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잠시간의 정적 후의 첫 마디는 퍽 추상적이었다.
잔영殘影
作/S
사람이 바빠지다 보면 목적도, 동기도 잊은 채 그 행위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 후에 남는 것은 대부분 회의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년은 그 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계속 똑같은 것을 반복하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에게 지쳐있었다. 그래서 소년은 결심했다. 집을 나오기로.
「사람이 죽으면 바다로 가지.」
남자는 말했다. 그는 짙은 흑빛 눈동자와 대조되는 머리칼을 지녔다. 작은 바람에도 쉬이 흩날리는 머리칼은 얇고 여렸다. 남자의 심성과는 달랐다.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선택해서는 안 되겠구나. 소년은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무얼 생각하고 있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눈동자만 돌려 소년을 쳐다본다. 생각했던 것 보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당신과 함께 있으면 아무런 생각도 안 나요.
거짓말, 넌 참 맹랑하구나.
장난스럽게 덧붙이며 창밖으로 팔을 늘어뜨린다.
꼬마가 이젠 거짓말까지 하네…….
소년은 입꼬리를 조금 올려 웃었다. 이제 소년은 남자의 뜬금없는 농담도 웃어 넘길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조금 자란 모양이다. 남자는 그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붉은기가 도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은 손가락에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 어릴 적 키웠던 강아지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하는 대신 작게 미소지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유하게 휘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으나, 소년은 근 한시간 동안 그것을 두 번이나 보았다.
「그러면, 바다로 가면, 그 다음은 어디로 가지.」
소년은 남자를 보던 고개를 돌려 다시금 창 밖으로 고정했다. 남자는 소년을 쓰다듬던 손을 떼어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그 속에서 무언갈 움켜쥐었다. 아마 사탕이나 담배 같은, 그런 것 따위일테다. 그리고 남자는 담배를 꺼냈다. 희고 기다란 막대는 끝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남자의 곧고 길게 뻗은, 창백한 손가락과 퍽 잘 어울리는 모양새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담배, 몸에 나빠요.
으응, 그렇지.
곧장 창 밖으로 추락하는 꽁초에 소년은 아쉬움을 느꼈다. 손가락 뿐만 아니라 남자 자체와도 담배는 잘 어울렸다.
집은 언제 들어가니? 그는 지나가듯 흘렸다.
「바다로 가면, 다음은 어디로 가지.」
못들은 척, 했던 말을 반복하며 시선을 피했다. 남자는 깊은 눈동자에 소년을 그득히 담고는, 묘하게 읊조렸다.
「그 다음엔 누군가의 마음으로 가지.」
그 답지 않은 감성적인 말이었다. 소년은 고개를 조금 들어 곁눈질로 그를 보았으나, 그뿐이었다.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선선히 불던 바람마저 멈추니, 그들 사이엔 오직 적막뿐이었다. 적막을 틈타 여러가지 생각들이 소년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지만, 소년은 딱히 그 중 하나를 말하려 하지 않았다. 전부터 남자와의 침묵은 많았다. 소년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따위 들지 않았다. 무언가와 익숙해졌다는 것, 그것은 참 무서운 것이었다.
남자가 몸을 틀어 방으로 향했다. 발바닥이 맨바닥과 붙는 소리를 내며 걸어감에도 시끄럽지 않았다.
시간이 늦었어. 조금만 있다 들어와.
그의 뒷모습이 말라 있었다. 안쓰럽진 않았다. 남자는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소년은 남자를 뒤따라가며 물었다.
「그 다음엔, 어디로 가지.」
묻는다기보단 혼잣말같은 어조였다. 그러자 남자는 뒤를 흘낏 보더니,
「그 다음에는 눈으로 가지. 눈에, 평생 묻히는 거야.」
그리곤 훌쩍 가버린다. 소년도 재빨리 좆으며 물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묻는 어조였다.
당신 눈에도 누군가가 묻혀 있나요?
아니……. 아마도.
그러면 어떻게 알아요?
글쎄, 누가 그러더라. 눈에 묻혀서 그가 보인다고.
눈에 평생 누군가가 묻히면, 그가 평생 보이면, 그러면 앞은 어떻게 봐요. 소년은 물었다.
하지만 남자의 대답은 없었다. 아마 그는 잠든 듯 했다.
…그것이 일년 전의 일이었다.
소년은 아직도 이따금씩 남자를 생각했다. 남자는 참 곧았다. 얄쌍한 팔목이나 마른 몸 따위는 흠이 되지 못하도록, 갈 곳 없이 방황하던 소년을 잡아줄 수 있을 만큼 강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한편으로 퍽 다정한 사람이었다. 정말 가끔씩만 볼 수 있었던 웃음도, 창 밖으로 떨어뜨리던 담배도. 소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그와 나누었던 대화는 잊혀지지 않았다. 그것은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웠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혹은 다른 무엇일지, 바람 부는 날이면 어쩐지 그립기도 하였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그를 생각한다.
사람은 죽었을 때 눈에 묻히는데, 왜 당신은 지금 내 눈 앞에 있나요.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아서, 나는 오늘도 당신만을 봅니다.
「그 다음에는 눈으로 가지. 눈에, 평생 묻히는 거야.」
*
어디까지나 허구적인 글이지만,
글 보면서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