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잘 지키라는 말만 하고 나가버린 정국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태형의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굳게 잠겨있는 문은 열릴 줄을 몰랐고, 방 밖은 제가 있는 방만큼이나 작은 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정국의 부재가 길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두려운 살인마의 존재가 제 눈앞에서 없어졌다는 것만으로도 태형은 안심하고 있었다. 집은 나선 정국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올지, 돌아와서 무슨 짓을 할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의 부재가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온통 방 안을 뒤덮은 하얀색 속에서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될 때쯤, 태형은 자신을 덮쳐오는 졸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은 대체 얼마나 생각에 지배당하기 쉬운 동물이란 말인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에 벌벌 떨다가도, 두려움의 대상이 같은 공간에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하자마자 잠이 쏟아진다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태형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 다시 집에 돌아갈 수는 있겠지. "
멍하니 천장만 응시하다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는 방이었지만, 누가 대답해주기를 바랐다. 갈 수 있다고, 살아서 나갈 수 있다고 누가 대답해주기를. 태형은 문에 매달린 잠금장치들을 볼 때마다 빛을 잃어가는 희망과 스멀스멀 영역을 넓혀가는 절망이 두려웠다. 정국이 말한 혁명, 이 방 안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뿐이었다. '혁명을 일으키세요.' 정국의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이윽고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 사이로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르는 철문 소리가 들리자 태형은 본능적으로 이불을 끌어올렸다.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여자를 등에 업은 정국이 태형의 방을 지나 복도 끝에 위치한 방으로 향했다. 정국의 집에서 가장 서늘한 곳이었지만, 가장 많은 사람이 스쳐 간 곳이기도 했다. 정국은 수술대같이 차가운 침대 위에 여자를 올려두고는 입을 막아 온몸을 침대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위태롭게 매달려있는 주사기를 뽑아내자 피를 쏟아내는 여자의 목을 내려다보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카트 위에 놓인 여러 도구들 중 작은 도끼를 집어 들었다. 뭐든지 깔끔한 것을 추구하는 정국이었지만 태형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언제나 친절한 사람이 아니며, 귀찮은 짓을 벌인다면 당장이라도 네 발목을 분지를 수 있다는 것을. 태형의 피부 위에, 뼈 위에까지 새겨 넣을 차례였다. 마취제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여자의 발목을 한 번, 두 번, 단단하던 뼈가 형태를 잃고 흐물거릴 때까지 내리쳤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정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혁명의 시작은 화려하고 자극적일수록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손에 쥔 도끼를 카트 위에 던지듯이 놓아둔 정국이 슬슬 마취가 풀리는지 움찔거리는 여자를 뒤로하고 태형의 방으로 향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정국의 모습은 기괴해 보일 정도였다. 잠금장치들을 빠르게 풀어낸 정국이 문을 열었다.
" 자요? 아니면 자는 척 하는 거야. "
어느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웅크리고 있던 태형이 매섭게 휘몰아치는 목소리에 이불을 꼭 쥐었다. 왜인지 정국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묻어나 있는듯했다.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와, 비릿한 냄새는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태형이 마른침을 삼켰다. 가까워지는 발소리와 밝아지는 시야. 태형을 덮고 있던 이불을 거둬낸 정국이 창살에 매달린 수갑을 풀어냈다.
" 그, 피, 피가… 아! 아파요… "
" … "
" …잠시만요, 저기, 그러니까… "
불안한 듯 떨리는 동공이 정국을 쫓았다. 말없이 수갑을 풀어내 제 손목에 채운 정국이 태형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목줄을 채운 개를 다루듯 하는 손길에 흠칫 놀란 태형이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리다 힘겹게 균형을 잡아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수록 엄습해오는 불안함,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혈향. 희미하게 들리는 뭔가 막힌듯한 신음소리는 태형의 발을 잡았다. 태형은 몇 걸음 떼지 않아도 금방 직감할 수 있었다. 정국을 따라간 제 눈 앞에 펼쳐질 광경을,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직감했다.
