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흘러내린 눈물에 젖어 안쓰러운 몰골을 하고 있으면서도 태형의 눈동자만은 살아있었다. 두려움과 분노, 뒤섞인 감정들이 새카만 눈동자 위에서 일렁였다. 제 앞에서 서슬 퍼런 칼날을 빛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 칼날이 향하고 있는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에 대한 억울함. 그리고 그 칼을 들고 있는 게 낯선 사람도 제게 원한이 있는 사람도 아닌, 태형에게 그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분명 좋은 사람이라고 대답했을 정국이라는 것에 대한 분노. 생생한 감정들은 태형의 눈동자 속에서 반짝거렸다. 아직 정국이 원하는 빛은 내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맛보기에 불과할 감정들마저도 정국을 즐겁게 한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태형을 가만히 응시하던 정국이 제 손목에 걸쳐져 있는 수갑을 풀어내 다시 창살에 걸었다. 자신이 하는 행동을 따라 움직이는 태형의 시선에 웃는 듯하다 금세 표정을 지우고는 문에 매달린 잠금장치들을 하나, 둘 풀어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열었다. 태형이 그토록 열고 싶어 하던, 닿지도 않는 무거운 문을 정국은 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면 금방 열 수 있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실험용 쥐의 눈앞에서 아른거릴 닿을 수 없는 자유는 가혹했다.
" 혹시 알아요? 얌전히 있으면, 내가 집에 보내줄 지도. "
웃음기가 섞인 정국의 목소리에는 단 한치의 진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국의 말은 그저 이미 물기를 다 쥐어짜 내 메마른 태형에게 기대를 심어줄 비를 쏟아내지 않고 지나갈 뿐이면서도 하늘을 뒤덮고 있을 그런 먹구름 같은 말일뿐이었다. 멀쩡하게 이곳을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태형의 발끝부터 갉아먹기 시작할 거고, 그 기대가 사라지는 순간 제 생각보다 많이 갉아 먹힌 태형은 균형을 잡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정국은 그걸 바라고 있었다. 간절히 바라던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 더 처참했기에, 그리고 그 무너짐이 더 아름다웠기에.
" 금방 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요. 귀찮은 일 벌이지 말고. "
" … "
문을 잡고 있던 정국이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빠져나갔다. 정국이 나가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직 살아있다는 안도감인지, 이불을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몸을 일으킨 태형이 문 쪽으로 가까이 갔지만, 문에 닿지는 못했다. 방 안을 다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의 길이 정도로 이어진 수갑은 문까지 닿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제발, 좀… 씨발. 열리라고. "
방 안에서 태형은 자유로웠지만 온전한 자유에는 닿지 못했다. 발을 뻗으려 할수록 손목에 단단히 매여있는 수갑이 태형을 옥죄었고, 애처로운 움직임은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짓밟혔다.
" 침착하자. 김 태형, 제발. "
방을 나간 정국은 반듯하게 정리된 집 안을 둘러보다 소파에 앉았다. 켜져 있는 티비 속 화면을 가득 메운 하얀 방에 태형이 보였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태형의 모습을 지켜보다 테이블에 놓인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집어 들어 느릿하게 손가락을 놀리던 정국이 고개를 돌려 부엌을 바라보았다.
네게 환영식을 해 줘야지. 너는 눈치채지 못할 비밀스러운 환영식. 정국은 즐거운 듯 웃었다. 정국이 바라본 커다란 냉장고 속에 가득 차있는 수많은 살인의 증거는 꽤나 매력적인 맛을 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은밀하고, 끊을 수 없는. 혀끝에 감겨오는 은밀한 맛을 느낀 태형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상상만 해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 정국이 소파에 기대어 있다 일어나 부엌으로 향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가득 찬 붉은 고기들을 살피던 정국은 위에 붙여진 작은 포스트잇에 휘갈겨 쓰여있는 날짜 중에서 가장 최근의 것을 골랐다. 태형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처음은 가장 입맛을 당기는 게 좋을 테니까.
