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아, 미안. 나중에 얘기해.”
너는 항상 바빴다. 같은 회사에, 같은 날, 같이 입사한 우리는 현재,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일찍이 능력을 평가 받은 넌 입사한지 3개월도 채 안 돼 승진을 했고, 난 1년이 다 돼서야 너의 뒤를 쫓기 바빴다. 연애를 하며 너와 같이 살던 집에는 어느 샌가 나 혼자만의 공간이 되어버렸고, 넌 회사에서 제공 받는 오피스텔이 있다며 집을 나가버렸다. 그렇게 우린 서서히 멀어져 갔고, 나는 너에게 암묵적으로 이별을 선고 받았다. 헤어지잔 말을 들은 것은 아니다. 너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서 더 가슴 아팠다. 너에게 매달려 보려고도 했다. 그런데 내가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두고 말았다. 결국 나도 너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고, 우리는 지금, 헤어졌다. 회사 로비에서 가끔 너를 마주치기도 한다. 처음엔 너를 반갑다는 듯 쳐다봤으나, 너는 나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지금이 돼서야 모든 게 이해가 된다. 아, 이래서 나를 멀리했구나. 그냥, 차라리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편이 더 나을 테니까.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된지도 벌써 3년이 흘렀다. 3년이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에 우리는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맡으며 여러 번 부딪혔다. 그때마다 난 너와 그저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뭐,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실망하게 될 테니까.
이제는 너와 마주쳐도 아무렇지도 않다. 너는 내게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너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겠지. 최근 들어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나보다 한참 후배인 김종인과 내가 사귄다나 뭐라나. 뜬소문일 뿐, 근거는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가십거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결국 나와 김종인은 팀장실로 불려갔다. 나는 이곳이 참 싫다. 똑, 똑. 들어오란 말에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들어갔다. 문 너머에는 네가 앉아 있었다.
더보기 “두 분이, 연애하신다구요?” 너는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인 듯 대했고, 아닌 척 했지만, 속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네 행동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다. 헌데 막상 겪고 나니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너는 같은 질문을 되물었고, 내가 입을 열려는 찰나 김종인이 대답했다. “네, 맞는데요. 뭐, 문제가 되나요?” 너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쏘아 봤다.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넌 나를 무시하고 김종인과 대화를 이어갔다. 사내 연애 금지. 네가 내세운 비장의 카드였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넌 나를 궁지로 몰아세울 작정이었다. 사내 연애를 하다가 걸리면 누구 한 명은 다른 지역으로 발령 받거나, 해고, 둘 중 하나였다. 이쯤 되면 물러서겠지. 네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러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해고하셔도 좋아요. 대신 남 연애사에 끼어들지 마세요, 팀장님.” 뒤돌아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순간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냥 그대로 숨이 멎었으면 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아직 너를 좋아했다. 그것을 들키긴 싫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해버렸다. 말을 하면서도 네 얼굴, 네 표정을 보진 못했다. 혹시라도 울어버릴까 봐. 천천히 네 방을 빠져나가려는데, 네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끌어 당겨 품에 안았다. 오랜만이다, 이 느낌.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네게 기대고 있었다. “너, 거짓말할 때마다 티 난다고 했잖아, 내가.” “박찬열, 나 갈게.” “백현아.” 내 입술을 매만지는 너를 밀쳐냈다. 다정해진 말투와 표정, 행동이 어색했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착각이겠지, 그래, 착각. 옷매무새를 정돈하곤 네 얼굴을 똑바로 쳐다 봤다. 당황한 듯한 표정. 그렇겠지. 그래, 그렇겠지. 팀장실을 빠져나왔다. 기운이 하나도 없다. 문을 닫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문 옆에는 김종인이 서있었다. “선배.” 여태 안 가고 기다렸나 보다. 얼른 내려가자며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르곤 너를 쳐다 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너는 계속해서 내 쪽을 쳐다 봤다. 무슨 일이길래 저러는 거지? 아, 아까 팀장실에서 한 말 물어 봐야하는데.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전혀 감을 못 잡았다. 엘레베이터가 도착하고, 너는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네게 눈짓을 하며 타라고 했다. 좁은 공간에 긴 침묵이 흘렀다. 물음표로 가득 찬 머릿속과는 달리 팀장실에서의 일을 입 밖으로 내보내질 못했다. 그냥 이대로 문이 열렸으면 좋겠다. 얼른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F6, F5, ……, F2. 사무실은 2층이었다. 문이 열리고 네 쪽을 흘기곤 내리려는데, 네가 나를 붙잡았다. “사내 연애가 금지된 거면, 연애하는 척은 어때요. 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