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션 로즈
태형은 친구의 부친상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예쁘게 봉투가 하나 놓여있었다.
자리에 앉아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조금 짧은 편지였다. 누가 썼는지도, 누가 받는지도 쓰여있지 않았지만 직감으로 알 것 같았다.
[그래도 7년 동안 니 얼굴 보면서 좋았었다. 내가 병신인가 봐. 진짜 니가 말하는 미친놈이지.
그래도 니가 원하는 대로 됐어. 못 버티겠거든. 이제 보고 싶어도 못 보겠네. 아쉽다. 마지막까지 이런 소리 해서 미안해. 넌 또 더럽다고 생각하겠지. 그래도 니가 내 첫 사랑 이였고, 마지막 사랑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 니 눈에 안 띌테니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고마워. 사랑이라는 걸 정확하게 알려줘서 고마워. 그리고 고통이라는 걸 알게 해줘서 고마워. 너 덕분에 배운 게 무척 많은 것 같다. 그럼, 진짜 안녕.]
태형이 편지를 다 읽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1층으로 내려가려 엘레베이터를 눌렀지만 엘레베이터는 느릿느릿 하게 올라왔다.
답답했던 태형이 계단을 타고 뛰어내려갔다. 금방 1층에 도착했지만 당연히 지민은 찾을 수 없었다. 지민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전화번호는 알지도 못했다.
바로 지민이 일했던 편집부로 뛰어 올라간 태형이 뻘뻘 나는 땀을 팔 소매로 대충 닦고 편집부 앞에 도착했다. 그가 정중하게 노크를 하고 편집부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사무실 가장 앞에 앉아있던 소정이 태형의 얼굴을 보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 팀장이 태형에게 왜 왔냐는 시선을 내보였다.
"저, 박지민 사원, 그만 뒀나요?"
"예,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저, 박지민 사원 전화번..."
"저, 김태형씨. 잠시 나와주시겠어요?"
소정이 태형의 말을 끊고 그를 밖으로 끌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끌려오던 그의 손목을 놓고 사무실 앞에서 소정이 입을 열었다.
"양심이 있으면, 지민씨는 찾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뭐가..."
"저는 당신이 지민씨한테 무슨 짓 했는지 처음부터 다 알아요."
"..."
"왜 이제 와서 찾으세요? 그렇게 괴롭히시고? 끝까지 따라가서 괴롭히실려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심하셨어요. 요즘 세상에 호모포비아가 어디 있다고. 지민씨 찾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세요."
"아,아."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뱉어낸 소정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태형이 혼이 빠진 듯 가만히 서있다가 애꿎은 벽을 발로 퍽퍽 찼다.
그런 게 아닌데. 지민이 없다하니 무척이나 허전했다. 분명 보기만해도 증오스러웠는데, 못 괴롭혀서 금단 현상이 오는 건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시 제 사무실로 내려갔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지민의 우는 표정이 자꾸 떠다녔다. 미치겠네, 진짜.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생각이 나던지 소정과 만난 지 몇 시간도 안되어서 소정에게 메신저를 넣는 태형이였다.
'저, 소정씨.'
'왜요?'
'제가 죄송해요. 진짜 괴롭히려는게 아니고 너무 미안해서요.'
'근데요?'
'전화번호 좀 알려주실 수 없을까요? 마지막이라도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진짜 진심이세요?'
'네'
'저는 못 믿겠는데요. 지금까지 하신 행동은 어떻게 설명하실 건데요?'
'그건..'
'010-XXXX-XXXX'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바로 휴대폰으로 옮겨 전화를 걸며 사무실을 나가려 하던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의 귀에는 여자의 음성만 크게 들려왔다.
'이 번호는 없는 번호 입니다.'