정국은 즐거웠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감정은 자연스레 정국의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밀봉된 비닐 팩을 뜯는 순간, 툭- 무언가가 정국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바닥에 떨어졌다. 부엌에 울려 퍼지던 노랫소리가 끊겼다. 정적만이 남은 부엌 한가운데에 정국만이 서 있었다. 정국은 집중하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저 손가락이 누구의 것인가를. 음… 삼 주 전 고깃덩어리치고는 고운 핏빛이 남아 있고. 가장 최근 고깃덩어리치고는 손가락 뼈마디가 얇은데. 허리를 숙여 손바닥에 올린 손가락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정국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모든 방면에 완벽함을 추구하는 정국에게 이런 실수라니. 스스로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냈다는 사실에 정국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정국은 원했다. 더 아름다운 살인을. 더 완벽한 살인을.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냉동고에 처넣었다. 한때 여자 몸의 기능을 담당했던 손가락이 냉동고 안에서 쓰레기처럼 뒹굴었다. 저 손가락을 가진 여자의 몸은 지금쯤 냉동고에 처박혀 있거나, 왕성한 식욕을 가진 개들의 배설물이 되어 있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 짜증이 가득한 정국의 얼굴은 어느새 평온해져 비닐에 쌓인 고깃덩어리를 조심히 꺼내 팬에 올렸다.
정국이 나간 방에는 화려한 쇼윈도 속 마네킹처럼 수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만이 남아있었다. 그 남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말을 정정하자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두려움을 비롯한 온갖 감정들이 남자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발가락에서부터 천천히, 조금씩. 완전히 균형을 잃지 않을 정도만.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기에.
태형은 생각했다. 아직 존재했다. 그 사실은 무너져 내리던 태형을 다시 쌓아올렸다. 비록 온전한 형태를 갖춰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다시 일어섰다.
태형은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태형의 의도와는 다르게 더 붉어진 눈가를 하고선 제 앞에 있는 하얀 문을 바라봤다. 이 문을 지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까. 태형은 생각했다. 아직은 존재했다.
" 주인 기다리는 개같이 예쁘게 있었네요. 수갑이 아니라 목줄을 채웠어야 했나. "
절그럭거리는 소음을 내더니, 별안간 문이 벌컥 열렸다. 태형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문에서 멀리 떨어졌다. 아니, 정국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배고프죠. 밥 먹어요." 태형이 멀어진 거리보다 더 가깝게 거리를 좁힌 정국이 싱긋 웃으며 수갑이 채워져 있는 손을 잡아당겨 바짝 몸을 밀착했다. 두려움에 떨리는 눈동자를 어디다 둬야 가늠이 되지 않는 태형은 눈을 꼭 감았다. 깜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발정 났나, 우리 개새끼가. 키스라도 해줘야 돼? "
정국이 그런 태형을 보고 조소를 지으며 조롱 섞인 물음을 내던졌다. 계집년처럼 기다란 속눈썹이 볼품없이 흔들리는 것이 꽤나 예뻤다. 정국의 물음에 몸에 힘이 풀린 태형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흐아, 으… 울음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눈물을 훔치는 태형을 내려다봤다. 나쁘진 않네. 작게 중얼거리며 정국은 하얀 협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기가 담긴 그릇을 올려놓고 손을 뻗어 태형의 동그란 뒤통수 위로 손을 얹었다. 손 틈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칼이 들어왔다, 빠져나가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머리칼을 꽉 움켜쥔 채 태형을 거칠게 일으켜 침대 위로 내동댕이쳤다.
" 태형 씨는 남들보다 똑똑한 사람이잖아요. 알아서 잘할 수 있는. "
" … "
" 아, 그리고 난 끼니 거르는 걸 제일 싫어해요. 무슨 뜻인지는 알죠? "
하얀 이불 위로 내려앉은 태형이 이미 쏟아진 눈물을 마저 뱉고, 입을 꾹 다물었다. 손목에서 잘그락 거리는 수갑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사진은 별 의미 없습니다. 단지, 저와 제 반쪽을 구분 짓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