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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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말.2]
한 바탕 소동 아닌 소동이 일어났지만 역시나, 그 소동은 성규에게만 해당 할 뿐, 전과 다르지 않은 우현이 성규의 옆에 앉아 가만히 필기를 옮겨 내리는 성규의 손을 쳐다봤다. 예쁘다, 손. 우현의 말에 성규가 조용히 고개만 돌려 째려봤지만 여전히 성규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우현에겐 성규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일 리가 없었다. 결국, 한숨을 쉬고 다시 필기를 써 내려가던 성규가 텅텅 빈 독서실을 둘러보더니 손에 든 연필을 내려놓고 책을 덮었다.
“벌써 가게?”
“응”
가방을 챙기는 자신을 따라 가방을 챙기는 우현의 얼굴이 밝아지자 성규가 우현 모르게 살짝 웃으며 우현보다 먼저 독서실을 빠져나왔다. 더 해도 되는데. 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내뱉는 우현의 모습을 성규가 살짝 흘겨보고는 먼저 걸어가려는 우현의 가방을 잡아끌었다. 배고프잖아. 아까 혼잣말로 작게 배고프다 말하는 우현의 목소리를 들은 성규가 내내 신경 쓰여 집중을 하지 못했다는 걸 알리가 없는 우현은 어떻게 알았냐며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성규를 바라봤지만 대답할리 없는 성규는 그런 우현을 무시한 채 먼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걸 어떻게 먹게”
“여기서 안 먹으면 되지, 계산 해 주세요.”
직원에게 만원을 건넨 우현이 잔돈과 함께 라면 두 봉지가 담긴 봉투를 받아들었다. 가자, 내가 끓여줄게. 우현의 말에 지금 시간이 몇 신줄 아냐며 성규가 잔소리를 늘어놨지만 우현은 듣기 싫다는 듯 성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잔소리를 하는 성규를 끌고 자신의 집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집에 아무도 없어. 들어와”
“아무도 안 계셔?”
“시골 갔어.”
“시골을 왜?”
“할머니가 좀 아픈가봐. 나도 잘 몰라”
가방을 벗어 대충 바닥에 집어 던지고 냄비에 물을 받는 우현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성규가 성큼성큼 걸어가 우현의 뒤에 섰고 우현은 그런 성규의 기척이 느껴졌는지 냄비에 물을 받으며 뒤를 돈 순간, 성규가 손을 높게 들어 올리더니 망설임 없이 우현의 등짝에 자신의 손바닥을 맞췄다. 퍽- 주먹도 아닌 분명 손바닥으로 쳤는데 짝이 아닌 퍽 소리에 우현이 내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거 같은 기괴한 경험과 함께 등짝을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김성규......진짜, 왜 때리는데!?”
“너는 임마, 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데 태평하게 라면이나 끓여 먹고 있냐?”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적어도 손자가 된 도리로서 그런 말을 할 때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비추라는 거야. 이 머리도 개 같은 개새끼야”
여전히 아픈지 등을 부여잡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우현의 모습에 성규가 대충 발로 밀어버리더니 우현이 놓친 냄비를 들어 아무렇지 않게 물을 받았다. 굳이 때릴 거 까진 없었지만 그간 쌓였던 불만 아닌 불만을 이렇게나마 터트려 버린 거에 대해서 성규는 내심 뿌듯한 마음에 미소를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우현의 등에 손자국이라도 날까 걱정 돼 바닥을 기는 우현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왜 안 먹어?”
“너 때문에 내장 튀어 나올 뻔 했는데 이게 들어가겠냐?”
“한대 더 맞기 싫으면 입 닫고 먹지?”
뚱하게 그저 젓가락을 들고 이미 불어버린 라면을 맛없게 휘젓는 우현의 모습에 아무렇지 않게 라면을 먹는 성규의 신경이 온통 우현에게 쏠려버렸다. 신경 쓰이게 정말. 아까부터 배가 고프다고 중얼거리던 우현이 라면을 먹지 않자 성규가 지금 자신의 입에 들어가는 게 라면인지 당면인지도 모르는 채 계속 우현을 신경 썼고 결국엔 못 참겠는지 손에 든 젓가락을 놓고 고개를 들어 뚱한 우현을 바라봤다.
