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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 야, 저거 봐봐."

 "뭐."

 고기를 올려놓고 익기를 기다리는 사이 세훈이 뭘 본 건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옆자리의 종인을 툭툭 친다.

배고픔을 못 이기고 샐러드를 집어들던 종인은 세훈이 보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 티나게 보지말고! 저기, 백현씨 목에 저거 키스마크 아냐?"

 안 그래도 회식자리에 좀 늦은 경수가 한 쌍의 자석이라도 되는 건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럽게 백현 옆자리로 자리잡는 걸 보며 또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곁눈질로 슬쩍보니 경수와 무슨 말을 나누는지 서로 쳐다보느라 고개를 돌린 백현의 목에 붉은 자국 두 개가 보인다.


 "우와, 백현씨 애인 장난 아닌가 본데?"

 옆에서 감탄하고 있는 세훈의 말에 대꾸할 생각도 못하고 둘이 하는 양을 보고 있으니 곧 경수가 백현의 고개를 돌리고 그 자리 밴드를 붙여준 뒤 백현의 옷 매무새를 매만져 준다. 그 손길에 민망한 건지 백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보여 종인은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야 근데, 분위기가 어째..., 묘하다? 무대감독이랑 백현씨랑 혹시... 사귀냐?"

 물어보질 못했다.

경수씨, 백현씨랑 어떤 사이에요?


솔리스트 Soliste







 번호를 교환한 뒤로 한 달, 따로 만나는 일은 없어도 마주치면 반갑게 웃어오는 경수는 한국에 너무 오랜만에 들어와 연락할 사람이 없다며 종인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왔다. 

꼭 잠잘 무렵 걸려오는 전화로 경수는

어떤 날에는 사무실 사람들이 자기가 모르는 말을 쓰면서 농담을 한다며 신조어나 유행하는 드립들을 물어오기도 했고,

어떤 날은 창밖에 빗소리가 너무 듣기 좋다며 긴 시간, 대화도 없이 종인이 모르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도 했다.

또 어떤 날은 종인의 연습 모습을 봤다며 종인씨는 곡선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엉덩이 힙업이 섹시해, 푸흐. 하며 장난을 걸어오는 날도 있었다.


 경수는 항상 비슷한 시간에 전화를 걸어왔지만 또 매일 걸어오는 건 아니라서,

종인은 경수의 전화가 오는 시간이 되기 전에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 맡에 걸터 앉아 폰을 쥐고 차분히 창밖을 보며 기다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 전화가 올 시간을 훌쩍 넘기도록 연락이 없으면 종인은 침대에 누워 한참이고 경수를 생각했다.


 오늘은 왜 전화가 오지 않을까.

지금쯤 벌써 경수는 자고 있는 걸까.

경수에게 나와의 통화는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어떤 사이일까.



 - 왜 종인씨는 저한테 먼저 전화 안 걸어요?

 한 번은 전화가 걸려오자마자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경수가 다그치듯 물어온 일이 있다.

어딘가 날카롭게 느껴지는 말투에 덜컥, 마음이 내려앉는 걸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이사람도 내가 연락해 오기를 기다리는 건가, 싶어 조금 기분이 좋았다.


 '미안해요. 저... 걸어도 되는지 몰라서.'

 대답해놓고도 종인은 스스로가 참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게 어딨어요. 종인씨 참 바보 같다. 나한테도 전화 걸어줘요.

 잠깐의 침묵 뒤에 금새 기분이 풀린 건지 웃음기가 섞여나오는 경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종인은 마음 속으로 말했다.


 말해버릴 것 같아서요, 경수씨에게 내가 먼저 전화를 걸면. 아니 사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요. 

경수씨는 백현씨랑 무슨 사이에요? 그리고,

우린... 무슨 사이에요?


 EXO 전체 회식이 열린 연습실 근처 작은 고깃집.

서른 남짓한 사람들이 무용단원과 스탭으로 자연스럽게 나뉘어서 앉은 탓에 거의 반대편, 백현의 옆자리에 앉은 경수의 얼굴을 종인은 흘깃 또 훔쳐본다.

조금 민망해질 것 같긴 하지만, 이러다 한 번은 눈이 마주쳤으면 좋겠다. 도경수도

김종인을 보고 있는 건지 알고 싶다.








 민석은 곤란했고,

헷갈렸다.


 고기를 먹으러 신나서 달려온 회식자리.