회사를 마치자마자 칼 퇴근을 한 태형이 집에 돌아가서도 지민이 자꾸만 생각났다. 너무 미안했던 그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행동이 그에게는 얼마나 괴로운 일이였을지 이제서야 깨닫게 되어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지민이 항상 울 때마다 신경도 쓰지 않은 자신에게 너무나 화가 났다. 이제 연락도 안되니 어떡하면 좋을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차 이 죄책감을 잊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
급하게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꺼내 들었다. 모든 반을 찾아서 지민의 사진을 찾아냈다. 그 때의 지민과 현재의 지민은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예전보다 살이 빠진 듯 한 지민이였다. 예전 저가 지민에게 한 짓을 생각해보던 태형이 앨범을 힘 없이 아래로 떨구었다. 너무 끔찍했다. 나는 범죄자야. 지민아 미안해. 태형이 머리를 쥐어 뜯으며 밤새 죄책감을 느끼며 밤을 지샜다.
거의 아침마다 지민을 만났었다. 태형이 지금 타고 있는 엘레베이터에 없는 지민을 떠올렸다. 너무 허전했다. 그의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이야. 미리 알았더라면 사과하고 잘 해줄걸. 난 왜 그렇게 나쁜 짓을 했을까. 고개를 떨군 채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어제처럼 일이 안 되는 건 같았던 태형이 아무래도 죄책감을 떨쳐내려면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야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친구들에게 연락을 넣었다.
결국 친구들 몇 명이 모여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회사에서 바로 향한 태형이 만남 장소에 도착하자 친구들이 오는 그를 반겼다. 태형이 자리에 앉으며 친구들의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친구들을 불러모은 목적을 슬슬 꺼내었다.
"야, 얘들아."
"어. 왜?"
"너네 박지민 기억나냐?"
"기억나고말고, 너 좋다고 지랄했던 그, 게이?"
"어, 어. 걔가 나랑 같은 회산데,"
"에? 진짜로? 개쩐다. 존나 괴롭혀서 그만두게 만들어. 걔 얼굴 보고 어떻게 일하냐."
친구들의 반응을 보자 저가 정말 나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 태형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조용히 하고 들어봐. 그게,
"내가 엄청 괴롭혔거든."
"그래, 뭐 김태형이 진작에 시작했지 뭐."
"근데, 걔 로저가 고장이 났어. 검은색이 됐다고."
"엑? 진짜로?"
"어. 근데.."
"..."
"그리고 회사 그만뒀더라. 나한테 편지 한 통 주고."
"편지? 무슨 편지."
"안 가져왔는데, 내용이.. 고맙다는 내용이었어."
"헐. 너 존나 나쁜 새끼 됐네."
"근데 그 편지 읽고 나니까 미친 듯이 죄책감이 느껴지는거야."
"야, 그런 걸 왜 느껴. 걔가 너 좋아한다 난리친게 잘못이지."
"야, 이 인간 말종 새끼야."
"아, 왜!"
태형의 말에 태형이 잘했다고 답을 하는 재욱을 주먹으로 퍽 치자 재욱이 짜증을 내뱉었다. 태형이 앞에 놓여있던 술잔을 안주 없이 계속해서 들이켰다.
과하게 마시는 듯 하더니 결국은 꽐라가 되어 술주정을 부리기 시작한 태형이였다.
"아아, 박지미니!!!!!!!"
"얘 왜 이래? 존나 웃겨. 야 카메라, 카메라."
"으어어어어 내가 좋아했엉어 지민아앙!!!!!!"
"헐 얘 박지민 좋아했었대. 아 웃겨."
"아아,...지민앙 미앙행..도라와줭..."
"이거 자고 일어나서 보여주면 까무러치겠다."
"그러게."
"박지민!!!!"
마지막 외침으로 태형이 테이블에 뻗었다. 친구들이 태형을 부축해 그를 그의 집으로 옮겼다. 태형은 조용히 지민의 이름을 읊으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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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게 왔죠ㅠㅠ
몸이 안 좋아서 늦었지만
이번편도 읽어주신 분들 전부 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