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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서 만나요.

 

 

 

오늘도 있다. 매일 오후 12시 30분쯤 104번 버스에 올라서서 카드를 찍은 후 내가 하는 일은 뒷문에서 두 번째 자리, 딱 그곳을 살피는 것이다. 그러면 열에 아홉은 항상 그가 그곳에 앉아있다. 작은 머리에 항상 하얀색의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 수수한 검은 머리는 눈을 살짝 가릴 만큼 길지만 그게 결코 답답해 보이지는 않았다. 분명 그의 하얀 피부 덕일 것이었다. 흰 셔츠에 베이지색 가디건을 입은 평범한 듯 보이는 그의 모습에 반해 이 짓을 한 것도 벌써 두 달째. 그 동안 내가 본 그의 얼굴은 대부분이 옆모습이었다. 그는 창가에 앉아 매일 보는 창밖의 풍경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내릴 때까지 버스 안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일이 없었다. 뭐, 그 덕분에 뒷문 한편에 서서 그를 마음껏 바라볼 수 있기는 했다. 항상 장을 보고 돌아오는 아주머니, 혹은 졸고 있는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손님이라곤 몇 되지도 않는 널널한 이 시간의 버스 안에서 앉지도 않고 서있는 것이 이상해 보일 법도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바라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당연히 나는 우리의 관계가 발전될 거란 기대 따위도 하지 않았다. 매일 늦어서 그를 보지 못할까봐 급하게 준비하며 불안해하는 것도 이제 일상이 되어버린 이상, 난 그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했다. 그래, 그랬었다. 그랬었는데, 나 왜 지금은 이렇게 된 거지.

“우왁, 늦었어, 늦었어!! 못 보면 안 되는데. 못 보면 그 날 하루는 망치는데!!!”

과제로 밤을 새는 바람에 늦잠을 잔 나는 입에 빵 쪼가리 하나를 물고 급하게 버스정류장으로 달렸다. 다행이도 막 출발하려던 버스를 잡아탄 나는 평소와 다른 버스 안의 상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홍빈이 형, 나 시험 개 망했어요. 집에 못 들어가. 어쩌지. 우리 한강이나 갈래요?”

“혁아.”

“응?”

“요즘은 한강에 빠졌다가 건져지면 벌금 물어야 돼. 너 돈있냐?”

“아뇨.”

“그럼 닥쳐.”

“네.”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꽉 찬 버스 안에서 두 남학생의 대화를 엿들은 나는 비로소 지금이 학생들의 시험기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발자국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그의 자리가 보이지 않아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최대한 꼬물딱거리며 뒷문으로 다가갔지만 여전히 그의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아무리 쭉 뻗고 발꿈치를 아무리 들어보아도 요즘 고등학생들은 나 때와는 다른 것을 먹는지, 발육 상태가 남달라 그들의 가슴팍만 보일 뿐이었다.나도 작은 편은 아닌데... 결국 나는 그들이 어느 정도 빠지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그때, 평소엔 안전운전을 즐겨하던 기사님이 웬일인지 급정거를 했고, 그 바람에 나는 옆사람을 팔꿈치로 찍어버렸다.

“어, 어익후. 죄, 죄송합니……다…….”