먼저온 무용단원들이 자리를 잡은 모양을 보니 여전히 화해를 하지 않은 건지 세훈과 종대가 한참 떨어져 앉아 있었다.

정말 애들도 아니고, 뭐 때문에 한 달째 저러고 있는 건지.


 어디에 앉아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세훈이 옆에는 종인이가 앉아 있으니까, 하고 종대 앞자리에 앉는다.

조금 시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종대는 역시 활기찬 모습이 좋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을 때쯤 민석은 갑자기 오소소, 소름이 돋아오는 걸 느낀다.


 "밍석, 손이 차가워."

 하며,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오는 온기에 고개를 돌리니 헐,

한 달 동안 온 힘을 다해 피해다닌 루한이 바로 옆자리.

싱긋 웃어오는 루한에 어렵게 마주웃어주며 민석은 속으로 하나만 보고 둘은 보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한다.



 루한은 착하다.

잘생겼고, 잘은 모르지만 들리기로는 실력도 좋은 것 같다. 그런데,


 '밍석, 귀여워.'

 '밍석, 나랑 있어.'

 '밍석, 예뻐요.'

 연습실에 놀러가면 열 일 제쳐두고 달라붙어 오는 루한이 입만 열면 밍석을 찾아대는 통에 민석은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아, 중국에서 와서 친한 사람이 없구나, 라고 생각해서 민석도 잘해 주려고 그랬는데, 알고보니 루한은 레이와는 전부터 친한 사이인 듯했고 어쨌거나 말이 통하는 타오와도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뭐, 그래도 거기까진 좋았다. 어쨌거나 집 떠나 멀리까지 와서 사람이 고픈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밍석, 손이 작아 귀여워'

하며 자연스럽게 깍지를 껴 잡아오는 손과

 '밍석, 쏙 들어와, 좋아.'

하며 갑자기 백허그를 한 채 민석의 목에 고개를 묻고 부벼오는 간질거림에,

민석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중국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스킨십이 심하나?



 "아, 응..., 나 물 좀."

 핑계를 대고 루한의 손길을 피해 차가운 물을 마시면서도 민석은,

처음부터 루한이 식당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종대 앞자리를 아무도 앉지 못하게 비워두고 그 옆에 눈에 띄지 않게 입구를 등지고 앉아 기다렸다는 걸 모르는 민석은

왠지 오늘은 고기를 먹어도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슬픈 눈으로 익어가는 고기를 바라본다.








 '오전에 급한 미팅이 있어서 잠시 다녀올게. 

크리스한테 너 몸 안 좋아서 늦는다고 말해둘 테니까 그냥 여기서 쉬고 있어.

미안. 금방 올게. 같이 점심 먹자.

 찬열.'


 미쳤어. 내가 이걸 왜 들고 나왔지.

호텔 메모지에 급하게 적은 찬열의 메세지를 보고 백현은 잠시 자기반성과 자아성찰의 시간을 갖다가, 즉, 멍을 때리다가

문득 시계를 확인하고 황급히 준비해 방을 나왔다.


 사실은 전부다 기억이 난다.


 잠귀가 밝은 데에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속이 안 좋아서 사실은 일찍 정신이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알람이 울렸고, 일어나려 했지만 눈을 떠보니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놀란 와중에도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고 다시 잠든 척을 한 건 아마 타고난 판단력 덕분...

은 개뿔. 그런 탁월한 판단력이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


 '정말 괜찮아?'

 '아, 빨리 좀, 남자가 왜 이렇게 소심해.'

 '어쭈? 변백현. 나중에 기억 안 난다고 잡아 떼면,'

 '나 급해, 빨ㄹ 읍,'



 다시 떠오르는 지난 밤의 기억에 백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폰을 꺼내 든다.


- 기다리라니까, 출근했어?

오전 11:48

- 크리스한테 백현이 아파서 늦을 거라고 다 얘기해뒀는데

오전 11:49

- 나 진짜 미팅 끝나고 거의 날아서 왔는데

오전 11:49

- 너랑 같이 점심 먹으려고

오전 11:49

-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고

오전 11:50

- 왜 카톡 봐놓고 전화는 안 받아

오전 11:53

- 회사로 데리러 갈게, 점심 먹지 말고 기다려

오전 11:54

- 15분 걸려

오전 11:54

- 변백현

오전 12:15

- 어디갔어?

