ 작가명이 병맛이져? 제가 지금 매운 치킨이 먹고싶어서 그래요... 우현이가 멍멍이 알레르기인데 왜 처음 사진이 멍멍이 안고있는거냐구요? 저도 몰라여 마지막 햄스터성규 임신한 건 우현이 놀리려곸ㅋㅋㅋㅋㅋㅋㅋ 이제 우현이랑 성규랑 레알 러브러브 시작하실게여!ㅋㅋㅋㅋㅋㅋㅋ 그게 어떻게 이어나가야 될지 모르겠어서 흐지부지하게 끝냈네여 ㄷ..댓글 좀! 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