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행동강령
클론의 언헹과 행동에 현혹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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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또다시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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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지는 카메라 플래시가 클론 1204를 에워쌌다. 정장을 입고 마네킹처럼 대중 앞에 던져진 그는. 클론 연구소의 간판이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1204는 자리에 착석했다. 커다란 스크린에 그의 얼굴이 들어찼다. 미소는 가볍게. 행동은 신중하게.
어디서 배웠더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주입되어 온 기억의 한 부분일 것이라고, 1204는 생각했다.
"여러분 클론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사회자가 외치자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1204는 의식처럼 박수를 쳤다. 사실, 그리 기쁘지 않았다.
"이제 당신의 다치고 약해진 몸을 건강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어느새 스크린에는 클론 권장광고가 나오고있었다. 잠깐의 텀을 두고 강연회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연구소장이 무대 옆에서 준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1204의 눈이 그를 집요하게 쫓았다. 저건 클론의 몸일까?
곧 화면에 발표 자료들이 띄워졌다. 연구소 설립일부터 시작해 클론 1204의 탄생, 다음해의 0309...
탄생 과정을 보고있자니 토기가 밀려왔다. 1204의 혈액. 샘플 1204. 작은 세포 하나까지 까발려지는 기분이었지만 웃었다.
기자들에게 찡그린 얼굴 따위를 찍힐 수는 없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는 질문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사회자의 말에 여기저기 손을 드는 사람이 속출했다. 연구소장이 몇명을 뽑아 질문을 들었다.
새로운 연구 계획이나 클론 생산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이 대다수였다. 연구소장은 1204를 한번보더니 대답했다.
"최근 착수한 계획이 있긴 합니다만, 자세한 내용은 기밀사항이기 때문에 저는 이만 줄이고.
함께 온 클론 1204에게는 질문이 없으신가요?"
연구소장은 클론 1204를 가리켰다.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몰렸다. 기자들은 놀란 그의 표정에 신나게 셔터를 눌러댔다.
1204는 천천히 일어나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받았다. 희롱거리가 되는 것.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믿고있었다.
"여자친구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그건 해보셨는지?"
순식간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귀에 꽂혔다.
1204는 믿고싶었다. 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할 수 있는 것이.
미소는 가볍게. 행동은 신중하게.
익숙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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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또다시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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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클론 방에 노크하고 들어가는 거요."
"노크?"
"네. 그거 행동강령 위반인가요?"
C는 지레 찔려 R0259 에게 물었다. 선배는 한참을 생각했다. 입사 초기에 외웠던 행동강령을 되짚어 보는 중이었다.
C는 숨을 삼켰다. 출근 첫날부터 징계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아니, 위반은 아닌데. 그렇게까지 예의바른 건 첨봤다. 보통 벌컥 열고 들어가지 않나? 기선제압."
선배는 허공에 대고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C는 웃으며 0309의 테스트 결과지를 내밀었다.
원래대로라면 별도의 결재없이 시스템에 결과 입력 후 결과지를 보관해야 했다.
"이번 스케줄만 배우는 과정이니까 이렇게 하고
다음 스케줄부터는 나한테 가져오면 우리 둘다 징계야. 알지?"
"네."
"잘한거 같아? 그 친구 성격이..."
선배는 차트를 보고 말을 멈췄다. 차트의 절반이 빗금이었다. 이럴리가 없는데.
선배의 손이 바빠졌다. 앞장을 보고 뒷장을 보아도 빗금뿐. 질문 외의 글씨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너 클론이 한말은 다 받아 적어야되는 거 알지. 욕이라도."
"네."
"근데 왜 아무것도 없어?"
"네? 있어요. 여기 뒤에."
C는 친절히 마지막 질문이 적힌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존나 개같다고.' 선배는 놀란 눈치였다.
"달랑 한마디야? 진짜 이것만 말했어?"
"제가 잘못한거에요?"
"아니 그럴리가 없는데. 이리와봐."
선배는 실험실 벽면의 스크린을 켰다. 수많은 폴더 중 [ 클론 0309 면담 및 테스트 결과 ] 를 클릭하자
년월일 장소 순으로 문서화된 결과들이 줄을 섰다. 잇달아 안내 음성이 작은 창을 띄우며 흘러 나왔다.
