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해줘야 할 만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요? "
둔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이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이성을 마비시킨 건가. 정국이 뒷말을 웃음소리와 함께 삼켰다. 가슴팍까지 끌어올려진 이불처럼 태형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아무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써 숨긴다고 한들 차오르는 두려움에 떨리는 손끝과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은 숨길 수 없었다. 정국은 태형의 얼굴에서 춤추는 미묘한 감정의 일렁임도, 그의 머릿속에서 돌아다니고 있을 생각의 변화도 쉽게 읽어 냈다. 이 상황에 있어서 정국은 숙련된 프로였으며, 태형은 완벽한 아마추어이기도 했다.
" 전 선생… "
" 내가 그쪽을 납치했어요. "
" … "
" 그리고 지금 태형 씨가 앉아있는 그 침대가, 앞으로 태형 씨가 아침을 맞이할 곳이라는 거죠. "
" …무슨 생각이에요, 대체. "
" 무슨 생각일 것 같아요? "
수수께끼를 내듯이 장난스럽게 묻는 정국을 바라보는 태형의 눈에는 적개심이 가득해 보였다. 납치, 티비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났다. 며칠 전에도 채널을 돌리다 무심코 본 뉴스에서 봤던 그 단어가, 자신의 일이 될 것이라고는 단 한순간도 생각해 본 적 없던 태형에게 닥친 지금의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몇 마디를 꺼내지 못하고 다물리는 입을 바라보던 정국이 태형의 떨리는 눈동자 위로 선연하게 재생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한 손으로 덮으며 태형의 얼굴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여느 공포영화가 그렇듯, 태형이 써 내려가는 시나리오도 선혈이 낭자한 장면이 등장했다. 물론 사방으로 튀긴 피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었고, 칼을 쥔 사람은 정국이었다. 공포영화의 법칙이라 함에 있어서 주인공의 생존은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태형은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메가폰을 쥐고 있는 정국에게 태형은 주인공임이 틀림없었다. 이어지는 수많은 엑스트라들의 죽음 사이에서 그들의 피를 오롯이 혼자 뒤집어쓴 채,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남아 스크린에 비춰질 가련한 주인공. 그게 바로 태형이었다.
" 이거, 범죄인 거 아시죠. 지금 저 보내주시면 여기 있었던 일들, 다 잊을게요. 선생님이 저를 납치 한 것도, 제 손에 이런 쇳덩어리를 채운 것도, 다 잊고 입 다물고 살게요. "
얼굴을 쓸어내리는 차가운 손길에 소름이 끼치는 듯 몸을 잘게 떨던 태형이 고개를 들어 정국과 눈을 마주했다. 단단한 것처럼 들리지만 작은 파도에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모래성같이 여린 목소리. 잔뜩 긴장해 뻣뻣하게 하게 굳은 채 말을 이어가는 태형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정국이 미묘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 정국인데, 그런 정국의 귀에 태형의 말은 마치 자기가 선택권을 주는 것처럼 들렸다. 정국이 손에 들고 있는 티켓은 두 가지였다. 태형을 죽이거나, 살리거나. 이미 후자에 무게를 실어두긴 했지만. 하지만 태형이 제안한 티켓은 조금 달랐다. 그의 티켓은 한 장뿐이다. 그것도 시간제한이 있는. 태형의 말은 협박이라기엔 너무 친절했고, 제안이라기엔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 그게 끝이에요? 내가 풀어주면, 그냥 입 다물고 살겠다. 그게 끝이냐고. "
그냥 입 다물고 살겠다. 그게 끝이냐고. 네 입에서 뻗어나온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게 뭘 바라는 걸까, 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납치는 어린아이, 여자, 돈. 이 조건들을 하나라도 충족시킨 사람이 적절하다고 여긴다. 태형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태형의 편견을 보기 좋게 깨뜨린 건 정국이었다. 태형은 어린아이도, 여자도, 또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반대였다.
그래서 태형은 자신의 처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은 알바에 찌든 대한민국의 건장한 청년에 불과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입 벌린다고 죽이진 않아요. "
" … "
" 입 안 벌리면 죽일 것 같은데. "
싱긋 웃는 낯으로 정국은 태형의 턱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아, 흐으… 정국의 손길에 의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잔뜩 젖은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두려움, 고통, 공포. 모든 감정이 뒤섞인 울음은 태형을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감정의 고통에 비례하게 태형의 손에 쥐어져 있는 이불이 구겨졌다. 처참하게 구겨진 이불이 꼭 태형의 얼굴 같았다.
아름다웠다. 눈가에 차오르던 눈물이 무게를 주체하지 못하고 뺨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름답다는 표현으론 부족할 정도로.
끝을 모르는 것처럼 흘러나오는, 눈물길이 그득한 태형의 뺨을 혀를 내어 핥아 올렸다. 몸을 크게 움찔거리며 더 많은 눈물길을 트는 태형의 머리칼을 세게 그러잡으며 고개를 뒤로 젖히게 했다. 시끄러워요. 겁먹은 강아지처럼 주체 없이 떨리는 동공에 살풋 웃음을 지으며 머리칼을 잡은 손에 힘을 줘 적나라하게 드러난 태형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 걱정 마요, 김 태형 씨. 누구나 공포가 가득 찬 얼굴이 가장 예쁜 법인데, 난 그쪽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싶어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꼭 그쪽을 죽여야만 하는 건 아니거든요. 사람은 사람의 시체를 볼 때 큰 충격을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시체가 되는 장면을 보는 건 어떨까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눈앞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언제 내 순서가 될지 하루하루를 버티며 죽음을 기다리는 게, 바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무섭지 않을까 하는, 뭐 그런 생각이요. "
정국은 태형이 더 아름답기를 갈구했다. 더 아름다운 것을 원했다. 자신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손자국이 새겨져 있는 뺨을 느릿하게 쓸어내리고는 창살에 걸려있는 수갑을 풀어 자신의 손목에 걸고는 태형의 눈 앞에서 흔들었다. 잘그락 거리는 소리가 커질수록 일그러지는 태형의 표정이 아름다웠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삼켜내지 못하고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거 하나는 확실하네요. 당신은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아니라,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더러운 살인마라는 거. "
더이상 정국과 눈을 마주할 수 없을 것만 같아 고개를 돌렸다. 떨려왔다. 목소리도, 몸도. 난 네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실험용 쥐에 불과한 거구나. 실험이 끝나면 가차 없이 죽여버리는, 생명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쥐. 죄 없는 입술을 잘근 짓씹으며 눈꺼풀을 드리워 모든 시야를 차단했다.
" 사람을 살리기도 하죠, 내 손에서 살아난 사람이 내가 죽인 사람보다 많을걸요. 의사라는 직업은 참 매력적이에요. 손가락 하나만 옆으로 까딱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데, 그게 살인은 아니잖아. 나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의사고, 죽은 환자는 운이 나빴을 뿐이죠. 수술 중에 죽는 건 생각보다 흔한 일이거든요. "
정국은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배우였다. 온도 차가 없는 감정을 표현하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정국의 재능은 정국이 살아가기엔 중요한 요소였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그 사람의 환심을 가져야만 정국의 여흥을 즐기기 편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피로 물들인 여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