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랄, 아무래도 저녁을 잘못먹은게 틀림없다. 배가 꽉 막힌 게 아무래도 체기가 있는 듯하다. 이럴 때는 동네라도 한 바퀴 도는 것이 좋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귀찮다는 내색을 보였다. 갈 것인가, 안 갈 것인가. 이 두 가지에서 갈등하던 나는 결국 전자를 선택했다. 마침 날씨도 선선하고 바람도 밤이라 그런지 시원한 게 마음에 들었다. 새벽에 가까운, 이른 시각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라 학교도 가지 않으니 안 될 것도 없었다. 나가기를 선택한 나는 가벼운 복장에 짙은 색의 캡모자를 눌러 쓴 뒤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집을 나섰다.
한정한 주택가는 조용했다. 되레 내 발걸음 소리가 울리지 않을까 걱정되던 참이었다. 그런 걱정과는 달리 내 입에서는 무슨 노래가 흥얼거리고 있었다. 뭔가 익숙한 멜로디의 음악인데, 어디서 들었더라? 정말 좋아했던 노래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를 않지 골치 아파지기 싫었던 나는 금방 잊어버리기로 했다. 내가 봐도 난 참 단순하다. 단순하다 못해 무식한 놈이다. 이 와중에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투명한 검은 하늘에 경쟁이라도 하는 듯 서로 더 반짝이는 수많은 별과 그 톡톡 튀는 빛들을 감싸주는 달빛이 나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쭉 새벽운동을 해볼까, 하늘을 보며 나는 또 한 번 고민에 휩싸였다.
"...지훈아...?"
"...우지호."
이상하다, 난 그 녀석과 마주쳤을 뿐이고 이름 한 번 불렀을 뿐인데 방금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가슴이 요동쳤다. 녀석도 꽤나 당황스러운 듯 찢어진 눈에 동그랗게 떠져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이럴 때 우지호가 귀엽다고 느끼는 내가 참 병신 같다. 표지훈.
"혼자 산책하는 거야?"
"어."
"...그렇구나."
"...어."
"..."
"근데 네가 왜 여기에 있냐."
"그야, 여긴 우리집 앞이니까."
녀석의 말이 끝나고 손끝이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어느새 내가 우지호의 집 앞에 와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택가가 좀 심하게 넓긴 해도 녀석과 나는 엄연한 동네이웃이었다. 다만 왕래하기가 힘들 뿐이지.
"이 시간에 왜 나와 있어."
"그냥... , 나오고 싶었어.
"..."
"지훈아."
"왜."
"우리 오랜만에 둘이서 얘기 좀 할까?"
"...어?"
"예전처럼."
"너 마음대로 해."
"그럼 너랑 같이 걸어도 되지?"
마지막에 싱긋 미소를 지으며 내 옆에 슬며시 붙는 우지호.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지? 나오는 미소를 애써 삼키며 녀석과 마냥 걸었다. 이제는 발걸음이 아니라 내 심장소리가 녀석의 귓가에 닿을까 조마조마 해졌다. 정말 우지호의 말대로, 예전처럼 돌아간 기분에 내심 즐거워졌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구름 위를 나는 것처럼 둥둥 떠다니는 그런 느낌. 구름 위를 난다는 말이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나보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기분은, 우지호가 옆에 있어야만 느낄 수 있는 설렘.
"저어, 지훈아."
점점 젖어드는 자아를 깨우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니 꽤 당황스런 표정의 우지호가 날 쳐다본다. 짧게 왜 라고 대답하자 머쓱한 듯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킨다. 뭐지, 앞에 강아지라도 있는 건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녀석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정말이지, 텅 빈 거리뿐이다. 물론 상가나 버스정류장, 도로 같은 건 있지만 사람도 불빛도 없는 어둠만이 가득한 거리일 뿐이었다.
"뭐야, 아무것도 없네."
"그게 아니라,"
"뭔데."
"우리 동네 지나는데."
"뭐?"
"여기, 지나가면 우리 동네 끝난다구."
녀석의 말에 버스정류장 위치를 살펴보자 뜨헉,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곧이어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보자 시간은 어느새 새벽 3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 버린 거지, 월요일에는 죽어도 안가 더만. 애꿎은 핸드폰 액정을 보고 속으로 쌍욕을 해댔지만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늘은 일요일이 아니던가. 순간 바쁘게 걷던 걸음을 멈추고 뒤에서 따라오던 우지호 쪽으로 돌아봤다. 갑자기 서 버린 나로 인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것마자 귀여워보여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차피 지금은 일요일이니까."
