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마루에는 벌레가 산다. 낡은 나무 집을 파고든 벌레는 알을 낳고 번식을 해서 집을 갉아먹는다. 작고 작은 벌레는 나무를 먹는다. 그리고 너는 나를 먹는다.
습기찬 집의 곰팡이처럼 날 좀먹는다. 예쁘지 않게. 마치 화선지 위에 먹을 떨어뜨린것 마냥 번져가는 곰팡이. 그리고 넌 이런 날 모르겠지.
벽지에 번져가는 곰팡이.
나무를 먹는 작은 벌레.
내마음을 좀먹는 너.
Rendezvous
서늘한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희망을 잃었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어미의 행방이 납골당이라는곳이였기 때문이었다. 잔인한 세상은 그녀를 버린듯 했다. 덕분에 너의 왼쪽 눈 밑에 있는 작은 눈물점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래 그래, 그래도 묘지는 찾았잖아. 너의 갈색 머리를 끌어안고서 몇번이나 되풀이했던 말이다. 그럴때면 넌 내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면 내눈에는 너의 목에 있는 점이 보였고, 난 너를 조금 떼어내며 점 위에 키스를 했다. 그럼 넌 기분이 조금 괜찮아 졌다며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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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언제나 처럼 넌 새하얀 집에서 날 기다렸고 난 널 찾아갔으니까.
그 누구도 우리의 만남을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순백의 곳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물이 빠져 얼룩덜룩한 너의 갈색 머리칼을 내 손으로 쓸어올리고, 가습기의 작은 소음위로 너와 나의 살이 마주닿는 소리가 섞였다. 작게 내뱉는 너의 숨결이 내 가슴 위로 쏟아지면 나는 잔뜩 구겼던 미간을 펴며 손을 뻗어 너의 목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몸은 시간이 갈수록 생기를 잃어갔지만 나는 이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두 눈을 꼭 감고 죽음에 가까워진 너의 몸을 모른척 외면했다. 그리고 너는 그런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위로 몸을 쓰러뜨리며 내 귓가에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소독향의 사랑. 너의 기억. 가습기의 소음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며 나와 너는 잠에 빠져들었다. 이럴때면 나는 꿈을 꾼다. 한없이 하얀 방안을 걸어가는 꿈을. 끝이 보이지 않는 꿈은 너와 나의 미래 같기도 했다.
넌 내가 만난 누구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다. 이때까지 사귄 남자들 중 가장 순수했고,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잘 표현하던 사람이었으며,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했다. 너의 끈질긴 구애 끝에 너와 난 사귀게 되었고 그 인연은 지금의 시간까지 왔다.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넌 총망받던 유명 발레리노의 길을 잃어야 했고, 난 혈육과의 인연을 끊어야했다. 행복하지만 꽤나 지독한 시간이였다.
넌 이제 죽은 어미를 그리워하는 스무살이 아니였고 나 또한 순수하기 그지없는 너를 이용하던 스물 한살이 아니였다.
30의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 우리 둘에겐 서로만이 남았고, 둘의 사이를 옭아맨 굵은 매듭은 믿음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묶었다. 집착같은 사랑은 습관이되었고 끊지도, 놓칠수도 없는 끈은 너와 나의 목에 올가미를 만들었다. 아니, 이건 나의 변명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너를 보고서 갈팡질팡하는 나의 변명. 아직 너는 사람의 평균수명을 80으로 잡았을때, 그 것의 반도 살지 못했다. 잠이 든 너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네가 좋아했던 내 손은 이제 거칠게 부르트고 늙어서 도드라진 뼈와 징그럽게 튀어나온 혈관이 손등에 붙어있었다.