숨이 멎을 뻔했다는 게 이럴 때 쓰는 것이란 걸 온몸으로 느낀 나는 옆 사람을 바라보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였다. 그토록 고개를 빼고 찾으려던 사람이 내 옆에 서있었다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도 바로 이럴 때 쓰는 거다. 정말 딱 이런 상황일 때. 그는 내 사과에 살짝 고개만 끄덕이고 앞을 바라봤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간지럽고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그의 옆얼굴만 빤히 바라봤다. 그때 그가 창밖만을 보고 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때 나는 입을 벌리고 눈은 풀려서 엄청나게 추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그를 넋 놓고 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나는 급하게 입을 닫고 눈에 힘을 준 후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고 그처럼 창밖을 바라봤냐하면, 당연히 아니다. 나는 창가에 비친 그를 힐끔거리며 설레는 마음에 혼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 앞에 앉아있던 사람이 내리면서 자리가 빈 것도 모르는 게 당연했다. 자리가 비었건 말건 그만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고개를 돌리다니, 아직 그가 내릴 정거장은 세정거장이나 남았다. 웬만해선 창밖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는 일이 없는 그가 뭘 보는지 궁금해진 나는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버스 안에는 그저 학생들만 우글우글 있을 뿐이었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 바람에 부딪힌 남학생에게 급히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다시 그를 봤을 때도 그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 사람이랑 눈을 마주치다니. 어쩔 줄 몰라 그저 눈만 꿈뻑이고 있는 내게 그는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앞에 난 자리를 가리켰다.

“아, 아, 네. 감,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아 최대한으로 몸을 웅크린 나는 소리 없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다. 내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챘을까? 혹시 나를 스토커로 알면 어떡하지? 매일 훔쳐봤다고? 아니.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그는 내가 매일 이 버스에 올라타는 것도 전혀 모를 테니까.

“이번 정류장은 대한극장입니다.”

내리자. 물론 학교는 더 가야하지만, 여기 더 있다간 진짜 바보가 될 것 같다. 차가 멈추고 뒷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겐 단 한 번의 시선도 주지 않고, 카드를 찍지도 않고 바로 내려버렸다.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뒤돌아 있던 나는 버스가 출발하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며 떠나간 버스의 뒤꽁무니를 바라볼 수 있었다.

“아이씨, 환승해야 되는데 카드도 안 찍었어. 아오 내 차비. 아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나서 일주일 동안은 일부러 30분씩 늦게나와 학교를 갔다. 그를 또 봤다간 그땐 정말 바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으나, 일주일간 그를 보지 않은 나는 그것으로도 바보가 되었다. 고작 이틀을 안 봤을 뿐인데 과제가 손에 잡히지 않았고, 학교에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틀 전만 해도 늦을까 불안해서 모든 준비를 단시간에 끝냈던 반면에, 지금은 양말 하나를 신는데도 거의 십 분이 걸렸다. 발가락 넣고 그 사람 생각, 발바닥 넣고 그 날 생각. 그러다가 엄마한테 등짝 한 대를 얻어맞고 나서야 어슬렁어슬렁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이런 내 변화를 제일 먼저 알아챈 것은 학교 친구인 이재환이였다. 그를 발견하기 전부터 지각의 대명사였던 내가 언제부턴가 단 한 번의 지각도 하지 않자 죽을 때가 된 것 같다고 했던 이재환은 이젠 지금의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 차학연!! 말을 좀 해보라고! 말을! 누가 너 괴롭혀? 막, 막 잠도 못 자게하고, 막 그래? 그래서 못 일어나고 막 지각하고 그러는 거야?”

“응. 그래.”

“뭐? 그럼 그렇지! 대체 어떤 년이야?!”

“년이 아니라.”

“년이 아니라?”

“놈…….”

“아 놈. 응? 놈? 뭐, 놈?! 오모오모 이게 미쳤나? 요즘 너 뭔 짓을 하면서 돌아 댕기는 거야? 너 그러면 안 돼!! 정신 차려! 이게 미쳤네, 미쳤어. 어? 아주 미치게 하네!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랑 그새 나한테 말도 안하고!! 진도가 그렇게까지!! 오모오모 부끄러워서 내가!! 오또카지!?!?”

“아오, 그런 거 아니야!! 이재환 아주 음란마귀가 쓰였지!! 아오!”

“아니야? 진짜 아니야? 그럼 뭐야? 뭔데 그럼!”

이재환의 닦달에 못 이겨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은 나에게 돌아온 것은 맵디매운 이재환의 손바닥과 크나큰 목청이었다.