"으, 응?"
"조금만 더 같이 있자."
오늘은 하늘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 틀림없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게 해주니 말이다. 혼자 있을 때마저 하지 못했던 것을 직접 말한다는 게 이리 행복한 것이었을까, 새삼 느꼈다. 본디 말도 고민도 없는 순탄한 삶을 살아와서 그런지 딱히 대화라는 것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다는 것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다. 그러다보니 먼저 다가오는 사람들에게도 쌀쌀맞게 굴어 무안하게 만들기 일쑤였고 왜 항상 귀찮은 녀석들이 철썩철썩 들러붙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우지호 하나면 만사 오케이. 심지어 다가가기도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았던가? 늘 그렇다. 깊은 주제로 가지고 생각을 하면 얼마가지 않아 주제는 '우지호'로 변해있었다. 내 성격과 가치관마저 변화시킨 넌 나에게 도대체 무엇일까, 왜 나를 변화시킨 건지, 이따위 고민은 필요 없다 여기던 나를 왜이리도 바꾸어버렸는지 묻고 싶다.
"지훈아."
"..."
"표지훈."
"...어."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마음대로."
"오늘, 왜 나랑 민아를 피하려고 한거야?"
"질문이 뭐 그따ㄱ..."
"혹시, 내가 싫어?"
쿵, 순간 머리에서 무언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와 같은 이유모를 설렘을 느끼고 귀찮지만 행복한 고민을 하며 서로의 생각을 하는 그런 것을 바랬는데, 우지호는 그게 아니었다. 녀석은 '싫어하구나, 저 아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아.'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우지호는 내가 아니다. 그러니 본심을 알 수 없고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가 진짜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나도 녀석을 모르니까 늘 고민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녀석은 상냥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난 우지호에게 행복한 고민을 주지 않으려 발버둥친 것이다. 본심이 아니었어도 녀석은 표지훈이 아니니까, 진심을 알 턱이 없다. 변명조차 치사하게 들릴 것이 뻔 한데 여기서 무언가 더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는 우지호만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꿋꿋이 나를 쳐다보는 우지호의 시선을 회피했다. 잘한 걸까, 왜이리 기분이 찝찝한지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 둘은 침묵만을 일관한 채 한참을 걸었다.
"나 갈게."
"..."
우지호의 집 앞이다. 쓸쓸한 목소리지만 애써 밝게 웃어 보이는 우지호가 안쓰러워보였다. 등을 돌리고 축 쳐진 어깨로 불 꺼진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너무 작아보였다. 나로 인해 받는 상처로 슬픈 녀석을 내가 감싸주고 다시는 상처받지 않게 지켜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봤자 난, 또 다시 우지호에게 기분 나쁜 것들만 심어주고 그 끝은 상처받는 녀석일 테니. 측은한 눈빛으로 녀석의 집 현관을 쓱 훑어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이걸로 끝인가, 조용한 새벽길에는 이제 혼자 남은 쓸쓸한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혼자만 있을 때는 너무 크다고 느꼈었는데 둘이 있다 혼자 걸으니 발걸음 소리가 어린아이 마냥 작다. 마치 투덜대는 것처럼 질질 끌리는 신발 밑바닥이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린다.
내일은 학교에 가겠지. 그 지루하고 똥통 같은 구렁텅이 속으로 말이다. 눈앞에서 상처받은 우지호의 표정과 방과 후 교실 안에서만 보았던 상냥한 미소가 겹쳐졌다. 학교에 가면 넌 다시 웃어줄까, 괜히 애써 밝은 척하며 속으로는 울고 있지는 않을까. 학교 생각에서 또 다시 주제가 우지호로 넘어가버렸다. 걱정된다. 지금 내가, 나로 인해 상처받은 녀석이 미치도록 걱정된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우지호, 망할...!"
짧은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곧바로 방향을 돌려 녀석의 집 쪽으로 달렸다. 여름을 혐오하는 싫어하는 내가 땀까지 흘리며 달리는 이유, 사람들과의 관계를 귀찮다는 듯 내팽겨쳐둔 내가 상대방을 걱정하는 이유, 고민은 하지도 않았던 내가 행동과 말 그리고 머릿속까지 생각으로 가득차버린 이유. 나 자신이 왜 변했는지 알 것 같다. 아니, 안다. 왜 녀석을 생각하면 수긍이 의문으로 남아야만 했는지. 왜냐하면 난 녀석을, 우지호를 좋아하니까.
