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고 더불어 거름의 냄새까지 같이 나는 곳에서 나는 30년 동안 썩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시골 촌구석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돌덩이처럼 뭉친 부모님 어깨 주무르는 일 밖에 없었고 과수원집 아들이라고 해도 농사일이 적성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러다 죽으면 그만 이지. 라며 분홍빛 감칠 돋는 복숭아를 집어 던져 엄마에게 등짝을 후려 맞은 것이 바로 엊그제 인데,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나는 30분 만에 페이지 로딩이 된 컴퓨터 모니터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이 회사 사장이 김동혁과 이동혁을 헷갈린 것은 아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은 일어날 수야 없었다. 요즘 일을 너무 안한 것 같아 이대로는 굶어 죽겠다 싶어 일을 할 곳을 찾아보다 카피라이터 채용을 원하는 광고회사가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력서를 집어넣었는데 이런 대박이 있을 줄이야. 나는 눈을 비비고 똑같은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반듯하게 쓰여진 글씨의 내용을 보고 간단한 면접만 보면 된다는 말에 저절로 광대가 승천했다. 역시 스펙을 열심히 쌓은 노력이 빛을 보는구나! 통학만 2시간을 하면서 친구 집에 빌붙어 살던 시절이 기억나면서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엄마! 나 이제 효도 할 수 있어!
“엄마, 엄마! 빨리 와봐!”
예감이 너무 좋았다.
정말 이상하게도 말이다.
00 언제나 행복 뒤에는 불행이 기분 나쁘게 웃고 있다.
젠장, 젠장, 젠장! 엄마는 왜 계속 복숭아만 보내주는 거야! 아직도 못 먹은 복숭아가 냉장고를 꽉꽉 채우고 있다 못해 문만 열면 복숭아가 와르르, 쏟아질 지경인데 또 다시 엄마가 보내준 복숭아 한 박스는 골치 덩어리였다. 오늘 아침도 빵에 복숭아 잼을 발라먹고 점심은 복숭아 하나를 먹었는데 저녁에도 할 수 없이 복숭아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어질어질, 골이 아팠다. 이대로 냉장고에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빨리 물러버리는 복숭아를 집안에 그냥 들여 놓는다는 건 상상 하기 싫었다. 개미들이 줄을 지어 내 머리위를 지나간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기 시작했다. 어쩌지? 그냥 이 자리에서 다 먹어버려? 아니지, 아니야. 내일 아침 뉴스에 복숭아 먹다 죽은 남자라는 이름으로 보도 될 수야 없지. 그럼 그냥 버릴까?
“내가 미쳤지, 이걸 어떻게 버려.”
부모님도 나 생각해서 보내주신 건데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어떡하지? 분홍빛 복숭아가 가득 들어있는 종이상자를 초라하게 쪼그려 앉아 보다가 마음에 굳은 다짐을 하고 자리에서 퍼뜩 일어나 복숭아 상자를 두 손으로 들었다. 나 굶어 죽을까봐 많이도 보내셨네. 그래, 오늘 복숭아 배 터질 만큼 먹어보지 뭐.
라고 다짐했던 것이 불과 30분 전인데, 나는 복숭아 앞에서 처참히 무너졌다. 처음에는 정말 꿀맛이었는데 갈수록 입 전체의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망했어, 나는 이제 뭘 먹어도 복숭아 맛이 날거야. 한입 먹은 복숭아를 탓 할 수도 없고,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탓 할 수도 없었다. 다시 생각하자 김동혁, 보통 집에 쌓인건 어떻게 해결하지? 내가 먹거나 주변에 나누어주겠지?? 잠깐,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시골에서 매일 쓰던 방법인데 그걸 벌써 까먹다니, 보통 시골에서는 음식을 많이 해놓고 주변 사람들을 불러 다 같이 먹고 마시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고, 쌓인 음식을 처리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걸 지금 기억 해내다니, 나는 다섯 번째 먹고있던 복숭아를 다시 한입 베어물고는 씨익 웃었다. 옆집 앞집 뒷집에 일곱 개씩 주면 냉장고에 어느 정도 자리는 남겠지?
“아, 여기 있다.”
싱크대 위에 있는 찬장에서 찾은 분홍색 플라스틱 통의 뚜껑을 열고 복숭아 일곱 개를 집어 넣으니 왠지 기분이 뿌듯했다. 난 참 착한 것 같아, 헤헤.
“저 지난번에 옆집으로 이사 온 사람인데, 문 좀 열어주세요.”
아무도 없나? 똑똑똑, 손을 말아쥐고 현관문을 한 번 더 두드렸는데 돌아오는건 정적 맊에 없었다. 내가 무슨 판매원인줄 아는 건가? 내가 어딜 봐서 판매원이야? 괜히 언짢은 기분에 에라이, 엿이나 먹어라 라는 마음에 테이프로 붙여있던 신문, 판매원 절대 사절! 이라고 쓰여 있는 경고문에 침을 한껏 모아 뱉으려는데 평생 안 열릴 것 같던 현관문이 끼익 하고 열리더니 익숙한 3개의 선이 있는 슬리퍼가 눈에 들어왔다.
“켁!”
“누구신데 남의 집 문 앞에서 이러고 계세요?”
힘껏 모았던 침이 다시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가버렸다. 으엑, 이게 다 삼선슬리퍼 때문이야. 문 좀 빨리 열어주지!
“저.. 한 달 전에 이사 온 사람인데요... 잘 지내보자는 기념으로….”
복숭아가 든 통을 주고 고개를 드는데, 허이구. 지나가던 까치가 친구하자고 하겠네. 목 늘어난 흰티에 파란 추리닝 바지가 인상적이시네. 여태 잠만 퍼질러 잤구만?
“볼 일 끝났음 가보세요.”
“문 좀 빨리 열어주지..”
왠지 내려다보는 시선이 따가워 안녕히계세요-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무래도 아쉬웠다.
내가 침을 뱉었어야 했어..
준회는 주말에 단잠을 깨운 이웃 남자에게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 주려 했었지만 선물까지 들고 온 남자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하암,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한 준회가 목을 벅벅 긁었다. 왜 이렇게 간지럽지?
“복숭아는 먹지도 않았는데, 왜 이러지?”
준회가 분홍색 플라스틱 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는데 걸린 시간을 10초도 걸리지 않았고, 그대로 방바닥에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가는데 10분이 걸렸다. 정말이지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준회는 혼미해진 정신으로 동혁의 얼굴을 기억해내려 안간힘을 썼다. 내가 꼭 그 자식을 부셔버리리. 그것이 준회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어휴 똥글...긴 여행이 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