“아오, 이 맹탕아! 도대체 뭐 때문에 일주일이나 그 사람을 피해 다녀? 네 말대로 하면 살랑대는 봄바람 같은 남자를?”

“어차피 안 될 건데, 마음만 더 커지면 어떻게 해. 더군다나 그 사람 성격도 취향도 모르는데 이상하게 점점 좋아진단 말이야. 나 진짜 이상해. 이것도 뭐 병인가?”

“하, 이 답답아. 니가 그러니까 벌써 24년째 연애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 거 아니야. 용기를 내! 왜 안 된다고만 생각해? 그리고 원래 사랑이란 게 말이다? 뭣도 모르고 시작되는 거 아니냐. 왜 그 춘향이랑 몽룡이. 그것들도 첫눈에 보고 딱! 반해서 백년해로 하잖아?”

“걔들은 남녀사이잖아. 그리고 너도 모쏠이잖아 아오!”

“야! 난 안하는 거야. 못하는 게 아니라. 아직 날 설레게 하는 사람을 못 만났거든.”

“어? 너 저번에 나랑 술 마시다가 그 누구더라 김원식? 걔한테 설렌다고, 읍!”

“너 조용히 안 해? 내가 언제 그랬어, 언제?! 걔는 그냥 한 마리의 애벌레일 뿐이야!”

맵기만 한 게 아니라 짜기까지 한 친구의 손바닥을 맛 본 나는 그 후부터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얌전히 그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너, 그 사람 진짜 좋은 거지?”

“응응.”

“막 가슴도 설레고?”

“응응.”

“막 계속 보고 싶고?”

“응응.”

“그럼 고백해.”

“응응. 응??”

“고백하라고 이 숭늉 같은 놈아! 자, 내 말만 들어. 그럼 바로 성공이다 너? 이게 요즘 유행하는 고백기술이거든? 아 뭐해? 빨리 공책 펴서 적어!”

 

 

***

그렇게 약 일주 일만에 탄 오후 12시 30분의 104번 버스에서 나는 언제나 그렇듯 그 자리에 앉아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평화롭게 창밖을 보는 그와 달리 나는 마음 편히 그를 구경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시도도 못해보고 오면 직접 나를 끌고 와 그동안의 내 행태를 낱낱이 불어버리겠다는 이재환의 목청 좋은 소리가 아직까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나마 소심한 내 성격을 배려해서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마음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라며 가르쳐준 것인데도, 나는 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이재환이 직접 예매해서 내 손에 쥐어준 영화표 두 장은 이미 꾸깃꾸깃 해진지 오래였다. ‘네가 싫어서 그 사람이 영화를 보러 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냥 너 혼자 영화보고 와서 쿨 하게 잊으면 되는 거야, 이 멍충아!’ 고민하는 내 등짝을 후려치며 말하던 이재환의 말이 머릿속에서 쌩하고 지나갔다. 항상 서 있던 뒷문까지 갈 용기도 안 나서 그냥 앞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왠지 아까 맞은 등짝이 아파오는 느낌에 등을 문지르며 힐끔 뒤를 돌아봤다. 그가 창문을 살짝 열어놓았는지 새어 들어온 바람이 그의 머리를 살랑이게 했다. 하, 바로 저거다. 이재환에게 말한 살랑이는 봄바람 같은 남자. 그래, 이렇게 된 거 부딪혀보는 거야!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결심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망설이면 또 고민하게 될 것 같은 마음에 척척척 소리가 날 만큼 기계적으로 그의 바로 옆까지 걸어갔다. 여전히 그는 내가 온 것도 모르는 듯 보였다. 그런 무심해 보이는 모습에 나는 갑자기 또 자신감을 잃어갔다. 세상만사 별 관심도 없어 보이고, 여자한테는 더더욱 관심도 없어 보이는데, 이런 수작이 먹힐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친구의 멱살이 눈앞에 둥둥 떠올랐다. 괜히 나를 부추겨서 힘들게 만들고 있어. 아오. 안되겠다. 이건 정말 아닌 것 같다. 이게 뭐야. 나 같아도 처음 보는 사람이 영화표 들이밀면 이게 어디서 약 팔고 있어! 할 것 같은데, 더군다나 저런 무심한 사람한테. 이건 아니다 진짜. 못 하겠다 진짜!!