오후 12:15

- 변백현

오후 12:16

-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는데, 그냥 갈게

오후 12:16

- 그래도 기억은 다 나나 보네

오후 12:16

- 어제 술 많이 마시게 해서 미안해

오후 12:16

- 근데 미안한 건 그것 밖에 없어

오후 12:17

- 어제 그거 원나잇 아니야

오후 12:17

- 나 너 그렇게 가볍게 생각한 거 아니야

오후 12:17

- 시간이 필요하면 줄게, 우리 얼굴 보고 이야기 하자

오후 12:18

- 근데 많이는 못 줘. 밤 9시에 연락할게, 그 땐 받아라

오후 12:18

- 아무것도 후회 하지 마

오후 12:19

- 이따가 보자 백현아

오후 12:19



 "뭐 보고 있어?"

 탁.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백현은 깜짝 놀라 폰을 놓친다.

고개를 들어보니 식당 앞까지 다 와놓고 잠깐 어디 들렀다가 온다고 먼저 들어가라던 경수가 겉옷을 벗어 걸고 있다.


 "그냥 친구랑 한 카톡..."

 "......"

 "......"

 폰을 집어 넣는 백현을 탐탁치 않은 눈길로 쳐다보며 경수가 그 옆자리에 앉는다. 

회식이라 듣는 귀가 많다.

뭐 딱히 어째야 한다 약속을 했던 건 아니지만 하늘같은 스폰서님께서 또 호출하셨다며 외근 가서 바로 퇴근한다던 백현이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하고 아침에서야 회사에 모습을 나타냈을 땐, 또 그게 어제랑 같은 차림이었을 땐 사실 딱히 더 이야기 할 것도 없었다.


 "...고개 들어봐."

 "어?"

 "가만 있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바보같은 얼굴로 쳐다보는 백현의 턱을 들어 급하게 편의점에 가서 사온 밴드를 붉은 자국 위에 붙여주며 경수가 혀를 찬다.


 "아..."

 그제야 무슨 일인지 눈치 챈 백현이 순간 가슴이 철렁한다.

오늘 하루 감기에 걸렸다고 실내에서까지 머플러로 잘 가리고 있었는데, 바보같이 회식으로 고깃집에 들어오면서 목에 자국이 난 걸 까먹고 머플러를 풀어버렸다. 

서른 남짓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회식자리. 혹시 누가 봤을까?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백현이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억지로 당한 건 아니지?"

 "어? 어... 그건 아니고..."

 "그럼 됐어."

 경수의 말에 묘하게 감동을 받은 백현이 경수야_ 두 팔을 벌려 경수를 껴안으려고 달려들자,

경수는 정색을 하며 팔을 들어 저지한다. 꺼져. 뭐가 예쁘다고.









 "자, 드디어 사립 무용단 EXO의 세 번째 공연, '나비소녀'의 초연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앞으로 삼개월, 다들 힘내서 좋은 공연 만들어 봅시다! Cheers!"

 "Cheers!"

 "건배!"


 "여러분 이번 공연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죠? 대한민국 유일한 사립무용단 EXO에서 처음 만드는 창작 발레입니다. 작은 극단이니만큼, 이번 시도가 정말 중요할 수 있어요."

 대표인 크리스의 선창에 다들 취향에 맞게 소주든 맥주든 음료수든 기분 좋게 입을 축이고 본격적으로 고기를 집으려 하는데 눈치 없기로는 레전드 급인 준면이 입을 연다.

그래도 대표 다음가는 위치인 발레 마스터가 말하는데 무시하고 젓가락질을 할 수도 없고, 김이 샌 사람들이 젓가락을 내려 놓으면서도 노릇노릇 잘 익은 고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중요한 공연이니만큼! 또 우리가 사 개월 동안 준비를 열심히 해온 만큼! 꼭 관객들에게 최상의 공연을,"

 "마스터,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여러분, 오늘은 고기 먹고, 제가 2차로 한 잔씩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자리까지 마련을 할테니, 마스터의 금쪽같은 말씀은 거기서 듣는 걸로 합시다. 어떤가요?"

 한없이 길어질 조짐이 보이는 준면의 말을 적절히 끊은 크리스의 제안에 사람들의 진심을 담은 박수소리가 한차례 지나고서야 불판 위의 고기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작은 고깃집에서 한 회식은 준비된 고기가 동날 때까지 이어져 아홉 시 무렵 끝이 났다.

