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서
연구소의 모든 기밀사항을 누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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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또다시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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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약품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방이 온통 통유리로 이루어진 실험실은 뿌연 가스가 가득했다. 그 가운데 C가 서있었다.
곧 울리는 알람이 그녀를 맞이했다. 본연구소 13기 정식 연구원 마지막 시험에 합격한 것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지난 20년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실험실 안의 가스가 사라지고 자동 밀폐장치가 풀렸다.
C는 당당히 걸어나왔다. 실험실 위의 스피커에서 짧은 축하메세지가 흘러나왔다.
"축하합니다. 본연구소의 정직원에 합격하셨습니다."
C는 기뻤다. 날적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어온 꿈의 직업. 게다가 들어보지도 못한 지방의 연구소도 아닌 본연구소의 연구원직.
C가 앞으로 가지게 될 직책이었다. 안내음성에 따라 실험실용 가운으로 환복한 그녀는 시험장을 나와 대기했다.
합격자실에는 C뿐이었다. 고요한 기운에 C는 괜히 숨을 삼켰다. 모든 시험은 자동화 시스템에 의해 진행되었기 때문에,
하릴없이 안내음성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C는 합격자실을 눈으로만 구경했다. 온통 흰벽에 일고여덟장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본연구소의 성과물들이었다. [ XX0613 본연구소 설립. ] 역사적인 순간. 연구소 설립일은 공휴일이었다.
[ 921204 클론1204 실험 성공 ] 인간 복제를 완벽히 성공한 첫 성과물이었다. C는 실제로 클론 1204를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합격자 분들은 대강당으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C는 당황했다. 합격자 '분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 여전히 합격자실에는 C뿐이었다. 대강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시험 전 나눠준 팸플릿의 지도를 보고 이동한 대강당에는 임원으로 보이는 몇명과 본연구소 정식연구원 300여명이 줄 맞춰 서있었다.
강단 위에는 연구소장이 C를 기다렸다. 날카롭게 생긴 여자 비서의 말을 따라 C는 강단 위로 올라가 연구소장의 앞에 섰다.
학교에서 교과서에 실린 사진대로 연구소장은 젊은 얼굴이었다. '연구소장은 자기 클론만 백명이 넘는대. 조금만 다쳐도 몸을 바꾼다나봐.'
C는 이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곧 수여식이 진행되었고 C는 합격자가 자신뿐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축하합니다. 연구원 R0613. 마침 일련번호도 연구소 설립일 날짜와 같네요."
연구원 R0613. C는 웃으며 상장을 받았다. 연구소장과 사진도 찍었다. 동료들의 박수소리를 들으며 강단에서 내려왔다.
C는 연구소의 인상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수많은 수험생들을 제치고 홀로 합격한 인재 중의 인재.
20살부터 응시가능한 시험을 한번에 통과하고 일련번호마저 연구소 설립일과 동일한 젊은 여자 연구원.
그녀의 선서 영상은 교과서 자료로 활용될 예정이었다.
"상장 및 부상은 집으로 배송되니 걱정마세요. 내일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기숙사동은 저쪽이고요."
비서가 종이 상자를 건네며 말했다. 흰 종이 상자에는 연구소 마크와 그녀의 일련번호가 적혀있었다.
상자를 들고 기숙사 동으로 이동하면서 C는 많은 것을 보았다. 대부분 교과서에서 보았던 것들이지만 본연구소를 직접 견학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학창시절 진로체험이니 뭐니 해서 갔던 지방 연구소와는 시설부터 차원이 달랐다. 온통 새하얀 벽에 새하얀 천장, 바닥. 눈이 빠질것 같았다.
"정면을 응시하세요."
기숙사에 도착한 C는 홍채 인식 센서에 눈을 댔다. 철저한 개인주의와 보안.
실험 논문이나 결과가 그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에 도난예방은 필수였다.
"R0613. 신분 확인 성공."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기숙사 방은 잘 정리된 호텔처럼 깔끔했다. 탁자 위에 상자를 올려놓은 C는 뚜껑을 열어보았다.
실험용 가운과 배찌. 연구원증. 간단한 필기도구와 생활용품. 연구원증에는 부서명 없이 일련번호와 사진만 달랑 적혀있었다.