끼익-

“우악!”

고백 따위 없던 걸로 하자는 결심이 굳혀져 다시 앞자리로 돌라가려고 한 발을 땠을 바로 그때였다. 정말 평소에 안전운전 잘만 하던 기사님은 왜 하필 이럴 때 급정거를 하냐고! 기사님의 급정거에 나는 휘청거리다가 털푸석, 살포시가 아니라 털푸석 그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조심스럽게 그에게 고개를 돌리며 신경 쓰지 말고 창밖이나 바라보고 있으면 좋겠다는 내 바람과 달리, 그는 나를 당황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당황한 것은 그가 아니라 나였다.

“아, 그게, 아니, 저, 그니까, 그게, 중심이 이렇게, 어, 그니까.”

“이번 정류장은 대한극장입니다.”

스스로도 뭐라고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는 말들을 쏟아내는 와중에도 버스 안에 울려 퍼지는 안내멘트를 용케도 들은 나는, 이젠 나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뒷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끌었다.

“이, 이게요. 그니까, 하하. 그니까 저기.”

안절부절못하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잽싸게 그에게 영화표를 던지듯 전달하고는 그대로 버스에서 내려버렸다. 버스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뒤도 못 돌아보고 있던 나는 차 소리가 멀어지자마자 그대로 무릎을 모으고 쭈그려 앉아버렸다. 버스의 뒷모습만 애처롭게 바라보다가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방금 내가 한 짓을 곱씹었다.

“멍충이. 멍충이 차학연 흐엉. 엄마, 엉엉.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소심한 거예요? 남들은 길가다가도 이름이 뭐예요? 전화번호 뭐예요? 잘만 물어보던데. 나는 뭐가 이렇게 힘들어요. 흐엉. 카드도 또 못 찍었어. 엉엉. 내 차비. 헝.”

그렇게 얼마나 자책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을까, 문득 내 팔에 느껴오는 감촉에 칭얼거림을 멈췄다. 왠지 쎄한 느낌에 고개를 들지 않고 그대로 머리를 쥐어 잡은 채로 가만히 있자, 다시 한 번 더 무언가 팔을 콕콕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헝, 엄마. 누가 또 나한테 약 팔려나 봐요. 도를 믿냐고 물어보면 진짜 삐뚤어져버릴 거라는 생각을 하며 그대로 힘차게 고개를 들었다.

“우어억.”

“어어?”

내 앞에 나처럼 쭈그려 앉아있는 사람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갈 뻔 했고, 앞에 있던 사람은 놀라며 내 팔을 잡아 원상복귀 시켰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였다. 분명히 버스가 갔는데…….

“저, 이거.”

그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그의 말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고, 그곳엔 그의 손에 들려져 있는 영화표가 있었다. 역시나 거절이구나. 그나저나 참 착하네. 그냥 버리면 되지 돌려주기까지 하고…….

“저기, 두 장 다 저를 주시면 어떻게 해요.”

“네?”

“혹시, 저 다른 사람이랑 보러가라는 의미였나요?”

“어억, 아니요!!!”

예상과는 다른 말에 그냥 버리라고 말하려던 나는 너무 놀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나며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바로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와 달리 그는 천천히 일어나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영화 시간 삼십분 전에, 여기에서 만나요.”

“네? 네, 네.”

마지막까지 바보 같은 내 대답을 듣고 그는 먼저 자리를 떴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누가 보면 무서워서 도망갈 만큼 방방.