낡은 몸은 나체로 하룻밤을 넘기는것도 이젠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감기에 걸린것 처럼 으슬으슬 몸이 떨리는 나의 몸을 너는 잠결에 나를 껴안았다. 따뜻한 너의 체온에 몸은 녹았다. 너는 아마도 깨어있으면서도 잠든척 하고있는게 아닐까. 올려다 보면 보이는 너의 얼굴은 나와 너의 찬란했던 시간의 모습과는 달리 많이 수척해지고 늙었다. 조금씩 길이 생기기시작한 주름은 너의 입꼬리에서, 눈가에서 자신의 모습을 들어냈고, 새하얗게 색이 바랜 머리칼도 삐죽삐죽 너의 머리칼 사이에 솟아났다. 나이를 먹어가고 청춘은 지났지만 사랑은 식지 않는다. 그렇다고 관계를 맺지 않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우린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아끼고. 무엇보다 원하고 있으니까. 나이를 먹는다는것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다.
"병희야."
"… …."
"나 안죽어."
사람은 모두다 죽어.
나의 말에 너는 눈을 감은채 슬쩍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래, 그렇지.
가습기에서 흘러나온 하얀 기체는 너의 머리칼을 스쳐 지났다. 나는 손을 들어올려 너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하지만 넌 아직 죽기엔 일러, 창선아. 얼굴을 더듬는 내 손길에 감았던 눈을 뜨는 넌 눈동자 가득 나를 담았다. 수척해진 너의 눈가를 손으로 쓸어보다 너의 입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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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께."
"응, 또 와."
"그래."
"매일 오는 시간에 올꺼지?"
"… …."
아마, 시간은 얼마남지 않았을것이다. 네가 나를 떠날 시간은. 그 시간은 도망칠수도 없고 잊을수도 없게 존재를 알리며 초침보다 빠르게 다가오고있었다. 그리고 너는 이런 시간을 숨기기 위해 내가 오는 시간을 확인한다. 넌 내게 자신이 치료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것같았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듯 헐떡거리며 주사를 맞고, 병의 아픔에 괴성을 지르고. 미처 참을새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거겠지. 내가 너의 상태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호전되지 못하고 악화되는것을 눈치채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직접 간호사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나는 매일 너와 살을 섞고 너의 숨결을 맡으며 너의 온몸을 내 눈안에 담으니까. 나이를 먹음에 시력이 감퇴되어도 나는 너의 몸을 알고있다. 그런 너의 몸 변화를 알지못할 이유가 없어.
병원을 빠져나와 신발을 고쳐신는척하며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네 시간이 조금씩 사라져간다. 남은 너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이.
어제 너와 나체로 잠든것 때문인지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던 탓인지 가늠해보았다. 결론은 오늘 너를 보러 병원에 들리는것이 힘들지도 모르겠다였지만.
이마위에 손을 올려 열을 재보려했지만 감기로 인해서 온몸이 뜨거워져있는 탓에 열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손이 더 뜨거운것 같은 느낌에 나는 이마위에 올렸던 손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감기에 걸려도 약한 목감기에서 그치던것이 요 몇년 사이에는 독하게 앓게 되어서 이 감기가 너에게 옮을까 걱정이 앞섰다. 너의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역시 오늘은 안되려나…. 하는 생각에 무거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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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다고 하면 길었고, 짧다고 하면 짧았을 인연의 끈이 매듭을 끊으려고 했다. 아직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눌러가며 달려간 너의 병실에는 미처지우지 못한 너의 흔적이 이곳저곳 붉게 자라나고있었다. 매듭은 너의 생각과는 달리 굵고 단단해서 너를 마음대로 할수있게 만들지는 못했다. 진정제를 먹었는지 수면제를 먹었는지 모를 너는 붉게 물든 거즈를 온 손목에 휘어감고서 눈을 감고있었다. 혹시 죽은건 아닐까. 가만히 너를 내려다 보던 몸을 움직여 가슴위로 귀를 데어보았다.
"… … 나 안죽었어."
"…알아."
"그런데 그게 무슨짓이야. 기분 이상해지게."
"넌 무슨짓인데."
"… …."
넌 언제나 귀신같이 내가 오는걸 알아챘다. 언젠가 너에게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을때 너는 웃으며 대답했었다. 네 향기가 나. 근데 지금 이 장소에서는 쇠 냄새밖에 나지 않는데 넌 나를 어떻게 알아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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