"열람하고자 하는 연구원의 지문과 고유번호를 입력하세요."
C와 선배는 각각 자신의 지문과 고유번호를 입력했다. 선배는 '아무거나 열어봐도 이렇게 깨끗하지는 않을 거'라며
개중에 눈에 띄는 문서를 클릭했다. 열린 문서는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살벌한 욕이나 거친말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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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취침은 언제했나요?
A. 2시라고 씨발. 2시에 재우면서 그건 왜 묻는거야.
Q.최근 한 활동은 무엇인가요?
A, 너넨 죄책감도 안드냐? 방금까지 기억주입 당하고 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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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 마지막입니다. 지금 기분은 어떤가요?
A. 씨발 존나 개좆같다. 꺼져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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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는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진짜 제 질문에는 한마디도 안했는데."
"생각할 시간은 줬고?"
"질문마다 1분은 기다린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래걸렸구나. 저 친구 면담은 5분 컷인데.
난 또 네가 욕듣고 충격 받아서 질문도 못하고 있는 줄 알았어."
"근데 욕은 어디서 배운거에요?"
"몰라. 기억주입할 때 잘못 입력됐나봐. 쟤 고딩때부터 저랬거든."
고딩. 클론에게도 고등학생 시절이 있었구나. C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에게도 있는 경험이 클론에게도 있을까?
친구를 사귀고 숙제를 같이하고 선생님께 혼나는 등의. 짝사랑이나 연애같은 것도 해봤을까? C는 궁금한게 많았다.
"클론끼리도 연애하고 그래요? 교과서에 그런 내용은 몽땅 빠져있던데."
"연애? 쟤들은 그런 감정 몰라. 남녀는 철저히 격리시키고 분리되어있지.
시도를 안해본 건 아닌데. 억지로 하려니까 문제가 많더라고. 궁금하면 옆 연구실에 논문 뒤적여봐. 구경할거 많다-."
C는 오늘 스케줄표와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두번째 스케줄은 오후 1시. 점심시간을 빼면 2시간동안은 다른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C는 시스템에 결과를 입력하고 결과지를 보관한 뒤에 옆 연구실로 향했다. 책장으로 둘러쌓인 연구실 한가운데에 둥근 테이블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모든 자료는 열람 허가를 받아야 했으므로 연구실의 스크린에 또 한번 고유번호와 지문을 입력했다.
"열람하고자 하는 문서의 카테고리를 선택하세요."
카테고리 페이지는 총 10페이지였다. C는 [감정] 과 [재생산] 카테고리를 선택했다.
"찾으시는 문서는 총 16676개입니다. 열람방식을 선택하세요."
스크린 열람과 직접 열람이 있었다. C는 직접열람을 선택했다. 문서가 있는 책장 위의 센서가 빛났다.
문서를 한아름 꺼낸 C는 그것을 모두 정독하기 시작했다. 감정과 재생산에 대해서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아 전혀 모르는 부분이었다.
그녀는 다양한 실험들을 보며 손톱을 뜯었다. 실험결과가 모두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C가 정리한 결과 지금까지의 클론은 단순 장기 배양용이었기 때문에 단기적인 속성이 있었다.
때문에 기억상실이나 신체 기능 마비가 자주 왔고 집단 폐기시키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는 클론에게 강제로 재생산을 시키는 것은
그들의 정신과 육체를 모두 지배하는 것이므로 클론의 단기적 속성에 불을 당기는 행위였다.
실험 결과 모두 결함이 생겨 폐기되었고, 심한 경우 자살하기도 했다.
문서를 모두 읽자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C는 결국 점심을 거르고 다음 스케줄을 진행하기로 했다.
연구실을 지나 실험실로 가려는데 밖이 소란스러웠다. 흰색의 큰 차에서 웬 남자가 경호를 받으며 내리고 있었다.
로비로 걸어 들어오는 남자는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었다. C를 스치듯 지나간 그는.
"...1204?"
그녀가 그토록 보기를 소원했던 1204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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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또다시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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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론 1204]
암호닉
[ 캐서린 / 창가의 토토 / 안녕엔젤 / 슈크림 / 지니 / CGV / 꾸기 / 꾸기얀 / 뷔티뷔티 / 정꾸야 ] 님
모두 감사합니다.