영화가 시작하기 20분 전. 자고로 약속시간보다 늦게나가는 것이 첫 만남의 정석이라며 날 만류하던 이재환의 만류에도 그런 게 어디 있냐며 제 시간에 딱 맞춰온 나와 다르게 그는 10분 째 오지 않고 있다. 늦게 될 상황이라도 그 흔한 번호교환 하나 안했으니 연락할 길이 없다. 좀 물어볼걸. 이름도, 나이도. 뭐, 10분 정도야 늦을 수도 있지. 오늘 오면 연락처부터 꼭 물어봐야겠다.

영화 시작하기 10분 전. 여전히 그는 오지 않고 있다. 오다가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오지 않는 것일까. 날씨도 점차 꾸물꾸물해지는 것이 영 별로다.

영화가 시작했다. 이미 약속시간은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은 그가 멀리서 달려올까 봐 나는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걱정이 되도 찾아갈 수도, 찾아볼 수도 없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오기 싫은 것일까.

시간이 꽤 흐르고 날이 저물었다. 그는 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신경 써서 입은 옷이 거슬린다. 깔창 깔은 신발은 당장이라도 벗고 싶을 만큼 아프다. 그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다음날, 나는 일찍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기다리는 동안 불안함에 가만히 서 있지도 못하고 주위를 배회했다. 그가 없어도 문제, 있어도 문제였다. 그가 버스 안에 없다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괴로우면서도 찾을 방법이 없어 힘들 것이고, 그가 버스 안에 있다면 나는 나를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다.

마침내 멀리서 버스가 달려왔고, 나는 버스정류장에 있는 보조물의 뒤로 몸을 숨겼다. 버스가 미끄러지듯 도착하고, 뒷문이 열렸다. 뒷문에서 두 번째,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본 그곳에는 그가 앉아있었다.

 

 

***

“너 괜찮겠어? 오늘까지 쉬지 그래.”

“괜찮아요. 다녀올게요.”

엄마의 만류에도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집을 나섰다. 벌써 며칠 째 자리 펴고 누워 낑낑댄 것인지 모르겠다. 쌀쌀한 밤의 날씨를 얇은 셔츠 하나가 막아주지 못한 탓이었다.

“오늘 비 온대. 우산 챙겨.”

평소에 엄마의 일기예보는 맞은 적이 없기에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나가려는데 그것을 눈치 챘는지 엄마가 뒤에서 내 가방을 잡아챘다.

“오늘은 진짜 많이 온댔어, 이것아.”

결국 한 손에 우산을 받아들고 나는 느릿느릿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1시. 이미 그는 지나갔어도 한참 전에 갔을 시간이다. 그럼에도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택시를 잡아탔다. 그 ‘대한극장’이라는 정류장의 소리도 듣고 싶지 않고, 그곳에 잠시라도 멈춰서고 싶지 않았다. 이재환에게 말하면 그에게 사정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며 열변을 토하겠지만, 그냥 뭐랄까.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투둑,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더니 금세 꽤 굵은 빗줄기로 변했다. 오늘은 웬일로 엄마의 일기예보가 들어맞았다. 이런 건 안 맞아도 되는데. 비 오는 날 차 안은 습하고 끈적끈적하고, 정말 싫다. 입술을 비죽거리며 차 시트에 몸을 깊게 기댔다.

“어이구, 저 학생은 비 오는데 왜 저러고 있남.”

창밖을 보며 중얼거리는 기사님의 말에 별 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본 나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라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어구, 학생 왜 그래? 괜찮은가?”

본인이 더 아픈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연신 묻는 기사님에게 대충 고개를 저으며 창문을 열었다. 이미 지나가서 제대로 보이지 않아 고개를 내밀어 다시 한 번 확인했지만, 확실했다. 확실히 그였다.

“학생 왜 그래? 응? 비 들어오잖아! 학생! 어구 위험해!! 까만 학생!! 고개 집어넣어!!”

“기사님! 저 여기서 세워주세요!!”