C는 연구원증을 보고 괜히 설레 목에 걸어 보았다. 가운도 입어보았다. 이럴게 아니지. C는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R0613. 어디로 연결해 드릴까요?"
"본가로 부탁드립니다."
"모든 대화내용은 실시간으로 녹음, 감청되어 저장됩니다. 동의하십니까?"
"네."
선서. 연구소의 모든 기밀사항을 누설하지 않는다.
연구소장아래 연구원들의 기밀은 없었다. 이제 돌아갈 곳도 없다. 연구소에 몸담은 이상 철저히 귀속되어 관리 받았다.
화상통화는 물론 가족 면회까지 모두 녹화, 녹음되어 저장되었다. 연구소 밖 외출은 꿈도 꿀 수 없었으며 면회는
드넓은 연구소 내에서만 가능했다. 기밀 누설, 분란, 선동. 모두 해고의 대상이었으며 해고 된 후의 일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생체 실험체로 쓰이던지, 장기 클론으로 쓰이던지.
"여보세요? 응 엄마. 나 합격했어. 아냐, 안울어. 진짜."
C는 부모님과 통화하며 감정이 북받쳐 울었다. 그녀의 부모님도 울었다. 합격 소식이 기뻐서? 아니었다.
더 이상 부모님을 마음놓고 볼 수 없고, 더 이상 딸을 딸처럼 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연구원이 꿈의 직업인 이유는 가장 안전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실종된 지인을 생체 실험실 한켠에서 샘플 1204 로 만날때의 두려움이란.
"응. 엄청 좋아. 나중에 면회와. 연구소 내에서는 가능하대. 편의시설두 많아.
엄마 좋아하는 영화관도 있구, 카페도 있구. 클론 1204 봤냐구? 못봤지- 그럼.
내일부터 출근이야. 알았어 보고 진짜 잘생겼는지 알려줄게. 응. 사랑해."
그리고 그와 똑같은 모습의 클론을 교과서에서 봤을때의 공포란.
"R0613. 통화내용과 기록이 모두 저장되었습니다. 감청 심의결과 합격입니다."
통화 내용 속에 은근히 안부를 숨겨 물어야만 할 정도로 끔찍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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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또다시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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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C는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샤워하는 내내 물에서는 수돗물의 소독약 맛과 다른 약품맛이 났다.
흰 와이셔츠에 검은 슬랙스 바지를 받쳐 입고, 실험용 가운을 걸쳤다. 오른쪽 가슴께에 연구소 마크 모양의 배찌를 달고
연구원증까지 목에 거니 영락없는 신입 연구원이었다. 심호흡을 한 C는 기숙사 문을 열고 나왔다.
"원래 이런 수업받을땐 북적북적한게 맛인데. 그치?"
C의 업무 인수를 맡은 연구원 R0259 선배가 말했다. C와 같이 스물에 들어와 올해로 육년째 일하고 있다는 연구원 R0259는
처음 C를 보고 극진한 선배대접은 질색이니 하지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씻지도 않고 나왔는지 눈꼽 낀 눈을 한 채였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C는 먼저 그에게 간단한 연구소 설명과 부서에서 하는 일들을 듣고 클론들의 신상이 적힌 차트를 받았다.
"클론 실제로 본 적 있어? 왜 무슨 행사하고 그럴 때."
"아뇨. 한번두요."
"괜히 잘생긴 애들은 만들어가지고. 여자 연구원들이 좋아한다고 것도 엄청."
"음..."
"여자 클론들도 이쁘긴한데. 어차피 우리 부서 아니니까 별로 볼 일 없을 거야."
선배는 말하며 C를 문 앞으로 안내했다. 다른 문들과 달리 겉이 티타늄으로 된 커다란 미닫이 문이었다.
잠금 장치가 무섭도록 치밀했다.
"저 놈들이 어지간히 나가려고 하는지 문짝만 다섯번째 바꾼거야."
안으로 들어선 C는 가로로 길게 뻗은 넓은 복도와 벽에 붙은 문들을 보며 병원같다고 생각했다.
방문 옆에는 클론들의 번호가 붙어있었다. 선배는 왼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스치듯 보이는 문에 달린 작은 유리창 안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병실같았다.
"네 담당은 이쪽이야. 걸려도 하필 얘넬 걸려. 애 좀 먹을거다."
"따로 방이 있어요?"