“미안해, 그니까 빨리 먹어”
“뭐가”
“아까 맞은 거 때문에 너 삐져서 안 먹는 거잖아”
“애냐? 그걸로 삐지게”
“그럼 배고프다면서 왜 안 먹는데”
얼핏 들어도 성규의 말엔 우현을 향한 걱정이 뚝뚝 묻어 떨어졌지만 그걸 알 리가 없는 우현은 앞에 앉아 자신을 걱정하는 성규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아예 손에 든 젓가락을 놓아버렸다. 가만히 라면을 쳐다보는 우현을 보는 성규가 온통 자신이 아까 너무 심했나 하는 마음에 안절부절 못했지만 막상 우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런 성규의 걱정을 다 날려주었다.
“할머니가 끓여준 곰탕 먹고 싶어.”
“곰탕?”
“니 말 들으니까 갑자기 할머니 보고 싶다.”
개구지게 웃는 우현의 모습을 보던 성규가 우현이 얼마나 할머니를 걱정했는지가 느껴져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애한테 개새끼라니 그런 말을 한 몇 분전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던 성규가 자신과 우현의 앞에 놓인 그릇을 들고 일어섰다. 안 먹을 거면 치운다. 짧은 우현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다 불어터진 라면을 부어버린 성규가 빠르게 설거지를 마치더니 식탁에 누워 자신을 보고 있는 우현에게 대충 손을 흔들며 가방을 집어 들었다.
“나 일이 있어서 먼저 간다.”
잘가라는 우현의 인사를 뒤로한 채 서둘러 집을 나온 성규 도착한 곳은 동네에 있는 24시간 마트였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성규가 빨간 불빛을 보더니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달려가 소리쳤다. 곰 주세요!!. 너무나 당당한 성규의 말에 하마터면 진짜 곰을 찾아 내어주려던 정육점 아저씨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무슨 곰을 말하는 거냐고 물었고 성규는 그 말에 우현의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곰탕 할 거예요. 할머니가 해준 곰탕 맛으로 나는 그 곰으로 주세요.”
자신의 말에 허허 웃는 아저씨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던 성규가 집에 와서 교복도 벗지 않은 채 인터넷에 곰탕 만드는 방법을 검색하고 나서야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병신같이 곰을 달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바보 같은 말이 아저씨가 듣기에는 얼마나 바보 같았을까 하는 생각에 한숨을 내쉰 성규가 만드는 방법을 보고는 이럴 시간이 없다며 교복 소매를 돌돌 말아 올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섯 시간동안 핏물을 제거해야 된다는 말에 정확히 여섯 시간을 핏물이 제거될 때까지만 기다린 성규는 새벽 네 시가 돼서야 냄비에 핏물이 제거된 사골들을 넣어 푹 삶으며 타이머를 맞췄다. 적어도 네 시간은 우려내야 한다던 말에 감기는 눈을 비비며 커다란 냄비 아래에 깔려 은은하게 불을 내뿜고 있는 가스렌지를 바라보았다.
“맛있어야 할 텐데”
잔뜩 잠에 취한 목소리로 우현을 걱정하던 성규가 결국 감기는 눈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잠에 빠져버렸다.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엄마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난 성규가 일어나자마자 팔팔 끓고 있는 냄비 뚜껑을 열어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절대 끄면 안 된다고 엄마에게 당부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서둘러 씻고 나오자 잘 우려진 곰탕 맛을 보던 엄마는 니가 무슨 곰탕을 했냐며 의아하게 물어오는 말에 엄마 곰탕 좋아하잖아. 하는 입에 발린 말로 엄마를 감동시켰다.