당황한 기사님이 차를 세우자마자 돈을 내밀고 거스름돈도 받지 않은 채 뛰어갔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지만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맞은 건지 이미 다 젖은 머리가 처량해 보여 우산을 펴고 그에게 가만히 씌어주었다. 그제야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확인했다.

“아……. 찾았다.”

“그쪽이 찾은 게 아니라, 내가 온 거잖아요! 여기서 대체 뭐하는 거예요? 비도 다 맞고 이게 뭐냐고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연락처도, 사는 곳도, 다니는 학교도, 아무것도 모르니까..... 나는 여기서 이렇게... 기다릴 수밖에 없잖아요.”

그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만 우리 사이에 떨어져 내렸다.

“미안해요. 어머니가 갑자기 위독해져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어요. 한참 후에야 안정을 찾으셔서 급하게 왔는데, 이것만 떨어져있어서…….”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불현듯 떠올랐다. 그가 항상 내리던 정류장이 서울대학병원이었다는 것이. 혼자 오해하고 상처받았던 내가 한심해진 순간 그는 가방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의아한 내가 가만히 바라보자 그는 어쩐지 혼자 묘하게 뿌듯해하는 얼굴을 지으며 책장을 넘겨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어, 이건…….”

영화표였다. 누군가에게 밟힌 자국이 있는 그 영화표는 그에게 준 것이 아닌, 내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내가 내 것이 맞는 지 재차 확인했던 것은 너무나도 빳빳했기 때문이다. 구겨진 자국은 있는데, 종이가 이상하게 빳빳했다.

“그게, 다림질을 해서…….”

“다림질이요?”

“네. 어떻게 들릴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영화표처럼 구겨진 그거 다시 피면 안 돼요?”

“그거요?”

“네. 그날 시간이요……. 이번엔 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아. 네. 뭐. 저는, 뭐.”

내 시원찮은 대답에도 그는 내가 처음으로 보는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엄마, 웃으니까 더 잘생겼어, 헝.

“그럼 내일 여기에서 만나요. 저번 그 시간에!”

“잠시 만요.”

“네?”

“그전에 할 말 있어요.”

“할 말이요?”

이렇게 겨우 만났는데, 저번 그날처럼 돼버리면 어떡하라고? 그날 내가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지. 자, 얼굴에 철판 깔고.

“이름이 뭐예요?”

“네?”

“전화번호는 뭐예요?!”

 

 

 

 

***

“흠.”

“저, 저기.”

“흐음.”

그를 앞에 두고 요리조리 살펴보며 어슬렁거리는 이재환의 눈빛은 마치 용필이 형님 노래에 나오는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린다는 하이에나 같았다. 이재환의 눈빛에 그는 이 장면이 만화였다면 눈에 선명히 보일 땀, 땀, 땀을 흘리며 눈치를 봤다.

“야, 이재환.”

“흐음.”

“아 이재환!! 뭐해!!”

“뭐하긴! 니 남자친구 스캔 중이잖아!”

“나, 남자친구 아, 아닌데?”

“뭐여. 아직 안 사겨?”

나는 지금, 후회중이다. 폭풍 후회 중. 그동안 있었던 일을 친구에게 털어놓자 이재환은 자신에게 검증을 받아야 한다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고, 결국 그를 소개시켜줬다. 그랬더니 한다는 소리가 뭐? 아직 안 사겨? 이제 일주일 만났다!!

“그,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래 그런 거 아니야.”

“저기요, 봄바람처럼 살랑이는 청년 형님.”

“야!!”

저 놈이 날 말려 죽이려는 게 분명했다. 내가 한 말을 그대로 그에게 읊는 저 화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저를... 부르신 건가요?”

“네네. 그쪽이요. 봄바랑에 살랑거리는 그쪽. 이름이...?”

“정택운...”

“아아 택운 형님?”

“네?”

“학연이랑 사귀는 사이가 아니에요?”

“아...”

