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친구 김태형과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이야기.txt
모든 것은 엄마의 말 한마디로 인해 시작되었다.
"요즘 태형이랑 연락하니?"
"그냥. 가끔. 근데 갑자기 걔는 왜?"
"이번에 태형이 너랑 같은 대학교 입학하잖니."
"아, 그래."
"그래서 우리 집으로 들어오기로 했어."
"아, 그렇구ㄴ.... 뭐?!"
"어머, 깜짝이야. 나 귀 안먹었어. 이년아."
그러니까, 난 아주 편한 티셔츠와 츄리닝 바지를 입고, 아주 편한 자세로 과자를 먹으며 티비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치도 못한 엄마의 말에 씹던 과자도 뱉을 뻔 했다.
이게 무슨 김탄소 옷사이즈 33반 되는 소리야. 무슨 말이냐면 말이 안된다는 소리다.
아무리 김태형이 나랑 유치원부터 초중학교를 같이 나오고 부모님끼리 친해 볼거 못볼거 다 보고 서로의 집을 자신의 집처럼 드나들던 사이라지만 동거라니요?
뒤이은 엄마의 설명을 대강 요약해보자면 고등학교 입학 전 타지방으로 이사를 간 김태형이 우리 집과 가까운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자취할 집을 알아보다가 우리 엄마의 오지랖으로 인해 보증금 없이 월세만 받고 우리 집의 남는 방을 주게되었다는 것 같다. 이미 아빠와도 이야기가 끝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집안의 유일한 딸이 아닌가요? 정말 나는 학이 물어다 준 자식인건가요?
왜 내 의견은 반영을 1퍼센트도 하지 않고 엄마와 아빠끼리 정해버린건지. 김태형은 무슨 생각으로 우리 집에 오는 것을 수긍한건지.
궁금한게 많아졌지만 그만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내 기분을 단 두 글자로 표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지금 이 기분은...
시발.
[ 야 미쳤냐? ]
[ ?다짜고짜 욕하기있음? - 김찐찌버거 ]
[ ㅅㅂ우리집이 하숙집이냐? ]
[ 아 - 김찐찌버거 ]
...아?
..........아?
아????
세상에서 제일 빡치는 글자가 아, 라는걸 오늘 처음 알았다. '아'자로 시작하는 말 중에 하나로는 아구창이 있다.
나는 오늘 김태형의 아구창을 날려버릴 것이다.
아무리 평생동안 겨우 고등학교 3년을 떨어져 있었다지만 그 가족과 우리 가족은 매우, 자주, 빈번히 약속을 잡거나 동반 여행을 떠났다.
그러니 김태형은 내가 원치 않게 내게서 뗄레야 뗄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젠 하다못해 김태형과 같이 살란다. 아무래도 조만간 우리 집안 호적에서 날 파내야겠다.
[ 나 지금 기찬데ㅎ - 김찐찌버거 ]
[ 어쩔 ]
[ 입주 선물 같은거 안줌? - 김찐찌버거 ]
[ ㅗ뻐큐머겅 ]
[ ㅗㅗ두번머겅 ]
김태형을 위해 입주 선물을 준비할 예정이다. 서프라이즈지만 미리 귀띔하자면 내 죽빵이다.
곧 너에게 생길 상처는 덤.
"좋지? 같이 학교 다닐 친구도 생기고. 게다가 태형이라잖니."
"응..."
"늬 아빠가 태형이 온다고 오늘 저녁에 외식하자더라. 좋지?"
"응..."
엄마는 내게 좋음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런 강요하는 사회, 나빠요. 엄마, 나빠요.
멘붕의 도가니로 요동치는 정신세계를 뒤로한 채 쇼파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티셔츠가 말아올라가 배가 보였다.
부엌에서 거실로 온 엄마가 내 배를 찰싹, 때리며 재촉했다.
"어딜 누워, 얼른 준비해. 태형이 마중가야 할거아니니."
"아, 걔가 무슨 5살짜리도 아니고 무슨 마중이야."
"얘는. 부모하고 떨어져 지내는게 얼마나 서러운지 몰라서 하는 말이야. 빨리 일어나. 딸."
"...예, 예."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쌩얼은 커녕 내가 화장을 안하던 시절부터 나를 봐온 김태형이니, 그에게 예뻐보일 이유가 하나 없었다.
머리는 어젯 밤에 감았으니까 됐고, 옷은 어제 입던거 다시 주워입어야겠다.
그래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내가 못봐주겠어서 화장대 앞에 앉아 손에 잡히는대로 얼굴에 두드렸다.
점점 사람의 모습을 하는 걸보니 과연 화장의 힘이란,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틴트로 생명을 불어주면 분명 십 오분 전과 다른 사람이 거울 앞에 앉아있었다.
아, 차라리 김태형이 영영 나를 못 알아봤으면.
(띵디딩띵~)
"뭐여."
침대에 아무데나 던져놓은 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길래 몸을 늘어뜨려 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화면에 보이는것은.
[ 페이스톡 해요~ - 김찐찌버거 ]
....ㅋ?