생각보다 너무 손이 많이 가는 곰탕 때문에 결국 지각을 했지만 그래도 아침부터 엄마에게 받은 두둑한 용돈과 손에 든 곰탕의 온기 그리고 솔솔 풍기는 향기까지 모두 성규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어서 빨리 우현에게 전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성규가 우현의 반으로 향했지만 곧, 지금 가봤자 애들한테 뺏길게 뻔해 아쉽지만 점심시간을 기약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도대체 점심시간에 밥도 안 먹고 해야 하는 중요한 얘기가 뭔데”
굶주린 배를 붙잡고 짜증을 내는 우현의 모습에 성규가 텅 빈 교실 안을 다시 두리번거리더니 품속에 숨겨두었던 보온병을 우현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게 뭐야?. 보온병을 이리저리 흔들어보던 우현이 대답 없는 성규의 모습에 조금은 기대에 찬 얼굴로 보온병의 뚜껑을 열어 뚜껑 안으로 보온병을 기울였고 그와 함께 보온병 안에 들어있던 따끈한 곰탕이 뚜껑 안으로 주르륵 쏟아졌다.
“곰탕이네?”
“내가 어제 이거........”
“나 곰탕 안 좋아하는데”
“.....뭐? 너 어제 할머니가 해준 곰탕 먹고 싶다고”
“그건 할머니가 곰탕밖에 안 해주셔서 그런 거고, 나 할머니가 해 준 곰탕도 잘 안 먹어. 이게 도대체 무슨 맛.......너 뭐해?”
“가서 밥 먹어”
“그거 나 먹으라고 주는 거 아니야?”
“안 좋아한다며 그니까........그니까 넌 그냥 가서 밥 먹어”
터질 거 같은 울음을 꾹 참은 성규가 뚜껑 안에 가득 따라진 곰탕을 보더니 단번에 들이켜 버렸고 그런 성규의 모습에 경악한 우현이 성규의 팔을 저지했을 땐 이미 뜨거운 곰탕이 성규의 안으로 다 흘러들어 가 버렸다. 야 뜨겁다고.......김성규 울어?.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성규의 모습에 우현이 거보라며 뜨거운 걸 그렇게 먹으니 눈물이 안 나오고 베기냐며 한심하다는 듯 성규를 나무라더니 계속 우는 성규가 걱정 됐는지 혓바닥 좀 보자며 성규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봐봐, 많이 아파?”
병신 같다. 진짜 병신도, 병신도 이런 상병신이 없을 정도로 정말 병신 같았다. 뜨거운 혀보다 타들어 가는 식도보다 우현의 말 한마디에 무너진 가슴이 더 아팠다. 그러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을 다짐해도 우현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게 제 맘대로 되지 않은 거 같아 답답하고 짜증났다. 생각 같아서는 우현을 향해 내가 이걸 하려고 얼마나 고생 한 줄 아냐고 소리치고는 얼굴 위로 곰탕을 부어버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입을 억지로 벌려 더럽지도 않은지 혓바닥을 손으로 살짝 잡아 이리저리 살피는 우현의 얼굴에 성규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젯밤 식탁에서 잠들면서 꾸었던 꿈속에서 우현은 자신이 내민 곰탕에 감동을 했고 곰탕을 먹으며 자신의 할머니가 해준 곰탕과 똑같다며 성규를 칭찬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현은 자신이 어제 그토록 잠도 못자고 끓인 곰탕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싫다는 그 말 한마디로 모두 정리 해 버렸다.
“병신 같아”
“맞아, 너 병신이다. 그렇게 뜨거운 걸 한 번에 들이키는 놈이 병신이 아니면 뭐냐”
양호실을 가봐야겠다며 그 전에 반 친구 놈 중 얼음물을 싸고 다니는 애가 있는데 그 물이라도 마시고 가자는 우현을 바라보던 성규가 열심히 친구 놈의 가방을 뒤지는 우현의 뒷모습을 보고는 손에 든 보온병을 들고 그대로 교실을 빠져나왔다. 언제야 끝이 날까, 도대체 얼마나 더 남우현한테 상처 받아야 이 병신 같은 마음이 끝이 날까. 또 다시 흐르는 눈물을 성규가 소매로 거칠게 닦아 화장실로 들어서서는 망설임 없이 보온병에 든 곰탕을 더러운 변기 위로 쏟아버렸다. 다 쏟아낸 보온병을 쓰레기통에 던진 성규가 다시 찡해지는 코끝에 고개를 들었다.
“남우현도 제발 내 안에서 쏟아져 나갔으면 좋겠다. 제발...”
남우현(부들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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