그는 내 친구의 물음에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분명 사귀는 사이가 아닌 게 맞는데 기분이 왜 이러지.

“그럼 난 어때요?”

저것이 지금 내 봄바람한테 뭔 소리를 하는 거여?

“네?”

“난 어떠냐고. 아무 사이 아니라며.”

“아, 아니 저, 저는.”

“에이 쿨하게 말해 봐요. 난 괜찮, 우억!”

그에게 헛소리를 해대던 이재환은 마치 고단한삶에 찌든50대 아저씨와 같은 목소리를 내며 누군가에게 어깨를 잡혔다.

“야 이재환! 너 나한테 이럴 수 있냐?”

“뭐, 뭐여. 이 애벌레는.”

김원식이다. 저번에 이재환이 설렜다가 그냥 한 마리의 애벌레일 뿐이라고 말했던 그 남자.

“내가 너 때문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데 저런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애랑 벌건 대낮에 학교 앞에서 이게 뭐하는 거야!”

“니가 나 때문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데?”

“모르냐? 진짜 모르냐?! 내가 너 질투심 유발하게 하려고!! 어?! 막 이 여자한테 잘해주고! 저 여자한테 잘해주고!! 어?! 저 남자한테 귀엽다하고!! 이 남자한테 밥 사주고!! 어?!”

“허, 그니까 그 짓거리들이 일부로 그런 거다?”

“어!!! 어? 아, 아니. 그게. 아 나 수업 들어가야 되는데 깜빡했다. 난 그럼 이만. 안녕?”

혼자 흥분해서 이재환에게 소리를 지르던 애벌레, 아니 김원식은 이재환의 말에 이성을 찾은 듯 당황하더니 학교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자 이재환은 나를 바라보며 씩,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저거, 저거 내 친구지만 저런 표정 지을 때는 좀 무섭다.

“차학연아”

“으응?”

“내가 너의 연애에 속도 좀 줘보려고 했는데, 지금 내 연애사가 먼저라.”

“에?”

“니 연애는 니가 알아서 잘 하고. 나중에 더블 데이트나 하자? 그럼 난 이만. 안녕? 봄바람 형님?”

마지막 말과 함께 윙크를 날리고 사라진 이재환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벙진 채로 그를 봤다. 그러자 나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그가 나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쪽 보다 늦으면, 좀 억울할 것 같은데.”

“네?”

“나는, 학연 씨 좋아한지 오래됐으니까, 잘은 모르지만 아마 저 사람들 보다 더 오래 됐을 텐데.”

“오래, 됐다니. 그게 무슨.”

“매일 기다렸어요. 학연 씨가 버스에 올라타길.”

“헐?”

“이제 같이, 타요. 버스.”

“그니까 지금 그 말은.”

“우리……. 사귀면……”

“콜!! 완전 콜!! 대박 콜!!!!”

이재환, 흥이다. 너가 안 도와줘도 나 연애하거든? 이거 왜 이래, 내가 바로 그 섹시한 차여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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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헐......이거 모야......죠타.....버스에 올라타길 기다렸대....옴마.........설레........
10년 전
나라세
설렜다니 다행이네요ㅜㅠ 댓글감사해요!!
10년 전
독자2
흐허헣허허엉 완전 좋아요 작가님 흐헝 달달합니닼ㅋㅋㅋㅋㅋㅋ 완던 좋아요 ㅋㅋ 다음편이 너무 궁금합니다!!! 신알신하고 갑니다~~
10년 전
나라세
아고 신알신 감사해요ㅜㅠ 앞으로도 잘봐주세요!!
10년 전
독자3
아 예뻐요 ㅠㅠㅠ 너무 예쁘다 ㅠㅜㅠㅜㅠ 작가님 정말 취향저격....아 작가님 진짜...구독료때문이 아니라 진짜 진심으로 예뻐서 댓글 쓰네요 ㅠㅜㅠㅜㅠ 작가님 설레 쥬금....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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