콧방귀를 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김태형이 친히 보이스톡도 아닌 페이스톡을 걸어주시니 뻐큐를 아무래도 영상으로 먹고싶어 하는게 틀림없다.
'어?! 받았다.'
"뭐야."
'오~ 좀 이뻐졌다? 안받을 줄 알고 끊으려고 했는데.'
"그럼 끊어."
'아, 잠만! 마중 나올거지?'
"아니ㅋ?"
'뻥치지마. 이모가 나온다고 했거든.'
"알면서 왜 물어봤어. 개샛갸."
'흫, 그냥.'
"기차에서 나대지말고 곱게 와."
'흥.'
"흥?"
'머리빡치기! 머리! 빡! 치기!'
"...ㅋ."
이 새끼가~이렇~게 병신입니다~ 요란한 병신 옆자리에 앉아 계신 분께 대신 사과드립니다.
김태형이 근본없는 머리빡치기를 시전하자 나는 가슴 속부터 지금이야말로 진심으로 빡칠 때라는 것을 느꼈다.
정신 사나운 김태형의 면상과 함께 페이스톡은 꺼졌다.
제대로 욕도 못해주고 허무하게 끝이나서 더 빡친다. 아무래도 얘 진짜 개새끼인거 같다.
[ 옆 사람이 이상하게 쳐다봐ㅠㅠ - 김찐찌버거 ]
[ 올바른 시선으로 보네 ]
[ 흥 - 김찐찌버거 ]
-
아빠의 퇴근 후 차를 타고 기차역에 도착했다.
심드렁한 나의 팔을 이끌며 김태형을 찾으라 재촉하던 엄마는 게이트 주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쟤 태형이 맞지?"
"그런가보지, 뭐."
"어휴, 인물이 훤해서 멀리서도 알아보겠네."
"훤한게 아니라 화나는거겠지."
"시끄럽고, 빨리 데려와. 아직 우리 발견 못했나보다."
"전화하면 되잖ㅇ..."
"얼른 안갔다올래?"
김태형 존나 벼슬이다. 내가 타지방으로 대학을 간대도 우리 엄마는 날 이렇게 찾지 않을 것 같다.
김태형이 미웠따!!! 김태형이 미웠다!!!
하는 수 없이 패딩 주머니에 손을 꽂고 스멀스멀 걸어갔다. 그런 와중에도 뒤에선 빨리 안 가냐는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의도치 않아도 지어지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김태형의 앞으로 다가갔다.
목폴라니트에 코트, 옆에는 큰 캐리어. 제법 병신미를 감추고 점잖게 서있으니 지나가던 여자들은 내심 김태형을 흘끗거렸다.
솔직히 잘생긴 편인건 아는데 저 새끼랑 지내봐야 안다. 페이스톡으로 머리빡치기나 시전하는 지랄견이라는걸 알까, 저 사람들은.
이 와중에 뭘 먹는거야. 존나 보는 사람 배고파지게.
"야."
"어, 언제 왔냐."
"빨리 와. 니네 엄마가 기다리신다."
"우리 엄마? 아, 이모?"
"이제 니네 엄마해라. 나보다 널 더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이런거에 질투해? 여전하네. 오랜만인데 안 반가워하는 것도 여전하고."
"니가 내 머리를 빡치게 해서 지금은 별로 반가워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겨우 5개월 가지고 오랜만은 개뿔."
지금이 1월이니까 마지막으로 만난게 언제더라. 한 작년 8월 쯤이었던 것 같다. 그 날도 태형의 가족은 우리 가족와 바다로 여행을 떠났더랬지, 아마.
빡친다. 왜 내 인생에 남자와의 추억은 김태형 하나 뿐이지? 인생 헛살았나보다. 25년동안 애인이 없으면 마법을 부릴 줄 알게 된다던데.
대마법사가 되려면 5년 밖에 안남았다. 그렇다. 난 모태솔로다.
갑자기 이 얘기가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 괜히 더 울적하다. 불만에 불만이 또 쌓였다.
"먹을래?"
"...아."
원래 우울할 때 더 배고파 지는 법이다. 어허, 씁. 조용히 해. 내가 그렇다면 그런거야. 쓰읍. 어허.
"멀리서 왔는데 계속 그런 표정으로 반겨주기야?"
"내 표정이 어떤데."
"마치 좋아하던 연예인이 열애설 났을 때 표정."
"세상 무너지는 표정이겠네. 맞아."
"왜, 나랑 같이 살게 된게 싫어?"
"넌 좋아?"
"난 좋은데."
그래, 좋구나. 넌 나랑 살게 된게 좋구나. 그래, 좋겠지. 매일 멀리 안가도 놀릴 거리가 니 눈 앞에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너랑 한 집에서 산다는걸 누군가 알기라도 한다면 참 좋겠구나?
난 정말 대마법사가 될 수 있겠다. 고맙다. 친구 이 새끼야.
마법을 부리게 된다면 제일 먼저 너에게 가서 말할거야. 크루시오♡
들리는 정보에 의하면(출처 : 엄마) 김태형과 나는 학교만 같을 뿐 다른 학부, 다른 학과라고 하니 학교 내에서 많이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교 때도 나는 이과였고 김태형은 문과였으니 우린 태생부터 존나 정반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나는 이해를 하나도 못하겠지만 김태형은 어딜가나 인기가 많았으니 대학교에 들어와도 그럴 것 같았다.