공연이 보름 전인데, 몸매 관리 해야한다 말은 하면서도 결코 젓가락을 놓지 않던 여자 단원들은, 피부 영양을 위해 고기는 먹었지만 술은 안 될 것 같다며 거의 집으로 돌아가고 결국 열 서넛 남짓한 인원만 근처 조용한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두 테이블로 나눠 앉았다.

이미 말 많은 준면과 종대가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기에 뒤늦게 들어온 사람들은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지 깊은 내적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 중 세훈은 그래도 누군가 하나 준면의 말을 들어주긴 해야지, 하는 생각에 준면의 테이블에, 종인은 종대에게 딱 잡힌 경수 때문에 종대 테이블에 앉았다.



 "무대감독님은 애인 없으세요?"

 "저요? 아..., 없으면 종대씨가 소개시켜줄 거에요?"

 화제는 돌고 돌아 연애로 돌아오고, 나름 신선한 인물인 경수에게로 집중된다.

백현이 무슨 일인지 먼저 돌아간 이후로 계속 어떻게 경수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하며 조용히 잔을 기울이던 종인은 귀가 번쩍 뜨이는 걸 느낀다.


 "어떤 스타일 좋아하시는데요?"

 "아, 진짜 소개해 주게요? 저는..."

 종인은 술을 마시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고, 슬쩍 대각선 맞은 편에 앉은 경수 쪽을 본다.

그 움직임에 종대와 이야기를 나누던 경수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종인에게 향해 한순간 눈이 마주친다.


 "저는... 평소에는 무뚝뚝한데 웃으면 편해지는 사람이 좋아요."

 "아, 뭔지 알 것 같아요!"

 "피부는 하얀 것보다... 약간 검고 건강해 보이는 게 좋구요,"

 "매력 있지. 그리고요?"

 화제가 화제이다 보니 시선이 전부 경수에게로 가있어 종인도 이번엔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경수를 쳐다본다.


 "또..., 쌍커플이 짙고,"

 누군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 건지 경수의 눈동자가 위로 향하며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다.

쌍커플, 나도 짙은데.


 "밤에 통화하면 목소리가 듣기 좋고..."

 "아, 그거 좋네. 근데 주관적이잖아요."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솔직한 사람이요."

 "흠..."

 정말 소개해줄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보는 건지, 종대의 리액션이 잦아든다.

저마다 머릿속에 어떤 모습인지 그려보는 건지 조용해진다.


 "아, 그리고,"

 그 잠깐의 적막 사이로 다시 경수가 입을 열고,


 "먼저 고백해주는 사람이요."

그 짧은 순간 종인은 경수의 눈이 똑바로 저를 향한 것 같아,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루한은 과감히 종대에 배팅했다.

무슨 말이냐면, 준면과 종대가 하나씩 차지한 2차 술자리에서, 민석이 종대 옆자리에 앉을 거라고 확신하고 그 맞은 편에 미리 자리를 잡았다는 소리다.

하지만, 뒤늦게 들어온 민석은 루한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쭈뼛대며 준면의 테이블로 갔고, 그래서 루한은 2차가 너무나도 재미가 없었다.

오늘따라 한국어가 더 안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적당히 반응해주면서 기회를 엿보며 술잔을 채웠다.


 그러는 사이,

무리하게 준면의 테이블에 앉은 민석은 타오와 크리스 중간에 껴서 착실히 취해가고 있었다.


 "민석씨가 생각보다 술을 잘 마시네요."

 "어? 나 잘 마셔여? 으흐흐흐, 그럼 우리 대표님도 한 잔-, 어?"

 "그래요, 아니 민석씨, 흘리지 말고 이렇게 따라야죠. 그래요."

 "헤헤, 나 잘 따른다. 그쵸?"

 작은 소주잔에 제대로 술을 따르지 못해 흘리는 걸 크리스가 민석의 손을 위로 겹쳐 잡고 잔을 채우는 걸 도와준다.

그러면 그게 또 좋다고 웃음을 흘리며 민석이 크리스에게 애교를 부리고, 크리스는 술 병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민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이전에 사고로 민석이 크리스의 뒤통수를 강타한 적은 있었지만,

극단의 대표와 말단 소품담당이라 사실 민석과 크리스는 얼굴만 알 정도의 사이라고 할까, 오히려 약간 불편한 사이라고 할까.