-
"하아... 하..."
녀석의 집 앞이다. 헐떡거리는 숨을 고르고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단축번호 4번 남들은 저주의 숫자이니 뭐래니 하면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숫자. 그런 숫자를 꾹 누르자 액정에는 '우지호'라는 이름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렸다. 뚜르르 하는 연결음이 너무 초조하게 들려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들려오지 않는 우지호의 목소리에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건너편에서 낯익은 소리가 내 귀에 울렸다.
"...여보세요."
"...하..."
"지훈아."
"..."
"할 말 없으면 끊을게."
"나와"
"어, 어?"
"집 앞으로 나오라고"
달칵 ― 전화가 끊기는 소리와 함께 잠시 후 얇은 가디건 하나만 걸친 우지호가 나왔다. 자다 나온 건지 아니면 울고 있었던 건지 눈이 살짝 충혈되있었다.
"집에 안 갔어?"
"어."
"... 지금 많이 늦었잖아, 어서 들어가."
말을 끝내고 또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녀석은 내 어깨를 두 손으로 툭툭 치고는 '조심히 들어가'라 하며 등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내 손은 무의식적으로 우지호의 손목을 낚아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장면, 볼 때는 오글거리고 뻔 하다고 느꼈지만 지금 그건 중요하게 의식되지 않았다. 얼떨결에 눈이 마주친 나와 우지호는 약간의 침묵을 유지하다 그것을 먼저 깬 건 우지호였다.
"지훈아."
가만히 생각해보면 네가 날 부르는 호칭은 '지훈아' 하나였다. 녀석이 날 불러줄 때면 설렘에 휩쓸려 기분이 마냥 좋았다. 물론, 지금도 녀석의 목소리를 달달했다. 다만 약간의 씁쓸함이 새어나와 슬프게 들린다는 것이 마음에 쓰였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대체."
"...그게."
"나 착각하게 하지 말아줘."
"...우지호."
"너무 힘들어, 지훈아."
미안함, 이것이 이렇게 가슴쓰린 감정이었을까. 파르르 떨고 있는 우지호의 어깨가 한없이 작고 여리게 보였다. 안아주고 싶다, 감싸주고 싶다. 생각은 곧 행동으로 옮겨졌고 녀석은 내 품 안에 들어왔다. 처음 느꼈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너무 말랐다. 세게 껴안으면 으스러질 듯 잡히는 뼈. 무슨 갈대마냥 우지호는 힘이 없었다. 이토록 여린 아이에게 난 무슨 상처를 준 것일까, 미안해, 미안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이 너무 답답했다. 난 늘 우지호에게 진심이었다. 말투나 행동은 차가웠겠지만 마음만은 늘 진심이었고 표현하려 애썼었다. 나에게 행복을 주는 너에게도 행복을 주고 싶다. 나만 보면 방긋 웃어주는 너만큼은 아니어도 적어도 지금의 상처만은 감싸주고 시다.
"지훈아, 난..."
"...가만히 있어."
"표지훈, 이제 그만 좀...!"
"좋아해."
"ㅁ,뭐, 어?"
"우지호, 지호야."
좋아해, 사랑은 모르겠지만 정말 많이 좋아해. 지금까지의 고민이 눈녹 듯 사라지는 느낌. 이제는 나 자신 내면의 감정이 녀석에게 닿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껴안고 있던 우지호를 풀어주고 녀석의 얼굴을 보자 녀석은 애써 눈물을 참으며 싱긋, 하고 특유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런 모습마저 귀엽다, 미치도록. 녀석의 미소와는 다른 어색한 웃음이지만 너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행복해. 나 또한 씨익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나와 지호의 거리는 서서히 가까워졌다.
그날 여름은, 잊지 못할 추억이라고 아직까지 생각한다.
+++
너무 늦게 왔져ㅠㅠㅠㅠ 죄송합니다 이래저래 사정이 많았어요 다들 추석은 잘 보내셨나요? ㅎㅎ
아 진짜 오랜만에 컴퓨처를 만져서 어색할 정도네여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원래는 이것도 두편으로 나누어져있었는데 그다음편도 언제 될지모를것같아서 그냥 합쳐서 올립니다ㅠㅠㅠ
그럼 빠이여하투하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