피를 뒤집어썼음에도 고혹적인 정국의 워킹은 변함이 없었다. 망설임 없이 긴 다리를 시원스럽게 뻗는 정국과는 달리, 갓 태어나는 사슴마냥 비틀거리며 정국의 뒤를 쫓던 태형이 점점 더 짙어지는 비릿한 혈향에 지레 겁을 먹어 발걸음을 멈추고 하얀 복도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긴 수갑 덕분에 한참을 앞서 가던 정국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더이상 수갑이 이끌려 오지 않자 미간을 확 찌푸리며 겁에 질린 태형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발이 있는데 왜 걷지를 못해요. "
" 저, 저기. 아… 잠시만. 잠시만요. "
" 누구는 김 태형 씨 덕분에 발이 없어져서 이제 걷지를 못 하는데. "
" …그게, 무슨 소리예요. "
대신 기어 다닐 순 있어요. 개처럼. 태형이 모를 말들을 내뱉고 정국은 태형의 뒷덜미를 세게 그러잡아 거칠게 태형을 이끌었다. 그 손의 악력만으로도 목이 부러질 것 같이 아파와 태형은 옅은 신음만 내며 정국에게 질질 이끌어졌다.
마침내 걸음을 멈춘 정국이 태형의 뒷덜미를 놔주고 묵직하게 자리 잡은 자물쇠를 풀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쿵- 바닥에 무거운 쇳덩이가 떨어져 복도에 꽤 길게 울리는 메아리를 뒤로하고 정국은 문을 살짝 열었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태형의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젖히게 했다.
" 혁명하라. "
" … "
" 그게 최선의 선택이자, 최후의 선택입니다. "
한쪽 눈가를 찡그리며 덜덜 몸을 떠는 태형을 바라보다가 싱긋 웃어 보이곤 자기 손목을 옥죄는 수갑을 풀어내며 문을 활짝 열어젖힌 뒤 태형을 방 안에 처박았다. 문을 닫는 문틈 사이로 태형의 절규 섞인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는 것이 스쳐 지나가자 만족스럽다는 듯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문을 닫았다.
살인이라는 세계에 태형은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다. 한 사람에 의해.
" 하아, 흐…흑, 아… "
상상한 것 그 이상이다. 자신의 앞에 펼쳐진 풍경은. 선혈이 낭자한 바닥을 바라보던 태형이 용기를 내 고개를 들었다. 하얀 뼈가 보이는 발목이 처참히 찢겨져 살덩어리에 겨우 매달려 있는 모습은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잔인함을 넘어선 혐오스러운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연신 바닥에 헛구역질하며 진득한 타액을 뱉던 태형의 귀에 가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 끄윽, 끅… "
" 저기, 저기. 괜… 괜찮아요? "
태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자에게 다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리며 여자를 바라봤다. 끄으으윽…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 여자의 입술은 이미 파랗게 질려있었고, 여자의 입을 막고 있는 하얀 천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바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여자의 말문을 막고 있던 천을 빼 바닥에 던졌다.
" 흐윽, 끅, 아파, 아파, 요. "
아프다며 눈물만 내뱉는 여자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에 멍하니 여자를 바라봤다. 이제야 이해가 됐다. 정국이 했던 모든 말들이.
"정분 나겠네요, 그러다가. "
정국이 문을 열고 유유히 들어와 여자의 입에 다시 하얀 천을 쑤셔 넣었다. 정국을 보자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리며 없는 힘을 쥐어짜면서 발악하는 여자가 시끄러워 카트를 질질 끌어와 도끼를 잡아 달랑달랑 매달려있던 발목을 내리쳤다.
" 시끄러워요, 수영 씨. "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떨어대는 여자에게 싱긋 웃어 보이며 여자의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태형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 여자의 시야가 잘 잡히는 곳으로 가 자리를 잡고는 나른하게 눈을 풀었다. 수영 씨가 원했던 거. 보여드릴게요. 나긋나긋 조용히 속삭이던 말이 입맞춤과 함께 먹혀들어갔다. 말캉한 입술이 닿기 무섭게 혀를 넣어 갈팡질팡하는 태형의 혀를 부드럽게 옭아맸다가 쪽, 빨아들였다. 몸을 바둥 거리는 태형을 꽉 끌어안으며 목에서부터 허리까지 척추를 타고 느릿하게 손을 내리다가 태형의 마른 허리를 지분거렸다. 아응, 응. 태형의 색정적인 신음과 달뜬 숨이 정국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두 남자의 질척한 키스를 하나부터 열까지 지켜보던 여자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지만 애처롭게도 하얀 천이 날카로움을 흡수해 뭉툭한 소리만이 허공에 맴돌았다.
애정하는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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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예쁘게 보내기. 약속 지켰으려나. 어차피 이 글은 못 보겠지만.
다들 애정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