어쩌다 그 옆에 자리를 잡은 민석이 그 불편함 때문에 대화를 잘 나누지 못해 술을 마시는 속도가 빨라졌고,

술로 말하자면 바닥이 없는 크리스는 민석이 취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꽤나 즐거워 하고 있었다.


 평소엔 사고만 치고 다니는 골치덩어리였는데,

귀여운 구석이 있네.


 "저번에 내가 때린 건 미안해요. 전 진짜 오세운인주 알아써요-"

 "아닌데, 괜찮은데, 민석씨 왜 울어요. 울지 마, 뚝!"

 그러다 또 뜬금없이 울어버리는 민석에 크리스는 잔을 내려놓고 민석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준다.

아니, 일 분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었는데?


 "울면 민석씨 키 더 작아진다."

 "헙, 안 돼! 나 키 더 자가지면 바이킹도 못 타는데- 흐앙ㅠ"

 얼러보려고 했더니 더 울려버린 크리스가 등을 토닥이다가 다시 민석을 바로 앉히고 마주본다.

그새 한 웅큼 눈물을 쏟아 뺨에 난 눈물길을 크리스가 손으로 닦아준다.


 "민석씨 바이킹 좋아하는 구나. 바이킹 태워주면 안 울거에요?"

 "어? 바이킹? 바이킹? 가요?"

 금새 또 우는 걸 멈추고 이번에는 젖은 눈이 동그래 져서 크리스를 쳐다본다.

크크큭,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느끼며 크리스는 뭔가, 자기가 어린애를 속여 꼬드기는 유괴범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바이킹. 바이킹이라. 이 시간에 탈 수 있는 바이킹이라곤..., 

어쩌나, 민석씨. 나 머릿속에 그것밖에 안 떠오르는데. 일단 호텔에 가서,


 "많이 취했네."

 "우으으..."

 크리스의 머릿속에 바이킹의 구체적 설계가 그려지기 시작할 때 루한이 뒤로 다가와 손등을 민석의 뺨에 가져다 댄다.


 "크리스, 밍석 데려갈게."

 "네가?"

 "크리스 너 지금 표정이 위험해."

 직설적으로 던지는 루한의 말에 크리스는 뜨끔해서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사실 이미 약간 흥분했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


 "그래, 네가 데려다 줘라."

 좀 아쉽긴 한데.


 "밍석, 집에 가자."

 "집? 밍석이 집?"

 "그래, 밍석이 집."

 한껏 취해 몸이 축 늘어진 민석을 겨우 일으켜 크리스의 도움을 받아 등에 업는다.

루한은 딱히 술자리에 미련 없이 바로 민석의 옷을 챙겨 밖으로 나오는데, 밤공기가 차가운지 루한에게 업힌 민석이 더 꼭 팔을 감아온다.


 "나 졸려..."

 "그래, 가서 자자."

 "어? 루한도 자게?"

 "어?"

 택시를 잡으려 큰 길로 걸어나가면서

등에 업혀 완전히 루한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민석이 옹알거리는 말에 대꾸해주다 보니 루한은 큰 갈등에 휩싸인다.


 "밍석이 집 가면 루한도 자?"

 "나도 잠은 자야지."

 "우와, 루한도 자는구나-"

 "나도 자도 돼?"

 "잘래- 밍석이 졸리다..."

 분명 민석이 취해서 말을 제대로 구분해서 못하고 있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루한은 어쨌거나 민석이 자라고 한 거니까, 같이 자도 되는 게 아닐까, 마음속의 마귀가 속삭이는 말에 정신이 홀리기 시작한다.


 뭐 어때, 취해서, 데려다 주고, 힘들어서, 같이 잘 수도 있고. 또 뭐, 그냥 자기만 하는 건데. 괜찮지 않을까?

아니야, 분명 아침에 밍석이 정신을 차려서 같이 자게 된 걸 알면, 지금까지보다 더 피해다닐 텐데. 그냥 데려다 주고 나오자.

그치만..., 밍석이 같이 자도 괜찮다고 말한건데. 혹시 방금 잠깐 술이 깨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침에 민석이 술 때문에 힘들텐데, 챙겨 주고 싶은데.

그냥 잠만 같이 자면, 손만 잡고...










   



 "그어니까 세후나, 너 짓챠 맘 상한 거 아니지? 그러면 안 돼-"

 "응, 알아요, 준면아."

 "난 지챠 너 자구 바다서 열씨미 하라구,"

 "자극 받아서 열심히 하라고?"

 "어! 그거야! 세후니 잘 아네?"

