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거.”
“저…도련님. 이제 그만 가 보셔야 합니다.”
“시끄러워. 이거 내 사이즈 있는지 좀 봐줘요.”
얼굴의 반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선글라스를 쓴 경수가 팔짱을 낀 채로 옆에 있던 직원에게 말하며 매장 안을 빙 둘렀다. 그런 경수의 옆에 선 세훈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벌써 몇 시간 째 사지도 않을 옷을 몇 십 벌씩이나 입어보며 시간을 끌고 있는 경수였다. 역시나 제 도련님은 보통이 아니다. 이미 백현이 자신을 찾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백현에게서 당장 도경수를 데려오라는 지시를 받은 지 30분이나 지났다. 지금 데려간다고 해도 백현에게 된통 깨질게 분명하다. 자신의 암담한 미래를 생각하던 세훈이 눈을 질끈 감고 경수의 허리를 자신의 팔로 감싸 안았다. 도련님, 정말 죄송합니다. 그대로 세훈은 경수를 어깨에 들쳐 업고 매장을 빠져나와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미쳤어? 이거 안 놔? 이 미친 새끼야!”
“어쩔 수 없어요! 백현 도련님께서 당장 데려오라고 하시는데 어떡해요!”
“고작 변백현 때문에 날 이딴 식으로 대해? 너 진짜 죽고 싶어?”
경수가 몸부림치며 세훈의 등을 사정없이 주먹으로 내려쳤다. 세훈은 보통 힘이 아닌 경수의 주먹에 눈물이 찔끔 날뻔했다. 하지만 나중에 백현에게 깨질 것을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세훈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경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10분가량 경수의 주먹질에도 굴하지 않고 힘차게 달려 백현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 세훈이 경수를 내려놓고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아. 죽겠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세훈은 갑자기 등이 욱신거리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정신없이 뛰어왔긴 했지만 오지게도 때렸나 보다. 등짝이 남아나질 않겠네. 경수 모르게 한숨을 쉰 세훈이 힘겹게 일어나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백현의 오피스텔 현관 문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경수의 뒤에 섰다. 도련님. 문을 여셔야죠. 뒤에서 경수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바짝 밀착시킨 세훈이 경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경수가 멈칫하며 뒷걸음질 치자 경수의 허리를 자신의 팔로 단단히 감싸 안은 세훈이 경수의 손을 쥐고 천천히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경수의 몸에서 자신의 몸을 떼어낸 세훈이 경수를 집 안으로 밀어 넣으며 경수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울지 말기.”
“……”
“백현 도련님만 만나고 오면 매번 울잖아요.”
“……”
“퉁퉁 부은 도련님 얼굴 보기 싫어.”
갈게요. 경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세훈이 현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세훈을 등 진 채로 가만히 세훈의 말을 듣고 있던 경수가 눈을 감았다. 울게 되는데 어떡해 그럼.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쥔 경수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재킷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경수가 성큼성큼 백현의 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굳게 닫힌 방 문 앞에서 선뜻 들어가지는 못 하고 가만히 섰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자신을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얼떨결에 백현의 방 안에 들어오게 된 경수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언제까지 방 앞에서 제사 지내고 있을래?”
“……”
“귀엽긴.”
경수의 턱 끝을 검지로 가볍게 툭 친 백현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경수는 백현의 웃음소리에 미간을 구기며 백현의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과 속옷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콘돔들. 그리고 쓰레기통에 처박힌 향수들과 립스틱은 백현과 함께 밤을 보낸 여자들의 것이 분명했다. 매번 보기 싫은 것들로 가득 찬 이곳에 자신을 부르는 백현이 원망스럽다. 태연하게 다리를 꼬고 침대에 걸터앉아 찢어진 콘돔들을 보며 휘파람을 불러대는 저 녀석이 너무나도 밉다. 눈물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어 경수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두고 약올리는 백현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오늘은 꽤 빨리 집에 가겠구나. 손바닥으로 눈 주위를 꾹꾹 누른 경수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백현은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맨 등을 드러낸 채로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경수가 바닥에 널브러진 속옷들을 발로 치워내며 백현에게로 다가갔다. 백현아.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경수가 백현의 이름을 불렀다. 백현은 잠시 뒤척이더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경수를 바라보는 백현의 눈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경수는 눈물이 나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으며 손등이 새하얘지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 말없이 입술만 달싹이며 머뭇거리는 경수를 바라보던 백현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빠른 속도로 몸을 일으켜 경수의 목덜미를 감싸 안아 그대로 입을 맞췄다.
혀가 섞이고, 백현의 고개가 이리저리 꺾였다. 경수의 허리를 감싸 안은 백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한참 동안 딱딱하게 굳은 경수의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던 백현이 불현듯 경수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어냈다. 그리곤 경수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자고 갈래?”
“……”
넌 어째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들로 날 비참하게 만드는 걸까. 그런데도 거부할 수가 없다. 경수의 고개가 힘없이 끄덕여졌다. 백현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경수를 껴안고 그대로 침대 위로 엎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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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십보이들의 사랑 이야기 조각.
은근슬쩍 경수한테 마음이 가는 세훈이ㅎㅅ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