"1204. 알지? 그 친구부터 0901까지. 총 일곱. 주의요망."
"오늘부터 스케줄 맞춰 들어가면 되나요?"
"응. 오늘은... 0309..부터네. 어,휴.. 조심하고.
진짜 조심해. 이 말밖에 해줄게 없다.
그럼. 선서, 아모르파티."
"아모르파티."
조심하라는 선배의 표정에서 안쓰러움이 보였다. 아침부터 힘든 스케줄이 잡혔는지 C는 걱정됐다.
R0259 가 나가고 혼자 남은 C는 7개의 방앞. 조금 멀게 놓인 사무실 책상에 앞에 앉아 받은 차트를 뒤적였다.
오늘 스케줄표가 차트 앞장에 한장 끼워져 있고, 책상 위 스크린에 시간별로 떠 있었다.
[ 오전 8:30 클론 0309 면담 및 테스트 ]
십분 후의 스케줄이었다. C는 아침에 기숙사 문을 열고 나왔을 때처럼 심호흡을 했다.
첫 업무였던 탓에 잘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C는 자리에 앉아 긴장을 달랜답시고 낙서를 했다.
30분이 되자 안내음성이 나왔다.
"스케줄 넘버 001. 오전 8시 30분. 클론 0309. 면담 및 테스트.
연구원의 지문과 고유번호를 입력하세요."
C는 앞에 책상 스크린에 뜬 확인 버튼을 눌렀다. 지문을 인식하고 일련번호가 아닌 매일 아침 부여받는 고유 번호를 입력해야했다.
클론들의 면담과 테스트를 누가 했는지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C는 0309의 방이 바로 앞임에도 멀게 느껴졌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노크를 했다.
"아."
연구원 행동강령에 노크해도 된다는 말은 없었는데. C는 문을 여는 잠깐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행동강령을 어겼다면 징계는 최소 일주일이었다. 꼼짝없이 기숙사에만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곧 C는 생각의 꼬리를 잘랐다. 눈앞에,
"노크?"
클론이 있었다.
0309는 지나치게 말랐고, 하얗고. 눈이 세모꼴이었다.
C는 지체없이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C와 0309 사이에는 책상 뿐.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클론이 연구원에게 무력을 가할 시에 실험실 내에 뿌연 가스가 가득 찼다. C의 마지막 시험. 유독가스에서 일정 시간이상 버티기.
유독가스라고 포장했으나 수면가스에 가까웠고 내성만 있으면 버틸 수 있었다. C는 연구원 준비를 할때 대비해 내성이 있지만 클론의 경우에는
모든 약품을 검열 과정을 거쳐 받기 때문에 내성이 있을리가 만무했다.
"클론 0309. 면담 및 테스트 진행하겠습니다.
모든 대화내용은 실시간으로 녹화, 녹음, 감청되어.."
"알어."
"..저장됩니다."
클론이 말을 끊었다. C는 차트를 보며 놀라지 않은 척 했다. 왜 선배가 조심하라고 했는지 알것만 같았다.
클론이라고 해서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람보다 더 사람같았고 무서웠다. C는 왠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정식 일련번호를 말씀해주세요."
"930309."
"키,몸무.."
"176. 57."
"나ㅇ,"
"24"
앞에 앉은 0309는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다. 매일 아침마다 하는일이니 당연했다.
줄줄 외우듯 키 몸무게, 나이를 뱉어낸 0309는 C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럼 테스트부터 진행하겠습니다."
"뭘 또 물어."
"취침은 몇시에 하셨죠?"
"..."
C는 0309의 말은 무시한채 테스트를 이어갔다. 그렇게 배웠고. 행동강령에도 그렇게 써있었다.
면담 및 테스트 과정에서 클론의 대답 외 언행은 담아두지 말것. 대답을 동문서답하거나 묵언 할 경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것.
때문에 차트의 반절이 묵언으로 기록되었다. 빗금만 가득한 차트에 별 성과는 없었다. C는 마지막 질문을 하기 위해 차트를 넘겼다.
"마지막입니다. 지금 기분은요?"
"적어."
"네?"
"존나 개같다고."
C는 그와중에 생각했다. 저런 욕은 어디서 배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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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또다시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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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론 0309 ]
[ C가 그린 '실험실 도면' 낙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