 "잘 알지. 준면이 마음은 세훈이가 항상 잘 알지."

 "아니야! 세후니는 준며니 마음 잘 몰라. 맨날 속 써겨..."

 "그래, 들어가자. 잠깐만 멈춰서 봐요."

 준면을 거의 안다시피 부축한 채 세훈이 준면의 아파트 비밀번호를 누른다.

문을 활짝 열고 다시 준면을 부축해 침대까지 걸어들어가는데 준면은 이미 중얼거리는 것도 멈춰 조용하다. 

일단 침대에 눕히고서 신발을 벗기고, 또 양말을 벗긴다. 현관에 신발을 가져다 두고 다시 들어와 이번엔 몸을 살짝 안아 들고 겉옷을 벗긴다.


 불편하겠다.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어주고 그 위로 이불을 덮어주며 세훈은 오늘따라 힘들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준면이 누운 옆자리에 세훈이 걸터앉는다.

오늘은 나도, 술을 꽤 많이 마셨구나.


 "이렇게 내가 데려다 주는 게 몇 년 째에요."

 고개를 바로 들어 베개에 다시 괴어주니, 창 밖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이 준면의 얼굴을 비춘다.

손을 뻗어 뺨을 쓸어본다.


 "얼마나 형을 이렇게 더 데려다 줄 수 있을까?"

 형도 나이가 있으니. 일이 좀 안정이 되면 여자도 만나고, 결혼도 하겠지. 그러면,

더 이렇게 데려다 줄 일을 없을 거야... 그쵸?


 "내가 얼마나 더 형한테 어리광 부릴 수 있을까?"

 뺨을 다시 한 번 쓸어본다. 피부가 조금 거칠어진 것 같기도 하다. 코 앞으로 다가온 공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서일까.

요즈음 들어 형과 이별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형을 사랑하는 걸 멈춘 건 아닌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바보처럼 겉돌기만 하는 것에 지쳐버린 건지, 아니면

형을 놓아주어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지.


 문득,

내가 형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서 하는 모든 것들이 형에겐 그저 괴롭힘 밖에 되질 않는 것 같단 생각이 너무 커져서, 그냥 이제

그만 해야 할 것 같아.


 그래서, 이것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할게.


 준면의 턱을 조심스럽게 감싸들고 천천히 몸을 숙여 가볍게 입을 맞춘다.

미련이 남아 평소보다 더 입맞춤이 길어진다. 마지막인데, 조금만 더. 

조금만,





 세훈아,


 핫!

덥썩, 제 손을 잡아오는 손길에 세훈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킨다.

어느샌가 준면이 눈을 뜨고 있다. 



 "형..."

 "세훈아..., 나 너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


 벌떡 일어난 세훈은 말없이 뛰쳐나간다. 준면은... 잠들 때까지 꽤 오랜 시간,

세훈이 앉아있던 자리를 손으로 쓸고, 또 쓸어본다. 












 ////

 수능이 끝났네요 ㅎㅎ 아...

바쁘다는 핑계로 안 쓴지 너무 오래되고, 또 별로 읽어주시는 분들도 없는 것 같아서 그만 쓸까 하고 전에 쓴 걸 읽어봤는데 그냥 좀 더 써보기로. 어차피 그렇게 길게 계획하고 쓴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써서 이상한 기분이 많이 들지만 퇴고나 고민 없이 한 번에 써내려가보는 걸로 마음 먹었던 처음 다짐대로 쓴 건 올린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고쳐보지요 뭐... (말만)


 근데 왜 커플들 분위기 왜 다 이렇죠? 으잉... 내가 지금 솔로라 그런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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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너무너무너무 재미있어요~^^잘읽고가요1
10년 전
데일리루민
감사합니다 ㅠㅠ 저는 못 썼다고 땅 파고 있었는데 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2
아 진짜재밌어요 ㅎㅎ 저진짜댓글안쓰는데.. 담편꼭써달라고 부탁드릴려고남깁니다 !!!ㅎㅎ
10년 전
데일리루민
고맙습니다 ㅠ
내가 보고 싶은 거나 써야지, 한다고 쓰면서도 사실 좀 의기소침해서 그냥 메모장에나 끄적거리다 말아야겠다 하고 있었는데 ㅠ 다음편 곧 써볼게요 근데 며칠 걸려요...;

10년 전
독자3
감사합니다!! 기다릴게요 ㅎㅎ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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