예를 들면 경영학과 간판 김태형이라던지, 그런.
"표정 풀어라,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학교를 다니니까 남자친구가 없지."
"뭐 이 새끼야?"
"욕도 줄이고. 입이 그렇게 험하니까 남자들이 못 다가오지..."
"진짜 지랄 그만하ㄱ..."
"이모! 오랜만이에요!"
죽여버릴까, 진짜. 지는 뭐 평소에 안 그러는 줄 아나.
솔직히 지금 내 기분이 뭣같아서 그렇지, 나는 평소에 잘 웃고 학교에 다닐 때도 친한 친구들 앞이 아니라면 욕쟁이 할머니 애제자 뺨치는 실력의 욕도 참는다.
...아마도.
그에 비해 중2병을 심하게 앓던 김태형은 그를 사모하던 여인네들로부터 표정을 굳히면 얼음왕자라느니, 욕을 하면 저 잘생긴 얼굴에 욕을 하니 너무 멋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굴로 다 용서되는 세상. 됴까.
그렇다고 양아치는 아닌데다 공부도 나름 했으니 선생님들도 김태형을 무지 좋아했다.
중학교 때 매우 찌질했던 나에 비해 전교회장까지 도맡아 하던 김태형은 솔직히 깔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더 빡친다는거다.
시발 어디 하나 깔데가 없어서 되려 내가 제주감귤마냥 신명나게 까여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는게.
"삼촌도 오랜만에 뵙네요."
"그래. 우리 집에 아들이 하나 더 생긴 기분이구만. 허허."
"....?"
....하나 더?
....응?
"내가 아들이야?!"
"딸치곤 아들스럽긴하지. 허허."
"그럼 김태형 데리고 살던가! 난 이모네 가서 살테니까!"
"어휴, 얘도 참. 넌 너무 많이 먹어서 안 돼."
"..."
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딜가나 내 편이 없다. 난 정말이지 이 집에서 내 이미지는 밥만 축내는 애완동물 쯤인걸까.
아니야...강아지를 키웠다면 그 개한테도 무시를 당했겠지...?
무식하게 키만 큰 김태형을 올려다보며 허허, 거리는 아빠와, 처녀시절 아빠와 연애를 할때보다 더 기쁜 미소를 짓고있는 듯한 엄마는 손수 김태형의 캐리어까지 끌어주겠다며 강제로 빼앗아갔다.
괜찮다고 엄마 아빠를 말리던 김태형은 캐리어가 제 손을 벗어나자 머쓱한듯 웃으며 저만치 떨어져 어기적거리며 걸어오고 있던 나에게로 돌아왔다.
"김탄소 입술 나온거 봐. 사진 찍고싶다."
"너도 나 무시하냐?"
"누가 무시한대? 이뻐, 이뻐."
엄마와 아빠가 빠른 속도로 앞서나가자 김태형은 내게 자연스레 어깨동무를 해온다.
누가봐도 삐졌음. 하는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며 걷는데 그런 나를 보며 김태형은 나머지 한 손으로 삐죽 나와있는 입을 톡, 건드린다.
그 손길이 마치 김태형이 좋아죽는 개들을 다룰 때와 비슷해 너도 나를 무시하는거냐며 틱틱대니 이번엔 손등으로 볼을 두어 번 토닥인다.
얘는 이게 제일 문제다. 능글맞아 죽겠는거.
"...씨, 하숙생 주제에."
"집주인님. 요즘 같은 세상에 갑질은 안 돼요."
"월세 치킨 한마리, 나한테도 내야 돼. 싫으면 방 빼던가~"
"좋아. 대신 오늘은 니가 나한테 입주 선물 주는걸로."
"아까부터 입주 선물 타령이야...자꾸."
도대체 바라는게 뭔지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뭔데, 뭐. 하고 물으니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설마 신장을 하나 떼어달라거나, 간의 몇 퍼센트를 이식해 달라거나. 뭐, 그런 건 아니겠ㅈ.
"태형이랑 간단하게 놀아주기!"
"뭐?! 간?"
"간?"
"아니, 뭐래. 아니야."
머릿 속으로만 생각한다는걸 그만 입 밖에 내버렸다.
그 와중에 간 때문이야~ 간 때문이야~ 하며 신나한다. 바보나 바보인 척 하는 병신 중 하나가 맞는 것 같다.
그나저나 놀아주기라니, 그냥 만나면 노는거고 놀 목적으로 만나고 그런거 아니었나. 쩝.
"빨리 알겠다고 해."
"뭘?"
"놀아주기! 아직 대답 안했잖아!"
"아, 그래."
"아싸."
사실 이 이야기는 내가 대마법사가 되는 글일지도 모릅니다.
이 영광을 좋은 친구 김태형에게 돌리겠습니다.
그런데 왜 눈에서 물이 나오죠?
다음에 다시 만나요. 안녕...(오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